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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편집국 차원의 신년기획을 준비하기 위해 2박3일의 짧은 일정으로 갑작스럽게 일본을 방문했다. 원래 아이디어는 후배가 낸 것이었는데 후배가 일정을 내기가 어려운데다 니시카와 나가오 선생이 지난해 3월 방한했을 때 인터뷰를 했던 인연으로 내가 가게 된 것이다. 이 대담은 경향신문 4일자에 실렸는데, 1일자에 실린 이만열-한홍구 선생의 대담과 함께 보면 2010년의 시점에서 지난 100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균형잡힌 이야기들을 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만열-한홍구 선생 대담 보기)

아울러 지난해 니시카와 선생을 짧게 인터뷰했던 기사를 갈무리 해둔다. (니시카와 나가오 인터뷰)

2010년은 우리로 하여금 한국 근·현대사를 돌아볼 것을 요구한다. 100년 전 한·일 강제병합을 필두로 근·현대사에 굴곡을 만들어온 여러 사건이 시간적으로 마디가 지어지는 해이기 때문이다. 지난 100년을 돌아보는 것은 과거를 회고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우리 내부와 외부의 시대적 흐름을 통찰하는 동시에 미래를 조망해보기 위해서다. 21세기 한국(인)과 일본(인) 그리고 세계는 어디에 서 있고 한·일병합과 식민지 경험은 무엇을 남겼는가. 그리고 지난 100년의 역사를 딛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런 화두를 놓고 니시카와 나가오 나가오(西川長夫) 리쓰메이칸(立命館)대학 명예교수와 윤해동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가 의견을 나눴다. 대담은 지난달 20일 일본 교토에 있는 니시카와 나가오 교수의 연구실에서 홍종욱 도시샤(同志社)대학 언어문화교육연구센터 교수의 통역으로 3시간 동안 이뤄졌다.
윤해동 = 19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제출돼 일본에서도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선생님의 '국민국가론'은 2000년대 이후 '신식민주의론'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도 선생님의 연구성과가 많이 알려져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이번 대담은 '한·일병합 100년'을 맞이해서 기획됐습니다. 한·일병합 100년이라고 하지만 사실 2010년이 딱히 큰 의미를 갖기는 어려운 것 아닌가 합니다. 오히려 세계사적으로는 1989년 사회주의권 대붕괴가 많은 연구자들 사이에서 '근대의 종언' 또는 '새로운 시대로의 이행'의 계기라고 얘기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89년 전후의 시기가 전환으로서는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89년 이후 20년이 흐르는 사이에 자본주의의 성격이 상당히 크게 변하고 있고, 국민국가도 위기라고 할까요, 그 성격이 크게 바뀌는 국면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2010년을 맞이하면서 최근의 큰 전환, 이행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시는지요?
니시카와 나가오 나가오 = 저는 2010년이 정말로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89년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4월 제가 한양대 석학강좌에서 2차례 강의를 했습니다. 첫날 주제는 '프랑스 혁명 재론'이었습니다. 89년은 프랑스 혁명 200주년과 겹칩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바로 그 해입니다. 문제는 '프랑스 혁명은 무엇인가'였는데, 결국 국민국가 형성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강좌의 부제가 '혁명은 과연 식민주의를 극복했는가'였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동안 프랑스 혁명에 대해 인권선언을 비롯한 해방적인 측면이 주목을 받았지만 결국 식민주의를 극복하지는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혁명을 계승한 공화정이 식민주의를 추진했던 것이지요. 이런 측면에서 병합 100주년을 맞이하는 2010년은 식민주의 문제를 좀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윤해동 = 한국과 일본 그리고 세계의 상황을 볼 때, 선생님이 제기하신 '신식민주의론'은 현실의 전개를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봅니다. 글로벌화는 새로운 식민주의, 곧 신식민주의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듯합니다. 2008년 하반기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했습니다. 일본에서도 경제양극화와 사회해체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전 세계가 '승자독식 사회'로 가고 있습니다. 일본 아사히신문이 2009년의 한자로 '신(新)'이라는 글자를 선정한 데 반해, 한국 직장인들이 고른 사자성어는 '먹고 살 걱정'을 뜻하는 구복지루(口腹之累)였습니다. 이것은 재미있는 양의성(兩義性)을 가지고 있습니다. 2009년 일본에서는 정권교체가 일어나 이른바 '55년 체제'가 완전히 붕괴됐습니다만, 경제양극화와 사회해체는 여전히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니시카와 "승자 독식의 세계화… 신식민주의 진행중"
니시카와 나가오 나가오 = 2001년 9·11 이후 특히 2008년 금융위기 이후의 경과를 보면 여태껏 우려했던 것이 현실화되는 듯한 인상을 갖게 됩니다. 극단적인 격차가 발생하는 양극화 현상은 역시 글로벌화가 최종 단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 아닌가 합니다. 글로벌화는 결국 식민지를 만들어온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식민지가 없어진 뒤에 오히려 식민주의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베를린 장벽 붕괴도 기본적으로는 글로벌화의 물결에 휩쓸려서 일어난 것 아닌가 합니다. 베를린에 가보면 엄청난 '격차사회'가 형성돼 있습니다. 일종의 '내부 식민지'라고 할 만한 그런 것이 구동독 지역에 실현되고 있습니다. 제가 베를린 거리를 걸으면서 생각했던 것은 역시 한국 문제였습니다. 분단국가가 어떻게 이런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2010년을 맞이하면서 계속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윤해동 = 한국에선 정치적 우파들이 오히려 통일이나 통합에 대해 상당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북한에 의해 한국사회의 부가 박탈되는 데 대한 위기의식입니다. 역설적이지만 흥미로운 현상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제 지난 100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말씀을 나눴으면 합니다. 먼저 '한·일병합'의 문제입니다. 일본의 한국병합은 세계체제적 식민주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재미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19세기적 의미에서의 전형적인 식민지로서 마지막으로 식민화된 나라가 한국입니다. 1차대전 이후에는 19세기적 의미에서 영토의 점령을 동반한 식민지는 더 이상 획득할 수 없게 됐기 때문입니다. 1차대전 이후의 세계는 어떤 의미에서 '윌슨·루스벨트적 미국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새로운 세계였습니다. 윌슨·루스벨트 노선이 관철되는 새로운 세계체제를 만들 때 그 하위 시스템으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 레닌주의적 사회주의 체제였습니다. 이런 체제가 89년까지 유지됐습니다. 이런 세계체제 아래에서 한국은 열전과 냉전으로 고통을 받았고, 일본 사회도 오랜 냉전으로 굉장히 왜곡된 측면을 갖게 되었습니다.
니시카와 나가오 나가오 = '병합'이라는 용어에 대해 잠깐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일본에선 '한국병합'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말입니다. 지금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북한은 들어 있지 않지 않은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일본 잡지 '세카이(世界)' 2010년 1월호가 특집을 마련해서 여러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만, 가장 먼저 제기된 것이 용어의 문제입니다. 병합이라는 말은 조약을 체결할 당시에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합병'이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A와 B가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한국을 철저히 종속적인 지위에 두지만 동시에 합병의 느낌을 주기 위해서 병합이라는 말이 고안됐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게 좋은지 고민이 됩니다. 한국에서도 '한국병합'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지요?
윤해동 = 한국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선 병합과 합병이 거의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합방'이라는 용어도 간혹 사용되지만, 합방이라는 용어가 일본의 아시아주의자들이 사용했던 기만적인 용어라는 것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입니다. 한국 역사학계에서 다수는 '강점'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저는 강점이라는 용어가 한국 민족주의의 정서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보지만 적당한 용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강점은 강제적·강압적 점령이라는 의미일 텐데 식민지라는 것은 점령 이상의 아주 포괄적인 지배를 의미하므로 이를 담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중립적이고 서술적인 차원에 국한해서 병합이란 용어를 쓰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니시카와 "식민지 지배자의 비문명화·야만화는 역사의 아이러니"
니시카와 나가오 = 한국이 식민지 시대를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 궁금해 일본에 번역돼 있는 한국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살펴봤습니다. 그대로 소개하자면 "1910년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의해 우리 민족은 국권을 침탈당하고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된다. 조선 총독부의 가혹한 무단통치하에서 토지와 자원을 수탈당했고, 이에 대해 우리 민족은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고, 그후 중국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들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독립군을 조직해서 무장독립전쟁을 펼쳤다. 국내에서도 식민지 지배에 대항해 민족의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한 운동이 계속됐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런 서술에서는 식민지 시대와 그 후에 겪은 사람들의 고통, 그리고 식민지가 어떠한 것인가가 사라져 버립니다. 민족독립운동을 했고 그것이 훌륭하다라는 얘기가 되고 마는 것이죠. 일본에서 전개되는 논의도 예상이 됩니다. 기본적으로는 식민지 책임과 제국 책임을 비판하는 경향이 있고, 다른 한편에선 식민지는 좋은 것이었다라면서 식민지 근대화를 강조합니다. 저에게 중요한 문제는 그것과는 좀 다릅니다. 식민지 책임을 묻는 것은 중요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문제제기 방식은 더욱 중요한 것을 놓치게 합니다. 세카이 잡지를 읽어봐도 그렇지만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사람일수록 정말로 중요한 문제인 '식민지란 무엇이었는가'를 놓치고 있는 것 아닌가 합니다. 이런 측면을 저에게 느끼게 해주는 것이 프랑스령 마르티니크의 시인이자 정치가인 에메 세제르가 쓴 <식민주의론>이라는 책입니다. 식민지 혹은 식민주의 문제의 본질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고 종주국과 식민지의 상호작용입니다. 문명화한다는 구실로 식민지를 지배하는데 그것이 오히려 자기 자신, 식민종주국에 비문명화·야만화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세제르는 또한 식민지화된 사람들이 얼마나 비참해지고 타락해 가는가의 문제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아직 식민주의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글로벌화 혹은 경제위기와 같은 오늘날의 문제들에 식민주의 문제의 본질이 담겨 있습니다.
윤해동 =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책임 이상의 근본적인 문제를 묻고 계신데 자칫하면 오해를 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보기엔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지적을 해주셨습니다. 저 역시 식민지 인식에 '회색지대'가 존재한다고 지적한 적이 있는데, 바로 그런 측면을 염두에 둔 것이었습니다. 일국사적 역사 이해 혹은 민족주의적 역사 이해에서는 민족이 주체가 되는 역사를 구성해야 하기 때문에 식민지 경험은 굉장히 곤혹스러운 기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민족이 주체가 되면서 식민지 시기를 서술하는 유일한 방법은 저항운동을 내세우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서술에서는 말하자면 식민지 경험 자체가 사라지게 됩니다. 저항운동만 내세우게 되니까요. 신식민주의론에서 가장 강조되는 측면이 지배자 측의 비문명화랄까, 지배자 측의 왜곡 혹은 인간성 타락과 같은 현상입니다. 예를 들어 조지 오웰이라는 소설가가 버마에서 영국 경찰로 근무할 때의 경험을 <코끼리를 쏘다>란 책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영국 경찰이 버마인에게는 정말로 중요한 재산인 코끼리를 아무 이유 없이 쏴 죽이는 것을 보고 오웰은 지배자인 영국인들의 인간성 타락이 이렇게 심각하게 진행이 되고 있구나라고 느끼게 되고 경찰을 그만둡니다. 일본의 전후 역시 식민지 망각, 식민지 방기라는 측면에서 아주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니시카와 나가오 = 근대교육을 받고 이 세계에서 살고 있는 저희 같은 사람들은 모두 자기 안에 식민주의적인 문제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언어, 개념 혹은 감각 같은 것입니다. 평소에는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식민주의적 상황 아래에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학술회의 같은 곳에서 국제적인 문제 혹은 국가의 문제를 논의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는 그들을 구제하기 어려운 존재로 여깁니다.

윤해동 "친일파 청산 마찰 등 식민주의 내면화 '한류'서 변화 희망 봐"
윤해동 = 선생님은 <신식민지주의론> 한국어판 서문에서 '내면화된 식민주의'를 해명하는 길은 굉장히 어둡고 위험한 길이다, 그래서 우울하다라고까지 썼습니다. 한국에선 친일·협력자의 인적청산 문제를 둘러싸고 대단히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이 문제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더 중요한 문제를 빠뜨리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은 역시 내면화된 식민지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다른 차원이지만, 저는 한류(韓流)의 확산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한류로 대표되는 동아시아지역의 급속한 문화교류 현상은 상대적으로 바람직한 한·일관계나 동아시아의 미래를 조금 비춰주고 있는 것 아닌가 합니다.
니시카와 나가오 = 우선 생각해볼 것은 욘사마를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과연 누군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본 바로는 예전에 고이즈미 총리를 따라다녔던 할머니들이 이번에는 욘사마를 따라다니는 것 같습니다. 물론 한류가 가져온 좋은 결과도 있지만, 감각적인 차원에서 한류가 일종의 식민주의에 연결돼 있는 것 같다는 걱정도 있습니다. 예전에 일본인들이 한국에 가서 기생을 사는 것이 굉장히 문제가 된 시기가 있습니다. 이것의 다른 형태로 일본의 아줌마·할머니들이 욘사마를 따라다닌다는 것입니다. 한국인을 차별하고 나쁘게 보면서도 욘사마를 보면서 안심하고 찬미하는 그런 정신적 태도가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낍니다. 다만 제가 봐도 요즘 한국 영화나 드라마가 일본에 굉장히 많이 유포되고 있습니다. 역설적인 상황이지만 그로 인해 한국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고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지는 측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류에는 굉장히 복잡한 문제들이 연결돼 있다고 봅니다.
윤해동 = 저는 문화교류에 수반되는 상업주의적, 신식민주의적 위험은 어느 정도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현재 동아시아의 경제적 상호의존은 아주 급속하게 심화되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동아시아 공동체에 대한 논의는 심심찮게 제출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찍이 주창을 한 적이 있고요, 최근엔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일본 총리가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를 강력하게 추동하고 있습니다. 정치적·경제적인 교류의 확산과 상호의존의 심화가 바람직한 동아시아 문화공동체로 나아가 공동체로 이어지기 위해선 특히 어떤 점에 주의해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니시카와 나가오 = 다양한 레벨이 존재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적인 문제, 경제적인 문제도 포함될 것입니다. 차별을 벗어나서 평등하게 서로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지만 일본의 현상이나, 하토야마 총리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저는 민주당을 계속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정권을 잡은 뒤에 자민당보다 더 나쁜 일을 하지 않을까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헌법개정 혹은 징병제 도입 같은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적인 사상과 경험을 가진 다수의 사람이 민주당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들이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다른 노선을 취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입니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흥미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만, 결론적으로 저는 하토야마 총리의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라는 것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습니다.

윤해동 "동아시아 통합, 국가에만 맡기면 대단히 위험"
윤해동 "한반도 휴전선은 민족의 통합 넘어 동아시아 통합 장애물"
윤해동 = 동감입니다. 동아시아 통합의 문제를 국가에 전적으로 맡겨두는 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20세기 후반, 다시 말해 냉전시기 동아시아는 '대분단 체제'였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휴전선과 중국·대만 사이의 해협이 글로벌화에 있어서 장벽의 역할을 수행해왔습니다. 동아시아 통합의 과정에서도 이것은 큰 장벽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의 휴전선은 단순하게 민족통합의 장애물이 아니라 동아시아 통합에 있어 아주 결정적인 장애물이 될 것입니다. 또한 중국의 해안지역이 매우 급속하게 산업화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는 중국 내륙의 어느 선을 경계로 큰 장벽이 만들어지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국가 주도의 동아시아 통합이 신식민주의적 통합이 될 가능성이 높고 이에 대해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건강한 시민사회가 없으면 건강한 통합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아시아지역 시민사회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니시카와 나가오 = 제가 주목하는 것은 유럽연합(EU)입니다. 유럽연합은 결함도 있지만 굉장한 실험입니다. 내부의 주민들이 자유롭게 이동해서 취직하고, 국적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살고 결혼하면서, 현실적으로는 국민국가가 붕괴되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제국이 될 위험성도 안고 있습니다. 유럽연합의 이념과 관련하여 이론적으로 주목해야 할 사상가는 프루동입니다. 프루동 사상의 핵심은 연합주의입니다. 국가를 산업조합이나 다양한 시민사회적 네트워크가 대체하는 것이지요. 유럽연합을 보면 이것이 어느 정도 실현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경계가 없는 공동체를 동아시아에서 형성한다는 게 어떤 것일까요? 정주자가 아닌 이민, 난민이 중심이 되는 시민사회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경계를 갖고 유지되는 게 아니라 변화하는 공동체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순간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사상가 모리스 블랑쇼나 이탈리아 사회학자 메르치가 언급한 바 있는데, '순간의 공동체'란 문제가 생기면 모이지만 그 문제가 해결되면 흩어지고 다시 모이는 부정형의 공동체입니다.
윤해동 = 마지막으로 지구사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논의를 진행해보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다양한 패러독스와 양의성에 직면해 있습니다. 최근 덴마크에서 기후변화에 관한 정상회의가 열렸는데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했습니다. 가장 큰 장애는 역시 미국이었습니다. 지난 4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핵을 영구적으로 폐기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발언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런데 노벨상을 수상하면서 '정의의 전쟁'을 역설했습니다. 정의의 전쟁이 과연 가능할까요. 오바마의 연설을 들으면서 저는 지구의 미래가 아주 암담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니시카와 "정의의 전쟁 외친 미국 오바마 보면서 놀라고 실망스러워"
니시카와 나가오 = 오바마가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만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라는 일본의 옛 총리도 이 상을 받았습니다. 사토는 지금 일본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핵 밀약', 다시 말해 미국이 일본에 핵을 들여오는 것을 용인한 당사자입니다. 그런 사람도 받은 상이므로 어찌 보면 별것 아닙니다. 오바마의 노벨상 수상연설은 대통령 취임 연설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오바마는 취임연설에서 미국의 건국자들을 거명하면서 '그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 이상을 계승해야 한다'라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저는 그런 연설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오바마는 미국이 여태껏 해온 전쟁을 모두 인정하고 긍정했습니다. 그 연장선에서 정의의 전쟁은 있다는 얘기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들으면서 화가 났습니다. 미국의 건국자들이야말로 선주민인 인디언을 폭력적으로 쫓아내고 나라를 세운 장본인 아닙니까.
윤해동 = 선생님 생각에 동의합니다.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으로서 핵을 폐기하겠다라는 발언을 했으니 책임을 지도록 추궁해 나가는 것이 우리 책임일 것입니다. 글로벌화의 전면적 진행과 아울러 지구사회는 지금 미증유의 사회적 전환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글로벌화가 초래하는 신식민주의의 부정적 결과, 곧 승자독식의 극단적 양극화와 사회해체 등의 현상에 어떻게 대응해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병합 100주년을 맞이하는 2010년에는 더욱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니시카와 나가오(西川長夫) 리쓰메이칸(立命館)대학 명예교수(76)는 1934년 식민지 조선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났다.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조선과 만주에서 11년 동안 살다가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교토대학 문학부 및 대학원에서 비교문학·비교문화론으로 박사과정을 마친 그는 프랑스와 캐나다 등에서 연구 및 강의를 했다. 1990년대 이후 '국가는 자아를 억압하는 장치'에 불과하다는 '국민국가론'과 '세계화는 제2의 식민주의'라는 내용의 '신식민지주의론'을 펼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윤해동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51)는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일제의 면(面)제 실시와 촌락재편정책'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역사문제연구소 사무국장과 연구위원, 일본 와세다 대학교 외국인 연구원 등을 지냈다. 현재 교토의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에서 외국인 연구원으로 있다. 한국 근대 민족운동과 촌락사회의 성격변화 등을 통한 현대사회의 구조적 형성과정을 추적하는 데서 출발해 식민지 근대성 비판, 탈식민지주의, 동아시아 공동체의 가능성 등으로 연구영역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다.

<2010.1.4>

<대담자의 저서들과 대담에 인용된 책들>

-니시카와 선생의 책은 모두 4권이 번역돼 있다. 아래 두권은 지난해에 번역됐는데 그중 한권이 윤해동 선생의 공역이다.

국민이라는 괴물 - 10점
니시카와 나가오 지음, 윤대석 옮김/소명출판
국경을 넘는 방법 - 10점
니시카와 나가오 지음, 한경구.이목 옮김/일조각
新식민지주의론 - 10점
니시카와 나가오 지음, 박미정 옮김/일조각
국민을 그만두는 방법 - 10점
니시카와 나가오 지음, 윤해동 외 옮김/역사비평사

-윤해동 선생은 여러권의 공저가 여러권이고, 검색되는 단독저서는 두권인데 그중 한권이 박사논문을 손본 것이다.

지배와 자치 - 10점
윤해동 지음/역사비평사
식민지의 회색지대 - 10점
윤해동 지음/역사비평사

-대담에 인용된 책들
식민주의에 관한 담론 - 10점
에이메 세제르 지음, 이석호 옮김/도서출판 동인
코끼리를 쏘다 - 10점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실천문학사
Posted by 까만주름
시간에 쫓기다보니 지면에 실렸던 글을 블로그로 퍼올리는 것조차 제때 하기가 쉽지 않다. 지난주에 읽었던 이 책은 '공간'을 키워드로 했는데 영어로 보자면 'place'를 말한다. 한줄로 요약하자면 '당신이 어느 곳에서 태어났는가가 당신의 사회적, 경제적 삶의 질을 결정한다' 정도 될 터이다. 이럴 경우 place를 공간이라고 번역하기 보다는 장소라고 하는데 이해하기 빠를듯 하다.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이라는 제목에 빗대 이 책을 비판하는 <부자아빠의 몰락>이라는 제목의 책이 나왔는데 이 책은 다분히 <세계는 평평하다>란 책을 의식하고 씌여졌다. 이 책에서 주목되는 것은 저자가 사용한 접근법이다. 물론 중심부-주변부의 접근법은 저자가 독창적으로 퍼올린 방법론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도식적으로 적용될 경우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용산참사 사건 당시 누군가가 외쳤던, 그리고 책으로 나오기도 했던 '저기 사람이 있다'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데 유용한 도구라고 본다. 언제나 세상엔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이니까.

공간의 힘 - 10점
하름 데 블레이 지음, 황근하 옮김/천지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세계화로 인해 세계가 평평해졌다"고 말했지만 이것은 유럽, 북미, 동아시아, 호주 등 '중심부'에만 적용되는 얘기다. 하름 데 블레이는 "지구는 문화적으로는 물론이고 물리적으로도 아직 울퉁불퉁한 땅"이라면서 "주변부에는 세계인구의 85%가 살지만 세계 총소득의 25%만 돌아간다"고 말한다. 지도상의 검은 점은 미국·멕시코의 국경, 중국과 대만 사이의 해협, 이스라엘의 분리장벽 등 중심부와 주변부를 가르는 주요 경계지점들이다.
토머스 프리드먼은 세계화에 의해 수십억 인구와 기업들이 장소와 언어·문화에 상관없이 동시에 경쟁하는 시대가 열렸다는 내용의 <세계는 평평하다>를 쓰면서 자신의 '발견'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에 대비시키는 대담함을 보였다. 그는 미국 정보통신 산업의 중요한 아웃소싱 대상으로 떠오른 인도를 다녀온 뒤 아내에게 "여보, 내 생각에는 말이야. 지구는 평평해"라고 속삭이면서 마음 속으로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경향'이라는 자신감 넘치는 수식어를 생각해 내고 있었다.
중동문제 전문가이기도 한 칼럼니스트 프리드먼은 자신이 평평하다고 명명한 세계가 결코 평평하지 않다는 반론이 제기될 것을 예상했다. 그는 "세계는 평평하지 않다. 나도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 관심을 높이기 위해 저자의 권한으로 그런 제목을 만들어본 것뿐이다"라며 도망갈 구멍을 남기는 영악함을 보였다.
물컵을 보면서 '물이 반밖에 차 있지 않다'고 말하거나 '물이 반이나 차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계적인 칼럼니스트가 뽐내면서 내놓은 '평평한 세계'라는 키워드는 울퉁불퉁한 현실의 세계를 가려버림으로써 세계인의 인식을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갈 위험성을 안고 있다.
미시간 주립대 지리학과 교수인 하름 데 블레이가 <공간의 힘>(원제 The POWER of Place)의 서문을 "두바이 힐튼 호텔의 전망 좋은 방에서, 혹은 싱가포르 항공의 비즈니스 클래스 창가 좌석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실제로 평평해 보인다"는 말로 장식한 것은 일부 사람들에게 세계는 실제로 평평해지고 있다고 인정하는 동시에 프리드먼의 외눈박이 시각이 내포한 해악을 지적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블레이는 우선 지구에 살고 있는 70억 인구를 세계인·지역인·이동인으로 분류했다. 세계인은 중심부에서도 상위층에 위치한 운 좋은 사람들을, 지역인은 가장 가난하고 이동성이 적으며 울퉁불퉁한 공간의 영향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말한다. 이동인은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이동해 하위층에 자리잡는 이주민들이다. 공간적으로는 유럽에서 북아메리카를 지나 동아시아와 호주에 이르는 세계화가 이뤄진 지역을 평평한 중심부로, 그 밖의 지역을 주변부로 나눴다.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엔 완고한 장벽이 존재한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남아공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던 저자는 이 장벽을 남아공 백인 정권이 펼친 악명 높은 흑백분리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비유했다. 이 장벽이 자연적인 경계가 아니라 기득권 세력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배제하고 억압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세운 것이란 뉘앙스를 담고 있다. 이런 접근 방식은 세계를 중심부·반주변부·주변부로 나누어 정치경제학적으로 분석한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적 방법론을 연상시킨다.
저자는 지리학자답게 각 장마다 언어, 종교, 질병, 재난, 분쟁, 출생률·평균수명, 도시화율, 여성의 정치참여 비율 등을 담은 세계지도들을 동원했다. 이런 시각적 자료들은 지구촌의 현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해준다. 블레이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티야 센이 제기한 "아이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장소에 따라 커다란 번영의 수단과 기반을 갖게 될 수도 있고, 절망적인 결핍의 삶에 직면할 수 있다"는 명제다.
그렇다고 블레이를 반세계화론자로 단정지을 수는 없어 보인다. 그는 현대로 올수록 절대빈곤은 감소하고 있으며, 다양한 이동수단 및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도입은 문화적 선택권을 넓히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세계화의 중심점과 주변부들은 현대화와 통합의 네트워크를 구축해나가고 있지만, 그에 따라 장벽이 더 높아지고 공간의 영향력이 더욱 강화되는 세계화의 모순을 직시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저자의 분류에 따르면 한국은 '평평한 중심부' 내부의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다. 프리드먼의 주문은 평평한 세계의 끝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미국식 세계화에 동참하라는 것이지만, 블레이는 반대로 시각을 평평하지 않은 외부로 돌려 지구를 더 평평한 세계로 만드는 데 동참하라고 주문한다. 그렇다. 문제는 '어떤 세계화이냐'인 것이다. <2009.11.7>

Posted by 까만주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