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기억살인

 

김선호

 

#1

그 초밥집에 들어서면서 여러 가지 감정이 차올랐다. 부장으로 승진 했다는 성취감, 몇 년 동안의 노력이 이렇게 나에게 찾아 왔다는 뿌듯함, 그리고 아내와 이렇게 휴일을 같이 보낼 수 있다는 기쁨이 제일 컸다.

, 얼마나 힘든 나날이었는가!

지난 20년 동안은 일만 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상사에게, 또 회사한테 인정받기 위해 다른 일들은 신경을 쓰지 못했다. 나뿐만 아니라 아내에게도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시간 동안 나를 믿어주고 배려해준 아내에게 감사하고 또 미안했다.

20년 동안 수고 한 나에게 주는 선물로 오늘은 아내와 함께 외식을 하기로 했다. 장소는 직장 동료가 휴일에는 아내와 함께 가보라고 극찬한 초밥집이였다. 젊은 청년이 하는 집인데 맛이 일품이라고 침이 튈 정도로 추천했다.

어서 오십시오!”

초밥 집에 들어서자 주방에서 한 청년이 우렁차게 외쳤다. 다른 종업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그가 사장일 가능성이 컸다.

세 사람이 먼저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점심때가 지나 다른 사람은 없고 작고 아담한 가게여서 우리 부부같이 조용한 사람들이 식사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메뉴판을 보니 일반적인 초밥 집보다는 가격이 싼 편이였다. 잠시 고민을 하다 특초밥 세트를 주문했다.

맛있게 드십시오!”

몇 분을 기다리자 그 청년이 우리가 주문한 음식을 들고 와서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와 아내는 초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가슴 한구석에서 뭉클한 감정이 느껴졌다. 아내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만인지!

그런데 주인이 되게 젊네.” 아내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걸레로 바닥을 닦고 있는 그를 보았다. 아무리 잘 쳐줘도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젊은이였다. 우리 아들이랑 비슷한 나이일텐데.

일을 다 끝냈는지 그는 우리의 옆 테이블에 앉아 땀을 닦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의 가슴에 걸려 있는 배지에 김호연이라고 적혀 있었다.

초밥이 참 맛있네요.” 아내가 그를 향해 말했다.

, 네 감사합니다.” 그가 대답했다.

어린 나이에 이런 일을 하는 게 힘들지 않아요?” 내가 호기심이 들어 물었다.

힘들긴 하지만,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요리를 하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돈이 필요하기도 해서요.”

호연은 어릴 때 부모님을 잃어버려 고아원에서 생활 했다고 한다. 최근에 고아원에 들어오는 후원금이 줄어들어 생활하기 어려워지자 지인에게 가게를 물려받아 후원금을 담당하고 있다고 했다.

호연을 보고 있자니 우리 아들이 떠올랐다.

 

만약 우리랑 같이 있었더라면 이렇게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을까?

그때의 일을 생각하니 지금도 소름이 돋았다.

쓸데없는 생각은 떨쳐 내자.

우리는 자식이 없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신기하네.” 아내가 말했다.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였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자자, 왜 쓸 때 없는 이야기를 하고 그래.”

나는 당황하는 기색을 숨기고 이야기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식사를 끝내고 나오려고 할 때 그가 배웅을 나왔다. 다음에 또 온다고 말하고 가려고 했다. 그 순간 호연이 식당으로 들어오려는 사람과 부딪혀 휘청했다. 잠깐 동안 그의 이마를 덮고 있던 앞머리가 올라갔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의 앞머리에 가려져 있던, 이마에 선명하게 나 있는 흉터 자국을.

 



#2

민호는 우리의 보물이었다. 민호가 자라는 것을 보는 것은 우리 부부의 큰 행복이었다. 내가 회사일 때문에 아무리 바빠도 민호만 보면 모든 피로가 가셨다.

민호는 웃음이 많고 활동적인 아이였다. 앉아 있기보다는 서 있는 것을 좋아했고, 걷기보다는 뛰어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성격이 민호에게 화를 불러왔다. 민호가 4살 무렵이었다. 내가 해외로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던 날, 아내와 민호가 나를 마중하러 나왔다. 며칠 동안 보지 못한 아빠를 보고 반가웠던 것인지 민호는 나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한 순간이었다. 민호의 이마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흉터가 생기는 것은.

어린아이로서는 힘든 수술이었는데 민호는 다시 밝고 활기찬 아이로 돌아 왔다.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그것이 우리 부부에게 아주 큰 위안이 되었다. 흉터도 앞머리를 내리면 가릴 수 있었다. 하지만 바람이 불 때 가끔 보이는 민호 이마의 상처는 마음 한구석을 후벼 팠다.

하지만 신이 우리 가족에게 내린 불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3

민호의 다섯 번째 생일 날, 우리 가족은 축하하기 위해 놀이공원을 찾았다. 민호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나했다. 회사일 때문에 휴일에도 쉬기 어려웠지만 민호의 웃는 얼굴을 보며 역시 시간을 내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완벽한 날이었다. 민호의 이마에 흉터가 생긴 이후 처음 느끼는 완벽한 행복이었다. 민호가 웃을 때마다 나의 스트레스는 날아가는 듯 했다.

이른 아침부터 바이킹과 회전목마, 후룸라이드를 타고 점심으로 돈가스를 먹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민호가 가자고 졸라 댔던 범퍼카를 타기로 했다. 그날이 주말이고 범퍼카가 아이들에게 워낙 인기 있는 놀이기구여서인지 기다리는 사람들이 다른 곳보다 많았다.

줄을 서서 기다리던 중 휴대폰이 울렸다. 상사의 전화였다. 아무리 주말이라지만 이 전화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다. 아내에게 말하고 조용하게 통화할 만한 곳을 찾아 줄에서 빠져나왔다.

 

만약 그때 전화를 받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 자리에서 전화를 받았더라면?

만약 그날이 주말이 아니었더라면?

아니면 만약 범퍼카를 타기로 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생각했던 것 보다 전화통화가 길어졌고, 통화를 마치자마자 급히 돌아왔다. 아내와 민호가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찾던 도중 바닥에 주저 않아 있는 아내를 발견했다.

그녀의 머리는 헝클어지고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려 눈은 충혈 되어 있었다. 나는 불안한 느낌이 들어 급히 달려 왔다.

왜 그래, 민호는 어디 있어?”

민호 손을 잡고기다리다가사람들한테 밀려서.”

?!”

찾아 다녔는데찾아 다녔는데.”

그 날, 나는 미친놈처럼 민호를 찾아 다녔다. 놀이공원의 미아보호소를 수백 번 들락거리고, 놀이공원 관리소에 민원이 들어올 정도로 헤집고 다녔다. 놀이공원이 폐장한 이후에도 주변을 수십 번은 돌았다.

 

첫 번째 주에는 놀이공원 경비가 나를 쫓아낼 때까지 찾아다녔다.

 

두 번째 주에는 경찰서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렸고, 112 전화 건너편의 목소리가 짜증낼 때까지 전화했다.

 

세 번째 주에는 컴퓨터에 이상이 생기고 눈앞이 헤롱거릴 정도로 인터넷을 뒤졌다.

네 번째 주까지도 회사에 가지 않았다.

 

네 번째 주의 마지막 날, 잠에서 깨어나 보니 휴대폰에 메시지가 와 있었다.

만약 다음 주에도 회사에 나오지 않으면 퇴사한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그 순간 내 가슴에 있었던 무언가가 끊어졌다.

 



#4

다시 회사에 나갔다. 상사의 의심스러워하는 눈초리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일했다. 민호의 생일로부터 6개월쯤 지났을 즈음, 겉으로 비춰지는 나의 일상은 정상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돌아가지 않은 것이 있었다. 바로 아내였다.

아내는 민호를 잃어버린 그날부터 정신병 환자처럼 행동했다. 발작을 일으키고, 매일 밤 민호를 부르며 통곡하다 정신을 잃었다. 밥도 먹지 않아 초췌해졌다.

민호를 찾는 것을 그만두겠다고 하자 아내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부터 아내는 민호가 가지고 놀던 인형을 담요로 감싸 안고 흔들며 이름을 불렀다. 인형을 뺐으면 울면서 나한테 매달렸다. 시도 때도 없이 민호를 부르며 민호랑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했다. 정신과 의사를 만나 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내의 증상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회사일도 만만치 않은데 아내까지 신경을 쓰려니 내 눈에서 다크서클이 사라질 새가 없었다.

하루는 회사에서 나와 집으로 향하던 중 전화가 왔다. 오랜 친구 녀석이 초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다며 나오라는 것이었다. 거절하려고 했지만 잠시 기분전환이라도 할 겸 가보기로 했다.

동창모임에 나온 친구들은 회사 얘기, 가족 얘기, 승용차 얘기 같은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하며 술을 마셨다. 한 친구가 눈에 들어왔다. 초등학교 시절 꽤 친했지만 중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연락이 끊겼던 친구였다. 그는 사람의 뇌에 전자기적인 자극을 주어 무엇이든 그것에 관한 기억을 지울 수 있다고 했다. 당연히 아무도 믿지 않았다. 무슨 SF소설도 아니고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운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그가 꽤 술에 꽤 취한 상태라는 것도 그의 말을 흘러듣게 만들었다. 하지만 불현듯 아내가 생각이 났다.

 

만약 정말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아내를 민호의 기억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면?

그 후 동창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정신은 온통 기억을 지울 수 있다는 그의 말에 쏠려 있었다.

 

동창모임 바로 다음 날 그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 네가 전화하다니 별일인데?”

기억정말 지울 수 있는 거 맞아?”

?”

동창회에서 네가 그랬잖아. 기억을 지울 수 있다고.”

내가정말로 그런 말을 했냐?” 그의 목소리에 당황이 묻어나왔다.

아니야?”

그것보다, 그런데, 너 말고 내 말을 믿은 사람이 있어?”

다들 안 믿는 눈치던데.”

침묵이 이어졌다. 숨을 가다듬는 듯 했다.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도 들려왔다.

아 그럼 됐어. 그리고기억은 지울 수 있어불법이긴 하지만.”

불법이란 말에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 없다는 생각에 다시 물었다.

정말 지울 수 있어?”

그럼! 우리 조직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기억을 지워줬는데.”

정확하게 무엇을 지울 수 있어?”

사물, 사건, 인물, 기억하고 있는 것이라면 뭐든 상관없어.”

부작용은?”

우리가 확인한 바로는 없어. 그래서 너의 문제는 뭔데?”

나는 민호와 내 아내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러니까, 네 아내가 아들에 대한 기억으로 고통스러워하니 그 기억을 지워 달라?” , 그런 셈이지.”

, 역시,”

역시라니?”

우리에게 기억을 지워달라고 오는 사람은 대부분 과거의 실수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거든.”

잔말 말고. 그래서 지우려는 데 얼마나 들어?”

그건 기억이 얼마나 방대한지에 따라 다른데. 그런데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인물에 관한 기억을 지우는 것이 제일 복잡해. 네가 말하는 데로 아내의 기억에 서 네 아들의 기억을 지우면 아들을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리고 기억에 모순이 생기지 않게 네 아내의 삶을 통제해야 하고.”

……

여보세요?”

그럼 좀 생각해보고 전화 할게.”

 

전화를 끊고 나는 생각해 보았다. 만약 이런 삶을 유지한다면 나는 물론이고 아내도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죽었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평생을 이렇게 산다는 것은 결코 좋은 삶이 아니다. 불법이란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민호의 기억을 지운다면 아내는 평상시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민호를 찾지 않고 자신의 삶에 집중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민호를 죽인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그래도 내 아들인데, 그럴 수 있을까?

 

아들을 죽이고 얻는 평화가 의미가 있을까?

한참을 생각했지만 내 마음은 점점 더 아내의 기억을 지우는 쪽으로 끌려갔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욕구가 너무 강했다.

 

결심을 굳힌 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일정을 잡았다. 마침내 약속된 날이 다가왔다. 아내는 한손은 집밖으로 나서는 나의 손에 이끌리면서도 다른 손은 아내는 인형을 꽉 안고 있었다. 아내는 움츠리며 물었다.

어디 가는 거야?”

순간 뭐라 말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여기서 잘못 대답하면 아내는 아예 나오려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죄책감이 느껴졌지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민호 보러.”

아내는 내 말을 듣고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나를 따라 나섰다.

나는 그 날, 아내에게 있던 민호를 죽였다.

 

#5

아내의 기억을 지운 후로부터는 신기할 정도로 속전속결이였다. 민호에 관한 모든 기록이나 흔적을 지우고 이사를 했다. 새로운 동네에는 모르는 사람들뿐이었으니 우리에게 민호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다만 아내가 민호를 아는 사람들과 만나게 하는 것을 통제해야 했다. 아내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지냈다.

아내가 민호를 찾는 일은 없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었다. 아내의 기억 속에 민호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됐으니까. 아내에서서 민호를 지운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이 비수가 되어 나를 찌르기도 했지만, 그 비수도 점점 무뎌져 갔다.

아내의 발작이 없다보니 나도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회사는 승진으로 보상했다. 평탄한 나날이 이어지고 시간이 지나자 나도 민호를 서서히 잊게 됐다. 그렇게 20년을 살았다. 우리에게 불행이 없었던 것처럼. 그런데 어느 날, 호연과 마주쳤다.

 

#6

그 초밥집에서 다녀온 이후에도 호연과 이마의 흉터가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부모님을 잃고, 이마에 큰 흉터가 있는 아이가 둘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

 

이 생각이 생각이 계속 떠올랐다. 나는 호연이라는 청년에 대해 더 알아보기로 했다.

며칠 후 초밥집을 혼자서 다시 찾았다. 이야기를 수월하게 할 수 있게 점심 때가 지난 시간에 갔다. 손님은 없었고, 호연은 구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 또 오셨네요.”

그가 꽤 반가운 얼굴을 하며 말했다. 아마도 우리가 오는 것을 기다렸을 것이다.

, 그래요.”

음식이 나오고 호연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부모님을 어떻게 잃게 됐는지는 민감한 부분이라 이야기하는 것을 꺼릴 줄 알았더니 오히려 나에게 술술 털어 놓았다.

부모님을 어떻게 잃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아요.” 호연이 말했다.

그냥 사람들에 밀려서 이리저리 움직였고, 정신 차려 보니 경찰서더라고요. , 워낙 어렸을 때여서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부모님을 찾지 못하자 고아원에 가게 됐고요. 처음에는 많이 어색했지만 자라면서부터 점점 머릿속에서 부모님을 잊게 됐습니다. 힘들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살 만 하더군요.”

호연의 이야기를 듣는 도중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우리 아들이 죽지 않고 어디선가 계속 살았더라면?

 

가끔 부모님이 보고 싶기도 하지만, 부질없는 소망이겠지요.”

지난 20년 동안 잊고 지냈던 죄책감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괜찮으세요?” 호연이 물었다. 내 안색이 창백해졌던 모양이다.

마침 그때 손님이 들어왔다. 주방으로 달려가는 호연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왔다. 집에 가는 도중에도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겨우 앞이 보여 집을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집에 들어서자 아내가 웃는 얼굴로 반겨 주었다. 그 순간, 혐오감이 벅차올랐다.

 

아들을 죽이고 얻은 거짓된 삶, 이런 것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내 표정이 평소와 달라 이상했는지 아내가 물었다. 나는 아내를 뒤로하고 서재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잠시만 좀 내버려둬요!”

아내가 문밖에서 몇 번 더 말을 걸었지만 대답이 없자 그것도 곧 사라졌다. 그동안 내 머리는 터질 듯 굴러가고 있었다.

아내한테 말해 봤자 소용없어, 아내는 민호를 기억하지 못하니까.

만약 호연이 내 아들이 아니라면? 나만 곤란한 상황이 될 뿐이야.

 

호연을 무시한다고 될 일이 아니야.

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어. 계속 내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니까.

그때 기억을 지우지 말아야 했어.

 

아니야, 아내한테서 민호를 지운 건 잘한 일이야,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살지 못했어.

 

하지만 민호랑 다시 만날 줄은 몰랐는데.

 

민호가 아닐 수도 있어.

 

설령 아니라고 해도 다시 이렇게 살 수는 없어.

 

마음속에서 이 사실을 그대로 말하자와 말하지 말고 그냥 살자, 두 가지 목소리가 다투고 있었다. 둘 다 좋은 방안은 아니었다. 3의 방안을 찾아야 했다. 이 모든 일이 아내의 기억에서 민호를 지운 것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자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릿속에 박혔다.

 

내 기억에서 민호를 지운다면?

 

생각해보니 이점이 많았다. 더 이상 민호를 생각하면서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되고, 아내의 기억을 지웠다는 것도 잊어 죄책감을 없앨 수 있다. 호연을 만날 때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것보다 나은 방안은 없었다.

20년 전과 같이 나는 그 친구를 만났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기억을 내 지워달라고 했다.

……

왜 그래?”

정말그래야겠어?”

뭔 소리야, 내가 말했잖아, 이것 밖에 방법이 없다고.”

내가 20년 전에도 말했듯이, 사람에 관한 기억을 지우는 것은 그 사람을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내가 이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은 너도 잘 알잖아!”

나도 괴로워서 그런다.”

뭔 소리야?”

많은 사람들이 경고를 무시하고 기억을 지웠다가 나한테 다시 찾아오는 경우가 다반사거든.”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어.”

이제는 내 친구까지 그러니알았어. 일정을 잡아 줄게.”

 

이번에는 내가 수술대에 오르기 전, 나는 다시 민호를 회상했다. 이제 다시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니. 불법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나에게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기억을 지운 결과가 이거구나.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이것이 최선의 방안이야.

 

내 마음 속에서 이런 소리들이 울렸다. 드디어 수술대에 올랐을 때 의문이 생겼다.

 

나만이 유일하게 민호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는데, 나까지 잊어버린다면 민호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것이야말로 정말, 살인이 아닐까?

 

나에게 이런 살인을 할 자격이 있을까?

 

이제 나는 정상적으로 살 수 있을까?

 



#7

잠에서 깨어 보니 친구의 얼굴이 보였다. 건강검진을 했는데 큰 문제는 없는 것 같고 결과는 곧 통보해 준다고 했다. 친구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무언가 긴 꿈을 꾼 듯한 느낌이 들었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중 초밥집이 보였다. 몸은 피곤했지만 내 발은 저절로 그곳으로 향했다.

또 오셨네요? 어서 오세요.”

호연이 언제나처럼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끝)


※2018년 제26회 숭실문학상 황순원 소설 문학상 부문 장려상 수상작

Posted by 까만주름

댓글을 달아 주세요

지난 7월23일부터 28일까지 4박6일 일정으로 라오스 비엔티안으로 출장을 다녀왔다. 안세안지역안보포럼(ARF)를 비롯한 아세안 관련 연례회의가 이곳에서 열렸고, 북한의 리용호 신임 외무상이 처음으로 다자회의 무대에 데뷔할 예정이어서 많은 관심이 쏠린 국제회의였다. 근래들어 유래 없을 정도로 많은 기사를 써야 했다. 덕분에 회담장에 한번 가보고는 내내 숙소에 마련된 프레스센터에 머물러야 했다.


사진 몇장 찍지 못했지만 더 늦기 전에 갈무리 해둔다.


우리가 묵은 숙소는 메콩강변에 자리잡고 있었다. 내가 묵은 방은 6층에 있었는데 발코니에 나가면 메콩강이 한눈에 들어왔다. 비엔티안은 라오스의 수도인데 메콩강을 경계로 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호텔방에서 보이는 강 건너편이 바로 다른 나라, 태국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눈 앞에 국경을 보고도 잘 실감이 되지 않았다. 우리에게 국경이라고 하면 철조망이 쳐져 있고, 군인들이 삼엄한 경비를 하는 장면이 익숙한데 이 라오스와 태국의 국경은 여느 강변과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두번째로 들었던 느낌은 라오스의 하늘이 참 파랗다는 것이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는 하늘이 무척 맑고 파래서 '캐롤라이나 블루'를 상징색으로 자랑하는데, 라오스의 하늘은 맑고 파란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느낌이 달랐다.









7월은 우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메콩강은 수량이 평소보다 늘어난 상태라고 했다. 그리고 물 색깔도 상류에서 실려온 진흙으로 탁했다.



마지막 날 잠시 짬을 내 비엔티안 시내를 둘러봤다. 불상을 전시한 박물관, 비엔티안에서 가장 역사가 깊다는 사원, 라오스의 독립기념탑인 '빠뚜사이' 등이었다. 불상과 절 건물은 화려하기 보다는 소박했고, 빠뚜사이도 그 의미에 비해 좀 유치해 보일 정도로 소박했다. 그렇지만 정신없이 바쁘고 복잡한 나라에서 온 사람에겐 이런 단순하고 소박함마저 참신해 보였다.

















라오스의 불상들은 라오스 사람들과 닮지 않았다. 코가 무척 크고 높다. 눈도 크고, 손도 길다. 서 있는 불상의 경우 엉뚱하게도 외계인의 느낌이 났다. 아무래도 라오스의 불상들은 인도인을 모델로 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잘 생긴 라오스의 '국목'(國木)이라는 참파나무. 비엔티안 어딜 가든 눈에 띈다. 가로수로도 심어져 있다. 내가 갔던 시절은 꽃은 이미 진 시기였던 것 같은데, 드물게 꽃이 보였다. 참파나무의 꽃은 라오스어로 '독'이라고 한단다. 그래서 참파나무 꽃은 '독 참파'가 된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독 참파는 향이 좋아서 기름을 짜서 아로마로 사용한다고 한다. 나중에 귀국할 때 보니 라오스의 국적항공인 '에어라오'의 꼬리 날개에 '독 참파'가 그려져 있었다.





마지막은 맛이 꽤 좋았던 라오스 맥주 '비어 라오'. 사실 바빠서 술 마실 기회도 별로 없었다. 비어 라오는 라오스에서 거의 독점적 지위인 것으로 보였다. 하이네켄 같은 외국산 맥주 외에 라오스 국산 맥주는 비어 라오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약간 쓴 맛도 가미된 것 같고, 맛이 괜찮았다.



'꽃보다 할배'라는 프로그램에 라오스가 나오면서 요즘 한국 관광객들이 몰린다는 라오스. 유명 관광지인 '루앙 프라방'는 색이 참 좋다는데, 비엔티안은 볼거리가 그닥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음식 좋고, 물가 싸고, 사람들은 순박해 보였다.


Posted by 까만주름

댓글을 달아 주세요



 텔레비전과 담을 쌓고 사는 나에게도 귀에 익숙한 걸 보면 매우 유명한 게 분명한 ‘씨엘’의 아빠 이기진 교수가 쓰고 그린 [20 UP 투애니업]을 읽었다. 밝은 노란색 표지에 예쁜 일러스트가 곁들여진 이 책은 ‘시엘 아빠, 이기진 교수의 일러스트 에세이/청춘을 건너는 5가지 기술’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책을 만든 사람들이 읽기를 희망하는 대상을 ‘청년’으로 명시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 아들내미에게 해줄 공부와 꿈, 사랑, 인생, 행복에 대한 근사한 조언에 관한 아이디어를 좀 얻을 수 있으려나’하는 편한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힘을 빼고 ‘쿨’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저자의 모습은 내게 큰 울림을 안겨주었다. 이 책은 ‘청춘’을 겨냥하고 만들어진 것은 맞지만 중년의 남성에게도 색다른 ‘충격’을 안겨준다.

 한살, 한살 나이를 먹다 보니 어느새 사람들이 ‘중년’이라고 부르는 나이가 됐다. 마음 속에 그려지는 나의 모습은 여전히 어수룩한 실수투성이이지만 사회적으로 요구받는 나의 모습은 매우 노련하고 뭔가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지만 뭔가에 대해 나름의 ‘개똥철학’을 설파할라치면 상대로부터 ‘저 아저씨 뭐래?’라는 눈총이 돌아오곤 한다.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시기라고는 하지만 중년은 이래저래 매우 어정쩡한 시기라는 것을 알게됐다.

 왜 그럴까? 왜 이렇게 무기력하면서도 짜증이 나는걸까 궁금하곤 했는데 [20 UP 투애니업]은 이 문제에 대한 힌트를 담고 있었다. 사람은 먹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니고 살기 위해서 먹는 것도 아니다. 사람에게는 생존이라는 일차적 목표 외에도 다양한 삶의 목표가 있고, 먹는다는 행위는 신체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기능 외에도 맛있는 음식을 먹는 데에서 오는 쾌락을 충족시키는 기능도 한다. 인간은 ‘호모 라보란스(노동하는 인간)’인 동시에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인 것이다.

 [20 UP 투애니업]의 저자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는 이런 모습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공부를 직업으로 하는 교수로서 연구를 하고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로봇 캐릭터를 만든다. 재미난 책을 잡으면 밤을 세우고, 방학이 되면 여행을 간다. 한때 와이너리를 차릴까 고민했을 정도라고 하니 ‘마시는 것’에 대해서도 상당한 취미를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스스로 ‘딴짓박사’를 자처하는 이기진 교수의 딴짓 리스트는 이 밖에도 어마어마 하다. 그는 초등학교 때는 야구에 미쳤고,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는 축구에 미쳤고, 대학 때는 농구에 미쳤으며, 대학원 시절엔 자전거에 미쳤다고 했다. 지금도 자건거를 탄다고 한다. 각종 ‘취향’과 ‘취미’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거기에다 쿨함과 유머러스함까지 겸비했다. “공부의 신도 두려워하는 게 있을까요?”라는 학생의 질문에 “그럼, 옆 반 공부의 신!”이라고 답하는 콩트를 날린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중년이 되어가면서 내가 느꼈던 어정쩡함, 무기력함의 상당 부분은 나의 ‘몰취향’과 ‘무취미’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일’을 빼고는 ‘유일’한 오락거리가 술마시기이고 틈이 났을 때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이 ‘낮잠자기’이며, ‘뭘 먹을까?’ ‘뭘 볼까?’ ‘어디 갈까?’라는 상대의 질문에 ‘아무거나’라는 공통의 답변으로 일관하는 나. 가끔 주말에 산이나 한강변을 걷는 ‘원초적 활동’을 하는 것이 그나마 취미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20 UP 투애니업]을 보면서 오랜만에 부럽다는 느낌을 가져봤다. 나보다 나이가 한참 위인 이가 이처럼 다양한 ‘딴짓’을 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다채롭게 꾸며가고 있는데 나는 뭐하고 있나라는 부끄러움도 들었다. 하지만 “나도 오늘부터 ‘취행’과 ‘취미’를 가질거야”라고 결심한다 한들 없던 취향이 어디서 갑자기 뚝 떨어질 리는 없을 것이다.

 이기진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개성 있는 사람을 흠모하고 따라 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해서 지금 당장 자신의 개성 찾기에 도전해 보자. 그리고 여러 번에 걸친 시행착오를 통해 오롯한 자신만의 개성을 만들어 가는 즐거움을 누려 보자. 그 끝에는 원하던 꿈에한 걸음 다가가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이 중년에게도 해당된다고 믿고 싶다.

 코드를 다 까먹어버린 기타를 잡아볼까? 아님 대학 시절 미쳐 살았던 전통 타악기? 책상 앞에 장식처럼 꽂아 놓기만 한 일러스트 그리기 책을 펼쳐봐?

 음~. 일단은 오늘 저녁 막걸리를 한잔 하면서 생각해봐야겠다.


20 up 투애니업 - 10점
이기진 글.그림/김영사on


Posted by 까만주름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조아하자 2016.07.05 22: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저도 좋아하는 가수님이 있어서~ ㅎㅎㅎ 독서랑 음악을 좋아하는 1인입니다. 인생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고 진짜 불행한 사람은 돈못버는 사람이 아니라 인생이 즐겁지 않은 사람이죠~



올 봄 치러진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대결은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사람들은 인공지능의 능력이 이토록 높은 단계에 와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인간 중에서 가장 바둑을 잘 둔다는 이세돌 9단을 기계가 저토록 손쉽게 이길 수 있다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도 기계가 훨씬 더 잘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닌가라는 두려움을 갖게 됐다. 그간 수많은 공상과학(SF) 소설과 만화, 영화에서 '인간 대 기계'의 대결이 그려지고, 인간이 기계의 지배를 받거나 기계에 의해 멸종되는 어두운 시나리오가 상상됐음에도 자신감을 잃지 않았던 인류는 어쩌면 처음으로 기계에 의한 지배 또는 기계에 의한 멸종을 진지하게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일지 모른다.


인류 가운데 가장 뛰어난 천재들이 매달려서 만들고 있는 인공지능은 지금 맹렬한 속도로 발달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당연한 일처럼 보이지만 기계에게 지능을 부여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유명론'과 실재론(실념론)'이라는 서양 철학의 오랜 전통과 맞닿아 있다는 점은 흥미로웠다.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것에 대한 논의는 정말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적어도 2500년 동안 인류가 고민해온 문제죠. 철학에서는 이것을 보편성 문제(universals)라고 합니다.…어떻게 인간은 강아지라는 아주 보편적인 개념을 가질 수 있을까요? 철학에서는 이 보편성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두 가지 파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유명론(nominalism)이고 또 하나는 실념론(realism)입니다. (39~40쪽)



저자의 설명으로 유추하자면 기계에 지능을 부여하기 위한 과거의 노력은 실재론에서 출발했다. 개와 고양이의 정의, 즉 개와 고양이의 '이데아'를 기계에게 가르쳐서 다양한 형태의 개와 고양이를 기계가 인식하고 구분할 수 있도록 가르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실패했다. 인간 스스로가 이런 식으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뇌는 정보를 획득하는 방법이 컴퓨터와 완전히 다릅니다. 뇌가 두개골 속에 있기 때문이죠. 컴퓨터는 정보를 가감 없이 입력합니다. 매개체를 거치지 않죠. 뇌는 사실 현실을 알 수가 없습니다. 세상을 직접 보지 못하니까요. 뇌는 눈, 코, 귀 등 오감을 통해서 들어오는 정보를 패턴화하여 저장하고 그것을 해석합니다. (93~94쪽)


서양철학 2500년의 프로젝트를 떠올려봅시다. 그 프로젝트의 핵심은 세상을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은 거잖아요. 기호와 규칙. 무슨 이야기냐 하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뿐만 아니고 내 머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100퍼센트 표현할 수 있는 기호들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입니다.…‘내 머리 안에서 이런 일들을 기호와 규칙으로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면 사람하고 똑같은 지능을 만들어낼 수 있겠구나’라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했죠.…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시도를 해도 설명으로는 기계가 세상을 인식하지 못하는데 사람은 분명히 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강아지와 고양이를 구별하는 걸 배웠을까?’를 먼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따라서 우리는 현실이라는 우주에서 가장 큰 빅데이터를 통해 경험하고 학습하여 지능을 얻은 것 같습니다.…이제 사람들은 뇌가 세상을 인식하는 과정을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들이 20세기에 들어와 밝혀지기 시작했습니다. (115~117쪽)



20세기 뇌과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인간이 어떻게 인식하는지 밝혀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알파고로 인해 유명해진 '딥러닝' 방식이 인공지능 연구에 도입됐다.



우선 딥러닝은 더 이상 인간이 기계에게 세상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관한 엄청나게 많은 데이터를 그냥 집어넣어주는 겁니다. 빅데이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겠지요. 기계는 이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자체 인공신경망 구조를 통해 스스로 학습합니다. 무엇을 학습할까요? 이 데이터에 포함된 통계학적인 정보에 대해 점점 더 압축된 표현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학습이라고 말합니다. (126쪽)



기술의 발달이 어떤 질적인 변화로 이어지는 순간인 '특이점'이 그리 멀지 않았다고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알파고의 가공할 지능을 보면서 인류가 느꼈던 전율과 두려움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인공지능의 발달에 따른 특이점이 언제 어떻게 올 지 인류가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기술이 발전하는 과정 중 늘 걱정해야 할 부분은, 기술은 어느 한순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시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특이점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특이점은 나중에 알 수 있어요. 대체로 직선 형태로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특이점은 미래의 일이기 때문에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죠. 우리는 과거로 미래를 예측하다 보니 현상태에서는 선형으로 증가한다고 예상하는 것이 더 일반적입니다.…인공지능 기반의 기술이 분명 특이점을 만들 것인데, 이 시점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확실한 것은 200년 후가 아니라 10~30년 남짓 남았다는 거죠.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일상을 즐기던 칠면조들처럼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지는 않나요? (270~272쪽)


실리콘밸리 사람들이 간과하는 점은, 과거의 산업혁명이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은 인류가 19세기에 엄청난 노력을 했기 때문에 결국에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인류는 세 가지 혁신적인 노력을 했습니다. 첫째로는 프랑스에서 공교육이란 것을 시작했습니다.…둘째로 독일에서 사회보장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보험제도지요. 셋째로 영국에서 세금제도가 생겼습니다.…이 세 가지 제도로 19세기 1, 2차 산업혁명은 잘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닥칠 산업혁명은 지금도 벌어지고 있고, 향후 20~30년 후에도 벌어질 일이지만 인류는 아직 아무 준비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핵심적인 문제가 아닐까요? (291~292쪽)



저자는 인공지능을 연산력과 지능이 뛰어나지만 자유의지를 갖고 있지 않은 '약한 인공지능'과 사람처럼 자유의지, 즉 정신을 갖고 있는 '강한 인공지능'을 구분한다. 그리고 전자는 기정사실이 됐지만 후자가 가능한지는 아직 모른다고 말한다. 약한 인공지능 만으로도 인류 사회는 커다란 변화를 겪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만약 강한 인공지능이 등장한다면 인류는 정말로 살아남기 위한 걱정을 해야 한다. '터미네이터'가 더이상 SF 속의 이야기만은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강한 인공지능은 현재로선 SF입니다. 가능하다는 증거도 없고 불가능하단 증거도 없습니다. (318쪽)


강한 인공지능을 이야기할 때 이 두 사람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티븐 호킹과 엘론 머스크. 스티븐 호킹은 인공지능이 생기면 인류가 멸망한다고 이야기했고, 엘론 머스크는 핵폭탄보다 더 위험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말하는 인공지능은 강한 인공지능입니다.…강한 인공지능이 생겼을 때 인류에게 주는 영향을 시뮬레이션을 해봤습니다. 다양한 시나리오로 시뮬레이션했어요. 구글이 만든 답, 정부가 만든 답, NGO가 정말 조심스럽게 만든 답. 모든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해보니 결론이 항상 똑같습니다. 약간 시간적인 차이가 있지만 강한 인공지능의 모든 끝이 인류멸망입니다. (319~320쪽)


그렇다면 강한 인공지능이 현실화 됐을 때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이 책의 마지막에 던져진 아래의 질문은 정말 섬찟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지금 있는 그 모든 시나리오를 봤을 때 강한 인공지능이 생기는 순간 인류는 가장 큰 적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엘론 머스크와 스티븐 호킹이 말하는 인류멸망이죠. 카네기멜론대학의 앤드루 무어(Andrew Moore) 교수는 이렇게 이야기한 적도 있습니다. ‘강한 인공지능이 등장하면 인류는 멸망한다. 근데 그게 왜 나쁜가? 인류가 멸망하는 것이 왜 나쁜지 한번 설명해봐라’라고 말이죠. (338쪽)


강한 인공지능은 어차피 다 SF입니다. 하지만 약한 인공지능은 100퍼센트 실현됩니다. 앞으로 닥칠 미래가 있는데 인간이 이미 기계 같은 삶을 살고 있다면, 기계한테 100퍼센트 집니다. 결국 우리가 기계에게 이기기 위해서는 인간다운 삶을 살아야겠죠. 다시 말해, 내가 하는 일이 이미 기계 같다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가진 유일한 희망은 ‘우리는 기계와 다르다’입니다. 그 차별화된 인간다움을 가지고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350쪽)



김대식의 인간 vs 기계 - 10점
김대식 지음/동아시아


Posted by 까만주름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조아하자 2016.06.16 21: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장 개발자인 저는 먹고살 걱정을 해야... ㅡㅡ; 프론트엔드 개발도 가까운 미래에 기계가 다 할수있을 거 같거든요.

    • 까만주름 2016.06.17 09: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게요. 이 책에도 그 내용이 나오더라고요. 아무리 코딩을 잘하는 사람이더라도 몇백줄에 한번씩은 실수를 하기 마련인데 기계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니까요. ㅠㅠ




이태 전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출근해 점심을 먹을 때 빠르게 바뀌고 있는 우리 장례 문화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한 선배가 “내가 신문사 들어오고 얼마 안됐을 때 매장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몇십년 뒤 전국이 산소로 변할 것이라는 기획기사를 쓴 적이 있는데 그런 우려가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화장문화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각 민족의 문화에서 가장 느리게 바뀌는 것 가운데 하나가 장례문화라고 하는데 한세대 안에 장례문화가 급속하게 바뀌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어디 장례문화뿐이랴. 인터넷과 디지털의 등장은 수십, 수백년 간 존재하던 것들의 모습을 재빠르게 변화시키고 있다. 자가용마다 뒷자석 한자리를 차지하던 ‘운전용 도로교통지도’는 사라진지 오래이며, ‘종이사전’은 아직 서점에서 한 코너를 차지하고 있지만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이제 지도와 사전은 컴퓨터로, 휴대전화로 언제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는 물건이 됐다. 그런데 종이로, 책으로 묶여 있던 사전이 단순히 인터넷이라는 매체로 모습을 바꾼 것에 불과할까? 아니기 때문에 이 책이 나왔을 것이다.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은 1755년 [영어 사전(A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을 펴내 근대적인 어학 사전의 개념이 확립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펴낸 [영어 사전]에서 ‘사전편찬자’(lexicographer)를 ‘사전의 작가, 무해하고 틀에 박힌 지겨운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여러 사람이 틀에 박힌 지겨운 일을 해야 사전 한권이 나올 수 있다.


[검색, 사전을 삼키다]의 저자는 사전을 이렇게 정의한다.


사전은 ‘지식에 대한 지식’을 정리한 책이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지식에 대한 개념을 서술한 책이다. (54쪽)


용어 정의는 건조해야 한다. 더 이상 뺄 단어가 없을 때까지, 더 이상 추가할 단어가 없을 때까지 고민해서 정의를 내려야 한다. 그렇게 건조시킨 용어는 하나의 벽돌이 된다. 이 벽돌을 어떻게 쌓아서 지식과 학문으로 만드느냐는 그 다음 단계다. 일단 벽돌 자체가 견고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분석과 건조화라는 두 과정을 지속적으로 거쳐야 한다. (55쪽)



백과사전이든, 어학사전이든, 온라인에 자리잡은 위키백과이든 사전 편찬자 혹은 편집자는 수집벽, 정리벽이 남달라야 한다. 그래야 지독히도 틀에 박힌 지겨운 일을 괴롭게 느끼지 않고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배를 엮다]라는 소설이나 [행복한 사전]이라는 영화는 말로만 스토리를 전해 들은 것이 있는데 기회 되면 찾아봐야 겠다. 이 이야기를 해준 사람도 부러움 섞인 감정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취미로 시작한 수집·정리가 직업으로까지 발전한 저자 역시 마찬가지 감정을 내비친다.


2014년 사전 편찬자의 일생을 다룬 영화 [행복한 사전]이 개봉해서 소소한 호응을 얻었다. 오다기리 조(小田切讓)와 마츠다 류헤이(松田龍平)라는 인기 남자 배우들이 주연을 맡은 영화였지만, 한국에서의 성적은 중간 정도였던 것 같다.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인 [배를 엮다(舟を編む)](2011) 역시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다.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번역되자마자 사서 읽었는데, 나에게 흥미로웠던 것은 어떻게 이런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을까 싶은 일본의 문화였다. (73쪽)



종이사전은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정체기를 맞게 있다. 우리의 사정이 훨씬 심하지만 영어권이나 다른 언어권도 처한 환경은 비슷할 것이다. 또한 컴퓨터의 발달이 사전 편찬 과정에 큰 변화를 끼친 것도 사실이다. 지금도 사전 편찬자의 축적된 지식이 사전 편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겠지만 ‘감’에 크게 의존하던 전통적인 방식에 비해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실증적으로 작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말뭉치 언어학의 발전은 컴퓨터 성능의 발전에 의존한다. 1961년 ‘브라운 말뭉치(Brown Corpus)’가 만들어졌을 때는 100만 어절 규모였고, 책으로 출간이 가능한 수준이었다.…이제 누구도 말뭉치를 인쇄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지금은 사실상 구글이 색인한 인터넷의 모든 페이지가 일종의 말뭉치 역할을 하고 있다. 언어의 샘플을 다루는 수준이 아니라 언어 자체를 다루는 수준으로 가고 있다.

또 하나 사전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집단지성이다. 인터넷 발달 이후 여러 사람이 하나의 문서를 공동으로 작업할 수 있는 ‘위키위키’를 기반으로 한 ‘위키백과(Wikipedia)’가 등장했다. 위키백과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영어 위키백과는 이미 500만 표제어를 넘어섰다. (82~83쪽)



인터넷의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구글이 이번에도 등장한다. [빅데이터 인문학(Uncharted)]이 소개한 구글의 엔그램 뷰어 이야기다. [빅데이터 인문학]을 보면 엔그램 뷰어로 사전에 등재된 단어들의 ‘자격’을 점검해보는 대목이 나온다. 사전에 ‘신생어’가 얼마나 시의 적절하게 반영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결과는 영 신통치 못한 것으로 나왔다. 컴퓨터의 도움을 받으면 이런 격차가 줄어들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명성은 언급 빈도로도 알아볼 수 있다. 명성이라는 말 자체가 이름이 언급된다는 의미다. 구글 엔그램 뷰어(Google Ngram Viewer)는 디지털화한 수백만 권의 책에서 특정 단어의 사용 빈도를 살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즉 특정 인물이 책에서 얼마나 많이 언급되었는가를 측정할 수 있다. 이것을 이용하면 히틀러가 처칠이나 스탈린에 비해 얼마나 많이 언급되었는지 비교가 가능하다. 이를 절대적으로 믿을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무엇을 먼저 살펴볼 것인가를 정할 때 유의미한 자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155쪽)



스스로 수집광, 정리광임을 인정하는 저자는 일찌감치 인터넷 서비스 회사에 자리를 잡고 검색과 사전을 기획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지금의 상태가 계속될 때 초래될 위험을 강조한다. 일상에서 인터넷으로 키워드를 검색하고 사전을 활용하는 것은 좋은데 그렇다고 ‘진지하게’ 사전을 만드는 일을 게을리 한다면-이미 상당히 게을러져 있는 상태다-지식의 밑동이 허약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나 사전 만들기 역시 고도의 지식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면 언젠가는 사전을 만드는 법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국가의 공적인 책임을 강조한다. 충분히 명분이 있는 주장이다. 국가가 게임산업을 육성한다고 수십억, 수백억씩 정책자금을 풀어온 마당에 전국민적 공공재인 사전을 만들기 위한 기본적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적극 나서야 한다.


그런데 국가만 나서면 그것으로 족한가? 저자는 네이버를 거쳐 현재는 다음에서 근무하고 있다는데 나는 거대 포털이 할 수 있는 일들도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한다. 사용자들의 검색 기록, 사용자들이 스스로 올리는 컨텐츠를 요구하는 연구자들은 아마도 지금도 무척 많을 것이다. 그런데 네이버와 다음은 이들에게 얼마나 문호를 개방하고 있는지 스스로 질문해야 할 것이다.


어학사전에는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다. 정규화된 말뭉치를 계속 만들어나가야 이후 어떤 사전이든 쓸 만한 것을 만들 수 있다. 좋은 말뭉치 없이 좋은 사전을 만들기란 21세기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한국어 말뭉치는 믿고 사용할 만한 것이 없다. 이는 말뭉치라는 사회저 인프라를 개별 작업자들이 따로 만들기 때문이다. 한국어세계화재단이 진행했던 21세기 세종 계획 말뭉치, 연세대학교 말뭉치, 고려대학교 말뭉치가 있지만 모두 각자 따로 진행한다. 즉 규모의 경제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왜 함께 만들어질 수 없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 어떤 이유도 대규모 말뭉치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당위를 깨지는 못한다. 현재 상황에서는 국가가 말뭉치를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을 전면 개방하여 개인이나 대학이 그에 기초해 사전 작업을 진행할 수 있게 해야 한다. (234~235쪽)



검색, 사전을 삼키다 - 10점
정철 지음/사계절


Posted by 까만주름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