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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숭배·유일신 잘못 해석, 예수의 ‘보편적 사랑’ 놓쳐
리영희 프리즘 - 10점
고병권.천정환.김동춘.이찬수.오길영.이대근.안수찬.은수미. 윤형.김현진 지음/사계절출판사

한국은 아시아 국가들 중 기독교도 비율이 높은 편에 속한다. 2005년 인구총조사에서 전체 인구 가운데 약 30%가 개신교(18%)나 가톨릭(11%) 교도로 조사돼 있다. 기독교를 한국보다 일찍 도입한 일본에서 같은 시기 기독교 인구 비율이 0.8%(개신교 0.45% + 가톨릭 0.35%)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의 높은 기독교 인구는 연구대상임에 분명하다.
<리영희 프리즘>의 필자로 지난 3일 밤 서울 마포의 아트앤스터디에서 열린 연속강연에 나온 이찬수 목사(종교문화연구원 원장·사진)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인들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후에 분단을 겪으면서 전통적인 것에는 더 이상 기대지 못하고 새로운 것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 새로운 것은 대체로 서양, 특히 미국 문명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종교인 기독교를 믿으면 미국처럼 부강해질 거라고 생각했지요.”
이 목사는 한국 기독교의 비극이 여기서 싹텄다고 했다.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미국의 보수적 근본주의 신앙이었다는 것이다. 불상 앞에서 허리 굽혀 절을 했다는 이유로 강남대 교수 재임용에 탈락한 뒤 복직투쟁과 종교대화 운동을 벌여온 이 목사는 일찍이 한국 기독교의 본질을 꿰뚫은 이로 리영희 선생을 꼽았다.

리영희는 스스로 종교인이 아니라고 했고, 때로 종교 혐오적인 발언도 했다. 이 목사는 “리영희가 비판한 종교의 90% 이상은 기독교였다”고 했다. 그는 리영희의 기독교 비판은 본말이 전도된 제도 종교에 대한 것이었지 종교성 자체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리영희의 사회비평서인 <스핑크스의 코>(2006)에 종교 관련 발언이 나온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부처의 자비의 가르침과 예수의 사랑의 계율을 정신생활의 지침으로 여기고 살아간다. … 일요일에 예배당이나 성당에 가서 신부나 목사의 설교를 듣는다든가 성경책과 찬송가책을 옆구리에 눈에 드러나게 끼고 다니면서 ‘예수 믿으시오!’를 외치는 식의 ‘종교’라면 그런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 나는 다만 나의 삶에서 성경을 읽고 불경을 읽으면서 석가모니와 예수의 삶을 따르고 싶어할 뿐이다.”(48쪽)
이 목사는 여기서 ‘무신론적이지만 가장 유신론적인’ 리영희 종교관을 읽는다. 이 목사가 리영희를 원용해 비판하는 한국 기독교의 가장 큰 폐해는 우상숭배와 유일신에 대한 오해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문자주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허리 굽혀 불상에 절 하는 것이 우상숭배가 아니라, 욕망과 마음을 굽히고 돈에 허리를 굽히는 행위가 사실상 우상숭배라는 사실에는 눈을 감습니다. 또한 유일신이라는 말은 ‘하느님이 모든 것 안에 계시다(無所不在)’라는 뜻인데, 그저 숫자 ‘하나’라고만 여깁니다. 이것은 초등학생 수준의 종교 이해입니다.”
유일신과 관련, 이 목사는 리영희의 군 시절 당시 회고를 인용했다. “최전방에서 축복기도를 하는데 결국 북쪽을 저주하는 식으로 기도하더랍니다. 신은 없는 데가 없는 보편적 존재인데 인간의 욕망 때문에 전쟁을 벌여놓고는 신의 이름으로 국군만 축복하고, 북쪽 사람들은 저주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겁니다. 리영희의 이 말은 종교학자들이 해온 신학 연구의 정곡을 찌른 겁니다.”
문장과 강연으로 독재에 대항해 험난한 길을 걸으면서도 예수나 붓다의 마음도 동시에 살아 내려고 했던 지식인. 교도의 수는 많지만 종교가 진정한 역할을 해내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한국 사회에서 리영희는 성찰을 촉구하는 존재이다. 손제민 기자 <2010.4.6>

Posted by 까만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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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한다는 것은 우상을 깨는 것”
리영희 프리즘 - 10점
고병권.천정환.김동춘.이찬수.오길영.이대근.안수찬.은수미. 윤형.김현진 지음/사계절출판사

“난 모든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계한 일은 없지만 거의 모든 사건의 ‘간접적 주범’이 됩니다. (1982년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주범인 문부식·김은숙 두 사람의 재판에도 나는 증인으로 불려나갔어요. 내 책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고 그들이 진술했으니까. 역시 <전환시대의 논리>가 그들의 반미의식의 원천이라고 검찰이 몰아붙이더군. 여기서도 나는 나의 책들이 이 나라의 정의감에 불타는 젊은이들에게 미친 영향력을 실감했어요.”(리영희 「대화」 중)
리영희 선생은 문부식·김은숙의 ‘그런 생각’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수유 + 너머 R 연구원 고병권씨는 ‘리영희 프리즘’ 기념 연속 강연에서 리영희의 생각이 작동하는 방식, 그의 생각이 불러일으킨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경향신문·사계절출판사·인권연대 공동주최의 이 강연은 지난 27일 서울 동교동 ‘아트앤스터디’에서 열렸다.
고씨는 권력으로부터는 ‘범죄를 야기한 범죄’ 즉 ‘메타 범죄’의 주범이자 ‘의식화의 원흉’으로 탄압받으면서, 70~80년대 청년·학생·지식인들에게는 ‘사상의 은사’ ‘시대의 계몽자’로 불렸던 리영희를 통해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란 주제를 풀어갔다.
고씨는 공통의 감각과 통념에 기대 ‘생각’이라고 말하는 것들에 대한 문제제기부터 했다. “‘빨갱이들이 문제야’ ‘여자들이 정치에 나서 설치면 안된다’ 같은 생각은 생각이 아니라 조건반사일 뿐”이라고 말했다. 「자본론」의 몇 개 구절로 자본주의 시스템을 재단하거나 ‘미국은 혈맹’ 같은 프레임에 가두는 것도 조건반사이자 사고 정지의 결과물이다.
고씨는 “데카르트 철학의 제1원리인 ‘코기토 에르고 숨’(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도 우리 정신에서 일어나는 작용 일반을 뭉뚱그려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는 점에서 리영희의 ‘생각한다’와는 거리가 멀다”고 했다. ‘생각한다’는 무엇일까.

“‘리영희와 더불어 생각하게 됐다’고 말할 때는, 매너리즘으로 견해를 갖는 것과 다른 어떤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사건의 영향으로 이전처럼 사물을 보지 않고 다르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고씨는 “리영희 선생은 지식·정보를 전달하는 교육자이기 이전에 각성을 전달하는 교육자였다”며 “선생은 문부식의 ‘방화’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각성을 전달했기에 동의할 수 없는 투쟁도 리영희 때문에 일어나는 게 가능했다”고 했다.
고씨는 ‘리영희’를 읽으며 이성·계몽·신화·의식화·민주주의 같은 말을 다시 음미했다고 한다. 고씨는 “리영희 선생이 싸우려고 한 적의 이름은 ‘우상’과 ‘신화’였다”며 “선생은 ‘권력 철학’이라며 니체를 싫어했지만 우상을 파괴했다는 점에서 두루 통하는 면이 있다”고 말했다.
‘우상’은 ‘생각 없음’ ‘생각하지 못하게 함’이다. 우상은 복종을 요구하고,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자체가 불경하며 파헤치는 순간 신성 모독이 된다. 그래서 우상을 문제 삼은 것을 문제 삼게 될 때 그 재판은 ‘종교재판’의 형식을 띤다. 리영희도 70년대 인신이 구속되고 사상을 탄압받던 자신의 상황을 갈릴레이나 브루노의 종교재판에 비교하곤 했다.
‘생각한다’는 것은 또한 “어떤 전제나 토대에 입각해 추론하는 일이 아니라 바닥을 뚫고 지하까지 내려가는 것”이다.
고씨는 니체의 ‘바닥에 구멍을 뚫는다’는 말과 리영희의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가 아니다’(89년)라는 글을 인용하며 “리영희 선생은 ‘근거들의 근거 없음’을 지적하기 위해 근거 아래로 뚫고 내려가 ‘모든 근거들의 근거 없음’을 폭로한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그래서 ‘생각한다’는 것은 용기가 전제된다.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서 이성의 사용을 공적인 경우와 사적인 경우로 나눴다. 성직자는 사적 사용으로 교황의 명령을 효율적으로 ‘기계의 부품’처럼 처리할 수 있다. 그게 부당한 명령이라면 공적 이성을 가진 자로 발언해야 한다고 했다. 고씨는 일제고사를 거부한 교사를 예로 들며 “칸트는 계몽이 곧 성숙이라고 했는데, 근거의 근거 없음을 문제 삼는 계몽과 성숙의 비밀은 지능이 아니라 감히 뭔가를 할 수 있는 용기”라고 말했다.
많은 이들이 리영희의 사유를 ‘인간주의’라고 불렀다. 그에게 인간의 반대는 동물·식물도 아닌 ‘노예’였고, 자유가 인간 존재의 전부였다. 고씨는 “‘인간이 된다’는 것은 노예로부터 벗어나 자유인이 되는 것, 사고 정지, 조건반사의 상태에서 벗어나 집단적 각성이 일어나는 것”이라며 “노예로부터 자유인으로 변화하는 이 집단적 과정을 민주화라고 할 때 리영희의 인간주의에 대한 물음은 곧 민주주의에 대한 물음이며 이 물음은 끝나지 않았다”며 강연을 마무리했다. 김종목 기자 <2010.3.30>
Posted by 까만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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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지금 한국사회, 메커니즘 같다”
리영희 프리즘 - 10점
고병권.천정환.김동춘.이찬수.오길영.이대근.안수찬.은수미. 윤형.김현진 지음/사계절출판사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0년이 지났다. 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태어난 사람들은 만 60세가 됐지만 전장에서 전투에 가담하고 전쟁의 혼란 속에서 삶을 영위해야 했던 당시의 청장년 세대는 무리지어 역사의 뒤안길로 걸어가고 있다. 한국전쟁을 간접체험한 것이 전부이거나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들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음을 뜻한다. 이처럼 한국전쟁을 화석화된 역사의 한 장면으로 덮어도 되는 것인가?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우리가 이 전쟁을 불러내는 방식은 올바른 것인가?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문제에 천착해온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는 두 가지 질문에 모두 “아니다”라고 말했다. 최근 발간된 <리영희 프리즘>에 필자로 참여한 김 교수는 지난 20일 경향신문과 사계절출판사, 인권연대 공동주최로 서울 마포구 동교동 ‘아트앤스터디’에서 열리는 연속강연의 첫번째 강연자로 나와 ‘전쟁의 세기-리영희와 전쟁’을 주제로 강연했다.
김 교수는 “흔히들 전쟁을 예외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하는데 국가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전쟁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의 위에 전쟁이 있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이해는 그 사회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데 정점에 서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미국 학교의 세계사 교과서에 한국에 대한 설명은 딱 두 페이지인데 한국전쟁과 경제발전 밖에 안나온다”면서 “전 세계 모든 아이들은 한국전쟁과 경제발전으로 한국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이 20세기 한국 역사의 절반을 차지하는 셈이다.
김 교수는 “한국전쟁을 통해 일제 식민세력과 국가보안법이 부활했고, 친일경찰·친일군대가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다”고 부연했다. 한국전쟁은 식민지체제를 냉전체제로 모습을 바꿔 생명을 연장하도록 했으며, 한국전쟁을 통해 일본이 물러가고 미국이 그 자리를 메웠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가 보기에 리영희는 이런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선각자적 지식인이었다. 리영희는 국제부 기자로서 베트남전쟁을 취재하면서 베트남전에 대한 일련의 책들을 펴냈는데 베트남전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한국과 한국전쟁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 김 교수는 “베트남전은 ‘현대 모순의 집약적 표현’이었고 한국 사회와 정부, 한·미관계를 볼 수 있는 프리즘이었다”면서 “베트남전이 더러운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는데 이걸 딱 정리해준 사람이 리영희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6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은 어떠한가? 김 교수는 한국의 주류·보수언론들이 한국전쟁을 회상하는 방식에 대해 “60년간 들어온 압록강에 태극기를 꽂는 유의 철지난 레코드판을 다시 틀어대고 있다”면서 이의를 제기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상임위원을 4년간 역임한 김 교수는 “학살당한 사람과 가족, 그들을 죽인 경찰과 군인 모두 희생자인데 60년간 말못할 사연들을 숨긴 채 살아왔고 여전히 사회의 말단에서 숨죽이고 있다”고 말했다. “진정 양심있는 보수라면 잘나가는 사람들 얘기만 다룰 게 아니라 진정 희생당한 사람들 얘기를 들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는 “전쟁처럼 힘 없는 사람에게 심각한 상황이 없다”면서 전쟁을 통해 돈을 벌고,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아니라 전쟁 때문에 육체와 정신이 망가지고 가정이 파탄난 사람들, 다시 말해 밑바닥에서 위를 올려보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제일 밑바닥에서 보면 그 사회의 모든 것이 보입니다. 누가 어떻게 해먹고, 조그만 것을 가지고 권세를 부리며, 그 정점에 누가 서 있는지 밑바닥에서 보면 다 보인다는 거죠. 군대에서도 말단 이등병의 눈으로 보면 군대가 다 보이듯이 지금으로 치자면 가장 약한 계층인 이주 노동자의 눈으로 보면 한국사회의 노동문제가 다 보입니다. 리영희는 말단 병사는 아니었지만 군대에서 한국사회의 속살과 한국 권력자의 모순을 봤고, 전쟁의 문제와 사회 체제의 문제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봤던 것입니다.”
김 교수는 한발 더 나아갔다. 전쟁의 논리와 시장의 논리는 기본 메커니즘은 같다는 것이다.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사회에서 사람을 함부로 해고하는 사회가 됐죠. 영어 표현은 둘이 같습니다. ‘나 총맞았어’와 ‘나 해고됐어’는 모두 ‘파이어드(fired)’라고 합니다. 우리말도 그렇습니다. ‘잘렸다’는 표현이 그렇지요. 목이 잘리면 금방 죽지만 회사에서 잘리면 천천히 죽는 차이만 있습니다.”
김 교수의 논리를 따라가면 한국은 여전히 ‘준전시상태’다. “사회적으로 소수자, 낙인찍힌 사람을 매장시키고 재기불능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은 전쟁 때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그래서 준전시상태의 남북한에선 인간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준전시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속살을 바로 보는 것. 리영희가 봤던 것이 바로 이것이며 한국전쟁 60년을 맞이해 우리가 봐야 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라는 게 김 교수가 내린 결론이었다.
“전쟁이 추상적이지 않듯 평화는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전쟁과 대결의 이름으로 희생당한 분들의 목소리, 그것이 바로 평화의 출발점입니다. 평화체제 수립 없이 인권은 없습니다.” <2010.3.23>

Posted by 까만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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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선생은 살아 있는 동안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다. 홍세화씨가 <리영희 프리즘> 서문에도 썼지만 평생을 우상과의 싸움으로 살아왔던 그였지만 리영희 선생은 그 자신이 1970년대와 그 이후 '청년'들에게 정신적 스승으로 자리매김됐다. 그런데 아쉽게도 거기까지다. '청년'이 화두가 되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을까마는 이 시대 청년들은 위태롭다. 나 역시 넓게 보면 청년세대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20대는 정처없이 표류하는 난파선의 인상이다. 이들의 현주소와 활로를 찾아보자고 준비했던 대담인데, 대담을 진행하면서 한숨이 나왔다. 그래서 이 시대, 이 사회의 미래는 암울해 보인다.

경쟁에 지치고, 공통문화 없는 ‘모래알 청년세대’
-각 분야 10인이 쓴 ‘리영희 프리즘’ 필자 2인의 대담
-성균관대 천정환 교수·20대 논객 한윤형 씨

리영희 프리즘 - 10점
고병권 외 지음/사계절출판사

고은 시인이 ‘1970년대 대학생의 아버지’라고 썼던 리영희. 군부독재 정권이 ‘대학생 의식화의 원흉’으로 지목해 탄압했던 그를 프랑스 신문 르 몽드는 ‘한국 젊은이들에게 사상의 은사’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리영희는 지난해 12월 팔순을 맞았지만 대학생 혹은 청년이라는 단어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리영희 선생 팔순을 기념해 최근 출간된 <리영희 프리즘>(사계절)은 리영희를 이 시대 청년을 위한 교양의 기초로 자리매김하려는 시도다. 이 책은 고병권, 천정환, 김동춘, 이찬수, 오길영, 이대근, 안수찬, 은수미, 한윤형, 김현진 등 10명의 각 분야 ‘논객’이 리영희의 삶과 사상이 던진 생각거리를 각각 풀어냈다. 필자로 참여한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41)와 20대 논객 한윤형씨(27)가 경향신문사에서 만나 대학생으로 뭉뚱그려지는 이 시대 청년세대의 교양과 삶, 책읽기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청년세대의 교양
천정환(천) = 리영희 선생은 저희 세대만 해도 영향을 덜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리영희 프리즘> 기획서를 처음 받았을 때 한윤형씨가 필자에 들어 있어 흥미롭기도 했고 어떻게 볼지 궁금했습니다.
한윤형(한) = 리영희가 지금 20대에게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누군지 모른다가 정답일 것입니다. 실제로 그러니까요. 제가 쓴 글도 그런 취지인데 그때 리영희에 해당했던 것이 지금의 20대에게는 왜 없는가, 어떤 조건이 바뀌었는가라고 묻는 것이 옳은 질문이 아닌가 합니다. 리영희 선생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던 세대에겐 꼭 리영희를 읽지 않더라도 공통의 무엇인가가 있었을 텐데, 지금 시대는 텍스트로서 그런 것은 없습니다.
천 = 저희 세대는 미리 짜여져 있는 커리큘럼을 가지고 정치에 관심을 갖고 의식화됐는데 지금은 같이 읽기라든지 세미나가 존재하지 않고 의식의 편차도 세대 안에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20대가 정치에 관심을 갖는다든지 옛날말로 지식인스러운 태도를 갖고자 할 때 어떤 경로로 인식을 넓혀가는지 궁금합니다.
한 = 저 같은 경우는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케이스인데, 인터넷을 별로 안하는 친구들도 있어요. 여기에서도 패턴이 좀 나뉘는 것 같습니다. 책을 많이 보는 쪽은 박노자의 영향력이 큰 것 같고, 인터넷 많이 하는 친구들은 진중권을 많이 보는 것 같아요. 강준만은 90년대 후반 학번에게 좀 더 영향력을 미쳤던 것 같고요. 어디까지나 정치에 관심 있는 친구들 얘깁니다만.
천 = 88만원 세대라는 규정이 있긴 하지만 대학생 내부의 격차가 그야말로 극심하잖아요? 세대로 규정 당했지만 하나로 묶일 수 있을까 회의적입니다. 같은 대학생이지만 고민하는 주제나 행동하는 양식이 다 다르기 때문이죠. 일테면 어떤 여학생이 소개팅을 할 때 서열상 어떤 위치 이하 대학의 남학생과는 절대 안 만나겠다고 말하더군요.
한 = 그 부분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옛날에 비해 대학생 집단이 엄청나게 넓어졌습니다. 대학진학률이 86%에 달합니다. 선배들 얘기를 들어보면 90년대 초반만 해도 농촌 출신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만 해도 같은 수준의 텍스트를 읽고 섞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같은 학교, 같은 과라고 해도 계층이 다르면 서로 안 섞이고 사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수능을 비슷하게 쳐서 들어와도 그 안에서 이미 계층이 갈라지는 것이죠.
청년세대의 현실
천 = 결국 대학생들이 끝없이 경쟁하게 만드는, 원자화하는 구조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로 압축되는 것 같습니다. 옛날 방식처럼 ‘100만 청년학도’라고 호명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겠지만 가능한 부분에서 공동체성 같은 것들을 회복하거나 대학생 공통의 문화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20대를 사회 전체의 변혁을 위해 복무하는 전사로 동일시하거나 그렇게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겠죠. 그럼에도 이해가 잘 안되는 것이 역시 등록금 문제입니다. 대학생들이 영어와 컴퓨터 등을 배우기 위해 끊임없이 사교육에 의존해야 하는 문제도 있죠. 이건 전체 사회의 문제이자 자기 자신의 문제이고 내 주머니에서 돈을 갈취해가는 문제인데 정치의식이 없더라도 같이 대응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요.
한 = 설문조사를 보면 운동이 필요하다고 답하는 비율이 많은데 뭘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들 합니다. 원자화가 완료된 상태에서 문제의식은 느끼는데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인 거죠. 시간이 지나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요. 지금은 부모가 돈을 투자해서 대학만 가면 취직이 된다는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 때를 대비해서 삶의 문제가 곧 정치의 문제라는 것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필요합니다.
천 = 작은 단위의 실천 같은 것이 중요하겠죠. 예를 들어 제가 몸담고 있는 학교에 ‘여학생자취연대’ 같은게 있더군요. 자취하는 여학생들이 같은 문제에 처해 있으니 같이 대응하자라는 취지인 것 같았습니다.
한 = 20대가 운동을 해서 당장 정권을 바꾸고 하는 것보다는 작은 것부터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20대 내부의 논쟁이 많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0대끼리 서로 누가 옳네 그르네 하며 싸우면 20대가 보게 되고 힘이 세지는 것 아닌가 합니다.
청년세대의 책읽기
천 = 주제를 책읽기로 돌려보죠. 대학생들이 책을 덜보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물론 문화적 조건이 있습니다. 인터넷을 많이 보니까요. 저희 세대에 책은 사회과학, 인문·교양서 이미지가 강한데 2000년대 들어 인문사회과학 시장이 굉장히 쪼그라들었습니다. 인문사회과학 독자가 재생산이 안된다는 것이고 그 핵심은 20대 독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자기계발로서의 교양이든 삶의 태도나 지향점으로서의 교양이든 교양을 다 포기했다거나 열망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지금 20대는 어릴 적부터 아이폰을 갖고 노는 초등학생하고는 다른 세대이므로 책읽기에 대한 강박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엄청나게 바쁩니다. 경쟁하느라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없는 거죠.
한 = 제가 아는 후배는 이공계를 다니는데 제가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책을 보고 있으면 신기하게 쳐다봅니다. 자기 주변에 전공서적 이외에 다른 책을 보는 친구는 단 한 명도 없다고 합니다. 실제로 바쁘니까요. 전공 외에도 영어, 컴퓨터, 중국어를 시간표를 짜놓고 공부합니다.
천 = 처절한거죠. 학원 5~6개씩 다니는 강남 초등학생들도 불쌍하지만 20대들도 자기 책임을 이행하느라 엄청난 압박에 시달립니다. 구조적인 문제라 어디서부터 뚫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대학 간 경쟁, 대학 내부의 경쟁이 너무 치열합니다. 대학에 있는 한 사람으로서 그런 것을 해소하지 않으면 당분간 희망은 없다고 봅니다. 청년문화가 붕괴된다고들 하는데 청년이라는 말 자체가 20세기 들어서면서 처음 쓰인 것입니다. 이대로 간다면 청년문화가 아예 없는 시대, 청년이라는 단어 자체의 의미가 없어지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합니다. <2010.2.22>

Posted by 까만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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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동대문도서관 2010.07.27 16: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동대문도서관 입니다.
    『근대의 책 읽기』 저자 천정환 교수님의 강좌 <독자, 그들의 대한민국 - 근현대 문학과 독자의 문화사>가 9월 7일부터 매주 화요일 7시에 동대문도서관에서 열립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해주세요. ^^
    http://blog.daum.net/pangloss/6940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