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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인터넷에 블로그 계정을 하나 텄다. 블로그를 ‘만들었다’가 아니라 ‘계정을 텄다’인 것은 일단 공간을 확보했을 뿐 아직 ‘공사 중’이란 뜻이다. 블로그 개설이 처음은 아니다. 몇년 전 기자들에게도 블로그 바람이 불었는데 이때 만들어 제법 진지하게 글을 몇개 써서 올렸지만 얼마 안가 그만 뒀다. 게으름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조각 글이라도 메모를 해놓고 나중에 찾아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더 큰 이유는 출판계 사람들을 만날 때 파워 블로거나 블로그 세계의 현안을 모르면 머쓱해지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잦아졌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상대방이 “로쟈가 뭐뭐라고 썼던데…”라고 말을 시작하는데 내가 “예? 무슨 ‘쟈’라고요?”라고 되묻고, 상대방이 한심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상황을 말한다. 그 순간 ‘나이도 젊은데, 더구나 기자라는 사람이…’라는 상대방의 속말이 들리는 것 같다. 그래서 나의 블로그 개설엔 어떤 압박감 같은 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나와 비슷한 ‘블로그맹(盲)’들을 위해 잠깐 설명드리자면 여기서 ‘로쟈’란 인문서적에 대해 가공할 정도로 넓고 깊게 서평을 올리는 ‘로쟈의 저공비행’이란 블로그의 주인장을 말한다. 그가 블로그에 올린 글을 엮은 단행본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도 최근에 나왔다. 블로그와 책의 합성어인 ‘블룩(blook)’인 셈이다.

사회·문화변화에 대해 신조어 72개를 소개하고 비판적 논평을 곁들인 ‘미래시민개념사전’(21세기북스)이라는 번역서를 보면 ‘라이프 캐싱(life-caching)’이란 단어가 나온다. 휴대용 전자기기와 전자적 저장장치가 흔해지고 어디서나 온라인으로 자료를 저장하는 게 흔해지면서 사람들이 공적인 자료든 사적인 신변잡기이든 디지털 형태로 축적하는 데 열중하는 현상을 말한다. 틈만 나면 블로그에 글과 사진을 올리고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이른바 ‘블록질’을 연상하면 되겠다.

새로운 필자와 콘텐츠에 항상 목말라하는 출판계 입장에서는 이런 라이프 캐싱 풍조가 반가웠을 것이다. 출판사들이 블로그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2~3년 전이다. 실용서가 주종을 이루지만 앞서 언급한 블룩, 즉 블로그를 발굴해 나온 책들의 목록이 꽤 길다. 요즘엔 영역이 넓어지면서 글쓰기에 재주가 있는 전문직 또는 전업작가들의 글이 블로그에 어느 정도 고이면 책으로 묶어내거나 아예 출판계약을 맺고 블로그에 연재하는 경향도 있다. 블로거들의 서평이 베스트셀러 진입 여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출판사마다 블로거 마케팅에도 무척이나 신경을 쓴다. 책의 성격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신간이 블로거들에게 ‘씹히면’ 큰 타격을 예상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블로그와 집단으로서 블로거들의 파워는 점점 더 커져만 간다. 그럴수록 블로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던 나 같은 사람이 느끼는 압박감도 커진다. ‘미래시민개념사전’ 방식으로 이름을 붙이자면 ‘디지털 지체 공포증’ 정도 되지 않을까. <2009. 6.27>
Posted by 까만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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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책에 관한 나의 최초의 강렬한 기억은 아버지가 초등학교 졸업기념으로 사주신 40권짜리 <동서양 전래동화 전집>이다. 외딴 산간마을을 찾아온 책 외판원을 통해 구입한 이 전집은 한 권에 200쪽이 넘었는데, 방학 동안 모두 읽어버렸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책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 별로 없다.

넉넉지 않은 형편이라 새로 전집을 선물받는 일도 없었고 학급문고에 꽂힌 책들은 대부분 허접했다. 사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학교 시험 준비에 허덕이다 보면 남는 시간은 놀기에도 빠듯했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동서양 고전은 참고서가 ‘친절하게’ 요약해준 줄거리를 밑줄 치며 외웠다. 허다한 고전들은 이처럼 시험 성적을 올리기 위한 ‘학습’을 통해 앙상한 기억들만 남겼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작품을 뜻하는 고전. 하지만 시대배경이 다르고 현재 우리가 쓰는 문자나 문체와 달라 딱딱하게 느껴지는 고전을 직접 읽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누구나 제목은 알지만 누구도 읽지 않는 게 고전’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은가.

특히나 어린이·청소년에게 고전은 우주 저 멀리에 있다는 안드로메다만큼이나 멀게만 느껴진다. 이런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 그간 손쉽게 시도됐던 방식이 원본을 짜깁기 혹은 변형하거나 만화로 풀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동서양의 고전들을 원전에 가까우면서도 우리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읽기 쉽도록 재해석하는 시도들이 몇몇 출판사에서 이어졌고 결실을 맺고 있다. ‘창비’는 2003년 <토끼전>을 처음 펴낸 이래 지난해 말 20권째인 <최척전>을 마지막으로 ‘재미있다! 우리 고전’ 시리즈를 완간했다. 이 시리즈는 아이들에게 우리의 옛이야기를 원문 그대로 읽히고 싶어하는 부모와 선생님들에게 어필했고 성공을 거뒀다. 올해 초 시리즈 가운데 4권의 판권이 일본에 수출되기도 했다.

‘알마’에서도 2006년부터 ‘샘깊은 오늘고전’이란 타이틀 아래 한문으로 쓰인 우리 고전들을 한글로 다듬어 펴내고 있다. 픽션과 논픽션의 구분을 두지 않은 이 시리즈 역시 조각나고 찢긴 채 읽히고 있는 우리 고전의 원래 이야기를 그대로 살려내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시리즈 목록을 보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들을 발굴하는 것에도 신경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이번주에 나온 <표해록>은 성종·연산군 시대의 문신관료인 최부가 바다를 표류하다 중국 남부지방에 도착, 베이징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아이세움’ 역시 2006년부터 ‘나의 고전 읽기’라는 독특한 시리즈를 시작했다. 전문 연구자들이 <자산어보> <삼국유사> <사회계약론> <법구경> <공산주의 선언> 등 동서양 논픽션 고전의 원문을 발췌해 독창적인 시각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 나온 14권째 책인 <미래를 창조하는 나>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소재다. 원문을 잘근잘근 씹어 소화하기 좋게 펼쳐 놓았다는 느낌을 준다.

‘명불허전’이라더니 이런 책들을 보면 ‘역시 고전(古典)은 고전(高典)’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의 솔기마다 생각의 샘들이 놓여 있다. 전래동화 전집이 유소년 시절 독서기억의 전부인 나로선 요즘 아이들이 부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말인데 요즘 유행하는 말로 아이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행복한 줄 알아. 이것들아!”  <2009. 6.12>
Posted by 까만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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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그의 죽음을 해석하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우리가 추모의 염을 담아 그의 죽음을 ‘서거’로 부르는 데 대해 “파렴치범에게 웬 존경”이라느니 “자살로 불러야 한다”느니 하는 저급한 딴죽이 들려오는 것도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정치의 세계에선 하나의 색깔이 누구에겐 검게, 다른 누구에겐 희게 보이는 게 일상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워낙 충격적인 방식으로 이뤄진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둘러싼 해석쟁투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검은 것을 희게 보는 사람이나, 흰 것을 검게 보는 사람이나 노 전 대통령에 대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팩트’는 뭘까. 노 전 대통령이 꽤나 책읽기를 좋아한 독서가였다는 게 그중 하나일 것이다. 그는 유서에서 자신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음’을 들었다.

책읽기가 힘들어지기 전 그는 제러미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을 읽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했다. 그가 정독한 마지막 책으로 보인다. 세계화 시대에 지속가능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철학적, 실천적 방편을 탐구한 이 책은 분량이 550쪽이나 되는 데다 건조한 문체여서 읽기가 쉽지 않다. 노 전 대통령도 “내용은 최고인데 정말 읽기 힘들다”고 투덜댔지만 꾸역꾸역 읽어냈다고 한다.

그에게 책읽기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생전에 읽고 추천한 책이 하나둘씩 회자되면서 인터넷에 리스트가 올라왔다. 노 전 대통령이 재임 중 공적인 자리에서 언급하거나 추천했다는 책들의 목록을 보면 한국 사회의 문제점과 미래 비전을 강구한 책, 조직과 리더십·혁신과 변화에 관한 책, 역사서 등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에게 책읽기는 단순히 지식을 넓히거나 시간을 때우기 위한 활동이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하고 자신의 논리를 뒷받침할 거리를 마련하기 위한 매우 실천적인 행위였음을 보여준다. 요즘 유행하는 ‘독서경영’에 빗댄다면 ‘독서정치’라 할 수 있다.

일찍이 그의 책읽기 행위를 비판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2006년 8월 경향신문에는 ‘책에 빠진 노 대통령 독서정치’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그의 독서 편식과 무비판적 해석 경향을 우려한 기사였다. 이 기사에서 언급했듯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배기찬의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 대연정론(강원택의 <한국의 정치 개혁과 민주주의>) 등 노 전 대통령이 재임 중 제시하고 추진한 굵직한 정책과 담론의 배경엔 항상 특정 책이 등장했다. 책을 보고 감명받아 저자를 등용한 사례도 꽤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은 독서 못지않게 글쓰기를 좋아했다. 연설문을 직접 작성한 경우가 많았고, ‘편지정치’란 신조어를 만들어낼 정도로 지지자와 국민을 향해 수시로 글을 써서 인터넷에 띄웠다. 돌연한 그의 죽음으로 우리는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귀중한 자산을 하나 잃어버렸다. 회고록이 마무리되지 못한 것이다. 물론 회고록이 출간됐다면 한쪽에선 격찬을, 한쪽에선 비난을 쏟아냈을 것이다. 더구나 회고록이란 게 크든 작든 분식(粉飾)의 경향을 띤다. 하지만 5년 동안 대한민국의 중심에 서 있던 사람이 겪었던 일과 만났던 사람들, 그들과 나눈 대화를 그 자신의 글로 읽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 것은 역사의 손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라며 떠난 사람에게 “가시더라도 회고록은 마무리하고 가실 것을…”이라고 한탄한다면 너무 욕심어린 추모가 되는 것일까. <2009.5.31>
Posted by 까만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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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산티아고야?”

새로 나온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김희경/푸른숲)을 받아들고 떠오른 생각이었다. 올해 들어서만 산티아고 가는 길을 소재로 한 세번째 책이다. <비아델라플라타 : 산티아고 가는 다른 길>(김효선/바람구두), <산티아고 가는 길 : 카미노 데 산티아고>(최미선/넥서스BOOKS)가 먼저 나왔다. ‘산티아고’를 키워드로 검색해보니 지난해에 나온 것까지 헤아리면 번역서를 포함해 10권이 훌쩍 넘는다. 여행서 모으기가 취미인 동기에게 산티아고 여행서 좀 보자고 했더니 다음날 여섯권을 재까닥 가져왔다. 모두 지난 2년 이내에 나온 것들이다.

스페인 북서쪽에 있는 작은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예수의 12제자 가운데 한 명인 야곱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산티아고는 유럽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순례의 대상으로 자리잡았고, 여러 갈래의 순례길이 만들어졌다. 특히 프랑스의 소도시 생 장 피르포르에서 산티아고까지 가는 764㎞의 순례길이 유명한데, 걸어서 가자면 30일 남짓 걸린다.

산티아고 가는 길이 어떠하기에 많은 한국인이 고생스럽게 이곳을 걷고, 그 많은 책이 쏟아지는 것일까.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의 저자는 “독일인과 한국인을 빼면 카미노(길을 뜻하는 스페인어)의 순례자가 절반으로 줄어들 것 같다”고 썼을 정도다.

국내에서 산티아고 가는 길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이다. 인기작가 파울로 코엘류가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얻은 깨달음을 소재로 쓴 에세이 <순례자>가 2006년 국내에 소개됐고, 여행작가 김남희씨의 책도 비슷한 시기에 나오면서 관심을 확산시켰다. 제주도 올레길이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조성되기도 했다.

산티아고 가는 길이 각광받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세대론적으로 접근해 볼 수 있다. 산티아고 가는 길을 소재로 책을 쓴 사람들은 40세 언저리의 여성들이 많다. 386세대다. 이들은 교복자유화 세대, 해외여행자유화 세대다. 자유분방하고 자신만의 취향을 가진 이들이 기성세대가 되면서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됐고 색다른 여행, 감동적인 여행을 갈구했는데, 산티아고 가는 길이 소구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산티아고 가는 길이 힘들기는 하지만 히말라야 트레킹처럼 험난하지 않은 데다 안전이 담보돼 있다는 것도 여성들에게 인기를 끄는 점이다. 유럽과 외국인에 대한 동경심 역시 산티아고 가는 길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 산티아고 여행서는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걷고 싶은데 여건상 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대리만족을 준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해외여행이 자유화됐지만 배낭여행 한 번 가보지 못해 한이 맺혔던 사람들이 이처럼 색다른 여행서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산티아고 가는 길을 다룬 여행 에세이들은 공통점이 많다. 세세한 내용이야 다르지만 스페인 시골의 이국적인 풍광을 담은 사진들, 오랫동안 걸어야 하는 데서 오는 고통과 이를 극복하는 순간 느끼는 희열, 순례길에서 만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 그들과의 소소한 에피소드, 이국적인 음식들, 생경한 지명과 스페인어 몇 마디, 자신과 타인의 관계에 대한 성찰 등이 하나의 정형화된 틀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산티아고 가는 길을 소재로 한 책들이 나올 때마다 기시감이 더 깊어진다. <2009.5.15>
Posted by 까만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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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딸기21 2009.07.12 10: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솔직히 난 울나라 사람들이 그렇게 유럽에 몰두할 시간에 세계의 '다른쪽'에 조금만 더 시선을 돌리면 그 몇 배는 더 얻어건질(저급한 표현은 죄송...)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ㅎㅎㅎ
    파울로의 <연금술사>는 누가 뭐래든 재밌게 읽었고, 절대 평가절하하고 싶지는 않아요. 나에겐 또 나대로의 <연금술사>와 산티아고의 길에 대한 추억(?)이 있기 때문에. 하지만 제대로 연금술사의 길을 따라가려면, 스페인에서 머물지 말고 바다를 건너 사막을 걸어야 제대로 따르는 것 아닐까 싶어요. 탕헤르와 페스와 사하라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고 스페인에 머물면서 색다르고 이국적이고 개성있다고 주장하는 건 좀...

얼마 전 작가 한 명을 만났다. 자신의 작품이 어느 출판사의 중학교 1학년용 국어 교과서에 수록됐다며 싱글벙글이었다. 학교 교과서에 작품이 실리면 작품성이 검증된 작가라는 명예와 함께 인지도가 높아지므로 독자들의 관심도 올라갈 테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 ‘국민 작가’의 반열에 오른 거네요”라고 치켜세웠더니 “그건 아니고 일선 학교에서 얼마나 선택하느냐가 남았지요”라는 답이 돌아온다.

선택? 국어 교과서는 모든 학교가 다 똑같은 걸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그게 아니었다. 자녀가 미취학 아동이거나 학교에 다니더라도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부모들은 잘 모르겠지만, 현재 일선 학교에선 꽤 큰 변화가 진행 중이다. 교과서가 다양해지고 있는 것이다.

교과서는 크게 국정과 검정으로 분류된다. 국정 교과서는 국가가 저작권을 가지는 것으로 특정 과목이 국정체제일 경우 학교에선 국정 교과서만 써야 한다. 교육 내용의 통일성이 중요하다고 국가가 판단했거나 수요가 적은 일부 선택과목, 이를 테면 아랍어처럼 선택하는 학생이 적어 출판사가 꺼리는 과목은 국정으로 출판하고 있다. 검정 교과서는 일반 출판사가 법이 정한 기준에 맞게 제작해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의 검사를 받아 출판한다. 각 학교는 검정 교과서를 자유롭게 선택해 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검정 교과서가 많아진다는 것은 학생과 교사의 교과서 선택권이 넓어짐을 뜻한다.

지난달 23일 교과서 검정 업무를 담당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2009년 교과서 검정 본심사 결과를 발표했다. 중학교 1학년용 국어 교과서만 해도 34종이 접수돼 23종이 통과했다. 교학사·금성출판사·천재교육 등 전통적으로 교과서 시장에서 강세를 보이던 출판사가 여러 과목에서 이름을 올렸다. 대교·웅진씽크빅 등 대형 학습지 업체의 교과서도 여러 권 통과했다. 단행본 출판사로는 창비와 해냄(자회사인 해냄 에듀)의 국어 교과서가 통과했다. 이들은 수정·보완지시를 받은 부분을 고쳐 6월30일 교과부 장관으로부터 합격본으로 판정받아야만 5년간 해당 교과서를 낼 수 있다. 출판사들로선 초긴장 상태로 두 달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정부 수립 이래 국정체제를 고수한 국어·도덕·국사 과목이 처음으로 검정체제로 전환되는 것은 교육계로서는 하나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예전에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든, 산골 마을의 작은 분교를 다니든 국어·도덕·국사는 모든 학생들이 똑같은 교과서를 써야 했다. 획일적이라는 비판이 있었고 이 때문에 이번에 검정으로 바뀌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교과서를 쓰다 보니 국어 교과서에 실린 작품은 한 세대가 공유하는 추억으로 자리잡았던 측면도 있다. 필자의 경우 황순원의 <소나기>,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 피천득의 <인연>, 오영수의 <요람기> 등이 그랬다.

어릴 적 새 교과서를 받는 날이면 달력 뒷면으로 함께 교과서 표지를 싸던 누나에게 전화를 걸어봤다. 고교 1학년, 중학교 1학년 학생을 둔 엄마다. 심드렁한 답이 돌아왔다. “글쎄, 그러니? 한번 봐야겠네. 근데 요즘 교과서 가지고 공부하는 애들이 어딨니.” 순간 “사람들이 일본 역사 교과서 문제가 터졌을 때나, 우리 교과서에 조그만 문제라도 하나 발견되면 온통 난리를 치면서도 정작 우리 학생들이 쓰는 교과서 자체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는 교육과정평가원 관계자의 푸념이 떠올랐다. <2009.5.1>
Posted by 까만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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