최근 번역돼 발간된이 소설책에는 '무라카미 하루키 데뷔 25주년 기념 장편소설'이란 수식어가 붙어 있다. 일본에서 발표된 게 2004년이라고 한다.
애프터 다크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비채 |
다카하시는 말한다. "법원은 멀티플렉스 영화관이랑 비슷해. 그날 있는 심리審理랑 개시 시각이 프로그램 편성표처럼 입구 게시판에 붙어 있고, 그중에서 간심을 가질 만한 걸 골라 거기 가서 방청하는 거야.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어. 단 카메라와 녹음기는 못 갖고 들어가. 음식물도 안 되고. 떠드는 것도 금지돼. 자리도 좁고, 졸면 법정 경위한테 주의를 받기도 해. 하지만 어쨌거나 무료로 입장하는 거니까 불평할 순 없어."
"그런데 법원에 몇 번 드나들면서 재판을 방청하다 보니까, 재판을 받는 사건하고 그 일에 얽힌 사람들한테 이상하게 관심이 생기더라고. 아니, 그보다 점점 남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어. 기분이 참 묘하더라. 그렇잖아? 거기서 재판을 받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나랑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라고. 나랑 다른 세계에 살면서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고, 나랑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야. 그 사람들이 사는 세계하고 내가 사는 세계 사이엔 튼튼하고 높다란 벽이 있어.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 그렇잖아? 내가 흉악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없는걸. 난 평화주의자고, 성격은 온후하고, 어렸을 적부터 누구한테 주먹을 휘둘러본 적도 없어. 그렇기 때문에 순전한 구경꾼의 입장에서 재판을 볼 수 있었어.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그는 얼굴을 들고 마리를 본다. 그리고 표현을 골라 말한다.
"하지만 법원을 드나들면서 관계자의 증언을 듣고, 검사의 논고와 변호사의 변론을 듣고, 본인의 진술을 듣다 보니까 어쩐지 자신이 없어졌어.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된 거야. 두 세계를 가르는 벽은 사실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있어도 종이로 만든 얄팍한 벽일지도 모른다. 몸을 가볍게 기댄 순간 쑥 빠져서 저쪽으로 쓰러질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 자신 안에 저쪽이 벌써 몰래 숨어들어와 있는데 모르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말로 설명하려니까 쉽지 않지만." (115~117쪽)
"마리. 우리가 서 있는 지면은 말이지, 단단해 보이지만 조금만 무슨 일이 있으면 밑이 쑥 꺼지고 그래. 한번 꺼지면 그걸로 끝장이야. 두 번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지 못해. 저 아래 어둑어둑한 세계에서 혼자 살아가는 수밖에 없어."
고오로기는 자신이 한 말을 생각해보더니 반성하듯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189쪽)
고오로기는 텔레비전 리모컨을 여전히 손에 든 채 그 자리에 서 있다.
그녀는 말한다. "그래서 생각하는 건데, 인간은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사는 게 아닐까? 그게 현실적으로 중요한 기억인지 아닌지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아. 그냥 연료야. 신문 광고지가 됐든, 철학책이 됐든, 야한 화보사진이 됐든, 만 엔짜리 지폐 다발이 됐든, 불을 지필 때는 그냥 종이쪼가리잖아? 불은 '오오, 이건 칸트잖아'라든지 '이건 요미우리 신문 석간이군'이라든지 '가슴 끝내주네'라든지 생각하면서 타는 게 아니야. 불 입장에선 전부 한낱 종이쪼가리에 불과해. 그거랑 같은 거야. 소중한 기억도, 별로 소중하지 않은 기억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기억도, 전부 공평하게 그냥 연료." (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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