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새삼스럽게 생긴 취미가 명작동화 감상하기다. 어렸을 적 읽었던 것도 있고, 줄거리만 알았지 정독하지 않았던 것들도 있는데, 다시 봐도 흥미진진하고 자꾸만 책장을 넘기게 만든다.
지난주말 나들이를 가면서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집어들었다. 긴 설명이 필요없는 작품이다.
그간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이 이야기의 줄거리에는 80일간의 세계 일주라는 무모한 내기를 의연하게 해내는 댄디한 성격의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Phileas Fogg)와 그를 은행강도로 오해해 뒤쫓으며 방해를 일삼는 픽스(Fix) 형사가 주요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새롭게 읽으면서 포그의 하인으로 채용된 첫날 엉겁결에 세계 여행을 따라나서게 된 장 파스파르투(Jean Passepartout)라는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요새 드라마나 영화와 관련해 '신 스틸러(scene stealer)'라는 말이 많이 회자된다. 언론에서 그리 쉽지도 않은 영어 단어를 그대로 가져다 쓰는게 마음에는 들지 않는데, 여하튼 훌륭한 연기와 독특한 개성으로 주연 못지 않게 주목을 받는 조연을 신 스틸러라고 한단다.
파스파르투는 전형적인 신 스틸러에 해당할 것이다. 그는 냉철하고 침착하며 사소한 호기심 따위는 전혀 없는 주인 포그에 비하면 성격상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술 좋아하고 떠벌리기 좋아하며 다혈질인데다 호기심이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80일간의 세계 일주]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에피소드들은 파스파르투에서 촉발된다. 파스파르투가 촉발시킨 사건들은 한시도 지체할 수 없는 포그의 여정을 방해하지만 그럴수록 독자들을 조마조마하게 만들고, 시간이 아무리 남아돌아도 관광 따위는 전혀 안중에도 없이 객실에 남아 카드놀이나 하는 포그와 달리 파스파르투는 주요 도시에 갈 때마다 관광을 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세계여행의 즐거움도 안겨준다. 그러고보면 [돈키호테]에서 망상에 휩싸여 좌충우돌하는 돈키호테라는 주인공과 현실적인 하인 산초의 성격이 대비되는 것과도 겹친다.
여하튼 어렸을 적 봤을 땐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가 그리도 대담하고 멋있게 보이더니, 지금은 포그는 지독히도 멋대가리 없는 인물인 반면 파스파르투가 참 정이 가는 인물로 느껴진다.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 일주] 초판본에 실린 장 파스파르투 삽화. Alphonse de Neuville & Leon Benett의 작품이다. 파스파라투는 만능열쇠라는 뜻이다.)
작품 전체에서 파스파르투의 활약은 계속 이어지는데 거의 마지막에 파스파르투의 성격을 유쾌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미국 대륙횡단 열차에 탄 그는 모르몬교의 본거지인 솔트레이크 근처에서 모르몬교 선교사가 열차 안에서 개최한 집회에 참석한다. 모르몬교가 일부다처제를 기초로 하고 있다는 상식 밖에 없었던 그는 선교 집회에 참석해 다른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열심히 경청한다.
이제 객차에 남은 청중은 파스파르투밖에 없었다. 장로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로 그를 현혹시켰다. 그는 스미스가 살해된지 2년 뒤에 그의 후계자로 계시를 받은 예언자 브리검 영이 노보라벨을 떠나 솔트레이크 호숫가에 정착하러 왔다고 했다. 그리고 이주민들이 유타 주를 통과해 캘리포니아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이 비옥한 땅에서, 새로운 이주민 집단이 일부다처제의 원칙을 기반으로 크게 발전했다는 말도 했다.
윌리엄 힛치가 열심히 말했다.
"이게 바로 의회가 우리를 질투하는 이유라오! 연방 정부의 군대는 어째서 유타의 땅을 짓밟았을까! 우리의 지도자인 예언자 브리검 영이 어째서 정의와 상관없이 감옥에 갇혀야 했을까! 그런다고 우리가 힘에 굴복할 것 같소? 천말의 말씀! 버몬트에서 쫓겨나고, 일리노이에서 쫓겨나고, 오하이오에서 쫓겨나고, 미주리에서 쫓겨나고, 또 유타에서 쫓겨났지만, 우린 독립된 영토를 반드시 찾아내어 그곳에서 우리의 장막을 세울 거요……. 그런데 당신……."
장로가 하나뿐인 청중인 파스파르투에게 성난 눈길을 고정시킨 채 물었다.
"당신도 우리의 깃발 아래로 들어오겠소?"
"천만의 말씀!"
파스파르투는 용감하게 대답한 뒤, 그 광신적인 설교자를 사막 가운데 내버려 둔 채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293~294쪽)
파스파르투는 신념을 가진 독신주의자였다. 그래서 한 남자의 행복을 위해 여럿이 짐을 감당해야 하는 여자 모르몬 교도들을 바라보면서 일종의 두려움 같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오히려 남편들이 측은하게 생각되었다. 기쁨이 가득한 낙원에서 명예로운 자랑거리가 되어 있을 영광스러운 스미스와 함께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그 많은 아내들을 이끌고 삶의 굴곡을 지나는 내내 그녀들을 천국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져야 한다는 게 끔찍하게만 여겨졌다. 결정적으로 파스파르투는 그런 사명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아마도 착각이겠지만, 그는 솔트레이크 시티의 여자들이 자기에게 약간 심상치 않은 눈길을 보낸다고 생각했다. (298~299쪽)
기적 소리가 들렸고 기관차의 바퀴가 레일 위를 미끄러지면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멈춰요! 멈춰!"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움직이기 시작한 기차는 서지 않는다. 그렇게 소리를 지른 신사는 출발 시간에 늦은 모르몬 교도였다. 그는 숨이 차게 달렸다. 다행히 역에는 문도 울타리도 없었다. 그는 선로로 훌쩍 뛰어들어 맨 끝 객차의 발판으로 뛰어올랐고, 마침내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객차의 의자 위에 털썩 앉았다.
이 묘기 같은 행동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파스파르투는 이 지각생을 흥미롭게 찬찬히 살펴보았다. 파스파르투는 이 유타 주의 시민이 부부 싸움 끝에 도망쳐 온 것임을 알고 그에게 큰 호기심을 느꼈다.
모르몬 교도가 한숨을 돌리고 나자, 파스파르투는 그에게 아내가 몇 명이냐고 정중하게 물어보았다. 그렇게 도망친 것을 보면 적어도 스무 명쯤 될 거라고 추측했던 것이다.
그가 두 팔을 하늘로 쳐들면서 대답했다.
"하납니다, 하나! 하나도 지긋지긋해요!" (299~300쪽)
80일간의 세계 일주 - 쥘 베른 지음, 김주경 옮김, 레옹 베넷 외 그림/시공주니어 |
'2014_2019 > 밑줄긋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애프터 다크](무라카미 하루키) (0) | 2015.09.07 |
---|---|
[세상물정의 사회학]물정에 밝은 사회학자의 인생 사용 설명서? (0) | 2015.04.24 |
마음의 진화와 문화의 진화에 관하여(스티븐 핑커) (0) | 2015.03.17 |
[MD본색: 은밀하게 위험하게](정욱식/서해문집) (0) | 2015.03.16 |
행복한 왕자(오스카 와일드 지음/소민영 옮김) (0) | 2015.0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