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젊은 세대의 절망과 분노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는 '헬조선'이라는 단어를 올 한해 한국 사회를 상징하는 단어의 하나로 꼽았다.(헬조선의 사회학)
김호기 교수의 탄식이 아니더라도 한국 사회의 청년문제의 심각성은 정치적 성향과 부의 많고 적음을 떠나 한국인 모두가 우려하고 근심하는 문제가 된 지 오래이다.
청년문제 못지 않게 노인문제 역시 그 심각성이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그런데 정년연장에 따른 임금피크제 도입과 해고요건 완화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정부측 '노동개혁'안에서 보듯 청년문제와 노인문제는 서로 맞닿아 있다. 경제 성장이 둔화되고 일자리가 줄면서 청년세대와 노인세대가 서로 경쟁하는 모양새가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치의 권위적 배분'(데이비드 이스턴) 과정이어야 할 한국의 정치는 오히려 이런 구도를 악용하고 있다. 세대간 대립을 부각시키고 부추기는 쪽으로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김경집 선생의 '고장난 저울'과 강준만 선생의 '청년이여, 정당으로 쳐들어가라!'는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인데, 앞서 말한 한국의 고장난 정치, 오히려 갈등을 조장하는 정치, 그리고 그것의 해악에 대한 깊은 우려를 내놓는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와 정치인에 대해 침을 뱉는 것은 이들이 책을 쓴 목적이 아니다.
현상을 타개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이 각각 제시하는 대안이 주목한 지점과 접근하는 결은 다르다. 그러나 큰 틀에선 같은 방향을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사회 현상 또는 문제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하게 된다. 문제의 해결 역시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단칼에 이뤄질 수 없다는 생각도.
(낙산사 대웅전 앞 연못의 연꽃)
■정치의 중요성
우리는 정치혐오가 나쁘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정치인들에겐 매우 좋은 것이다. 정치혐오 덕분에 유력한 경쟁자의 수가 크게 줄어들기 대문이다. 사회 각 분야에서 크게 성공한 사람들에게 “정치는 절대 하지 마!”라는 말이 애정 어린 덕담으로 건네지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면 정치혐오는 정치인들의 기득권을 보호해주는 철벽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강준만,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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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저들을 뽑았는가? 바로 우리다. “모든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는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의 말을 곱씹어야 한다. 정치는 정치인들만의 몫이 아니다. 정치는 우리의 삶의 방식을 결정한다. 숨 쉬는 것조차 정치적이라는 말은 우리갯소리가 아니다. 어찌 하여 지금의 힘든 삶이 정치 때문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현실을 짚어보며 더 나은 미래로의 명확한 의제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 정치이고, 그것은 우리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시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김경집, 9쪽)
정신의학자이며 정신과 교수인 뉴욕대의 제임스 길리건(James Gilligan)은 자살률과 살인률에 대한 통계를 분석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자살률과 살인률을 살펴보았더니 그 등락의 리듬이 비슷했던 것이다. 그 까닭이 궁금했던 길리건 교수는 마침내 그 변화의 주기가 정권의 교체와 비슷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점을 알아냈다. 그는 이 두 가지가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 의아했다. 그는 보수정당, 즉 공화당 출신이 대통령이 될 때마다 자살과 살인의 비율이 크게 증가한다는 통계를 분석하여 ‘치명적 전염성 폭력’ 증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연구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100년 동안 어느 정당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자살과 살인의 비율이 달라지는 까닭을 찾았다.
(…)
길리건은 불평등과 폭력을 키우는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야마로 공화당이 이기는 데 도움을 준다는 모순된 구조를 밝혀냈다. 범죄가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면 미국인은 인권과 복지를 중시하는 진보적 정책을 비난하고 보수 성향의 후보로 돌아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똑같은 논리가 반복된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종북’이니 하는 신 매카시즘의 형태로 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퇴행적이다. 문제는 저소득층에게 복지 혜택을 ‘거저 주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품는 건 부자들인데, 왜 가난한 사람들까지 거기에 편승하는가 하는 물음이 길리건의 의문이다. 길리건에 따르면 공화당은 중상류층과 중하류층이 최하류층을 미워하게 만드는 ‘분할 정복’ 전략을 발판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피해를 보는 장노년층, 시골의 농부들과 어부들, 쪼들린 살림살이에 전전긍긍하는 대부분의 가정주부, 무엇보다 가장 절망을 체감하는 청년들까지 무기력해지고 보수화되는(건강한 의미의 보수가 아니라 체념과 순응의 보수) 현실을 볼 때, 우리 사회가 불의와 탐욕, 민주주의의 퇴행과 비인격화의 자행을 그저 빤히 바라만 보면서 내 일만 아니면 된다는 자포자기의 상황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게 된다. (김경집, 50~55쪽)
■노인정치와 청년정치
고려대학교 교수 김동원은 일본 정치를 “노인을 위한, 노인에 의한, 노인의 정치”로 규정한다. 이른바 ‘제론토크라시(gerontocracy)’라는 것이다. gerontocracy는 그리스어로 ‘old man(노인)’을 뜻하는 geron과 ‘rule(지배)’를 뜻하는 cracy의 합성어다. ‘노인 지배 사회’ 또는 ‘노인 정치’를 비판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권력 상층부가 노인들에 의해 구성되는 경향은 공산주의국가, 종교적인 신정국가 등에서 두드러지지만, 오늘날엔 일반적인 국가에서도 고령화로 인해 제론토크라시가 나타나기도 한다.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김회승은 “일찌감치 고령화가 진행된 나라들은 대부분 ‘노인 정치’의 명암을 경험했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인 지배 사회는 보수화되고 성장성과 역동성은 떨어진다. 노령층은 과대 대표되고 청년층의 발언권은 위축된다. 반면, 노인들의 실질적인 삶의 질은 노인 정책보다는 분배 구조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우리나라 베이비붐 세대는 이제 막 60대에 진입했다. 노령연금과 정년연장, 국민연금 등 노인 정책 이슈가 하나둘 불거지는 이유다. 제론토크라시의 시작이다.” (강준만, 46~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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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과, 풍요 그리고 창조의 혜택을 누린 이 독특한 세대는 그런 점에서 새로운 노인상을 세울 의무와 권리, 능력이 있는 세대들이다. 새로운 실버 세대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이력과도 어울린다.
세시봉 세대의 역할은 전환기에서 더욱 빛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듯이, 이제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손을 떼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능력도 있고 체력도 남아 있다. 그 능력을 무의미하게 무기력하게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된다. 이들마저 무기력하게 꼰대 노인으로 굳어지면 앞으로 나이 들어가는 세대는 이전과 비슷한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나이 들어간다고 체제에 순응하거나, 체념하거나, 욕하면서 결국은 포기하는 것은 적어도 청바지를 입고 자유를 만끽하며 저항했던 세대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본격적은 노령화 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실버의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이 세시봉 세대가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노년 세대 문제에 대한 관심과 실질적 정책이 필요하다. 상황이 이런데도 노년 세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거나 삶의 재교육과 재설계 중심의 정책을 세우지 않는 건, 그들을 견고하고 퇴행적인 계층으로 굳어지게 해서 보수의 표를 공고하게 하려는 정치적 저의가 아니고는 설명할 게 없다. (김경집, 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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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청년들이 정당으로 쳐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누군가의 빠가되기 위해 정당으로 쳐들어간다면 그건 단호히 반대하련다. 그건 참여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계파 간 싸움의 행동대원으로 전락해 정치판을 온통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대중의 정치혐오를 극에 이르도록 만들 게 뻔하기 때문이다. (강준만, 10쪽)
그러나 이제 그러지 말자. “뱀의 지혜와 비둘기의 순진성”으로 전진해보자. 청년들이 정당으로 쳐들어가야 한다는 말은 지금 당장 정당원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현단계에선 정치를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탈출구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러면 나머지 일은 저절로 풀린다. 슬랙티비즘이나 ‘약한 연결의 힘’에 기대를 걸고, 생활정치를 전업으로 할 대표 선수들에게 작은 관심과 지원을 보내주는 행동이 뒤따를 것이다.
청년유니온이나 민달팽이 모델의 전국적 확산이 필요하다. 아니 청년들이 그런 관심과 지원을 조금만 보내준다면 저절로 확산이 될 것이다.
(…)
정당으로 쳐들어가기 위한 전 단계로 우선 투표소로 쳐들어가자. ‘종이 짱돌(paper stone)’을 들자는 말이다. 그간 청년들은 투표 행위가 주는 이득보다 투표를 하기 위한 비용이 크다는 생각으로 투표를 포기하는 이른바 ‘합리적 무시(rational ignorance)’를 해왔지만, 이제 그걸 합리적 무시로 보긴 어려울 것 같다. 매우 불합리한, 자학에 가까운 무시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강준만, 200~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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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시봉 세대의 자각과 단절(기존의 노인을 바라보는 시선과의 단절이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새로운 연결(새로운 노인 세대의 출현과 기존 노인 세대의 이어짐이라는 의미에서)이 더 나아가 노인정당의 창당으로까지 이어지기를 희망한다. 노인정당이라는 말에 의구심을 갖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살아오며 겪은 경험과 지식은 중요한 자산이다. 다만 그것이 과거에 묶여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
대한민국이 곧 맞게 될 ‘고령사회’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단순히 노인을 부담스러운 대상이거나 자신들의 정치적 뒷배로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자산이며 잔존 에너지를 무의미하게 소진하지 않는 생산적 계층이라는 새로운 틀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의 정치적 자각은 매우 중요하다.
(…)
다만 이름은 정당을 표방했지만 단 한 사람도 출마하지는 않는 게 좋다. 정당은 정권 획득을 목적으로 모인 정치적 집단이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진정성을 이해서도 그렇고 노인들이 정치를 이끄는 것도 좋지 않다. (김경집, 174~176쪽)
■혁명은 안단테로
솔 알린스키(Saul Alinsky, 1909~1972)의 정신을 실천해보겠다고 나선 정치인이 있다니, 정말 반갑다. 알린스키는 누구인가? 미국의 도시 빈민 운동가이자 커뮤니티 조직운동가인 알린스키는 1960년대 운동권 학생들의 영웅이었지만, 일부 학생 행동주의자(student activists), 특히 신좌파(New Left) 지도자들과는 불편한 관계였다. 신좌파가 혁명 의욕에 너무 충만한 나머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니라 ‘자기들이 원하는 세상’ 중심으로 운동을 전개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알린스키는 학생 행동주의자들의 진정성마저 의심했다. 물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회를 바꾸는데에 관심이 없다. 아직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일, 자신을 발견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 존재증명(revelation)일 뿐 혁명(revolution)이 아니다.”
한국의 진보를 두고 한 말 같다. 진보는 보수와의 관계에서 “나는 보수가 아니다”라는 걸 드러내는 자기 존재증명에 정치적 역량을 탕진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이 즐겨 쓰는 ‘정체성’이니 ‘선명성’이니 하는 말이 바로 그런 자기 존재증명의 슬로건이다. (강준만, 82~83쪽)
그 어떤 해법을 찾건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단칼에 모든 걸 해결해보겠다는 성급한 한탕주의다. 그건 갈등의 폭발만 가져올 뿐 바람직한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올바른 방향이지 과격한 속도가 아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모순이 상식으로 통용되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분노와 증오가 아니다. 미국의 신학자이자 정치학자인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 1892~1971)가 강조한 “뱀의 지혜와 비둘기의 순진성”이다. “빛의 자녀는 어둠의 자녀가 갖고 있는 지혜를 갖추어야 하지만 그들의 사악함과는 무관하여야 한다. 빛의 자녀는 인간사회의 이기심의 힘을 알아야 하지만 그것에 도덕적 정당성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공동체를 위해서 이기심-개인적, 집단적 이기심-을 속이고 이용하고 억제하기 위해 그러한 지혜를 가져야만 한다.”
물론 지금 청년들은 “뱀의 지혜와 비둘기의 순진성”과는 거리가 멀다. 멀어도 너무 멀다. 사적 차원에선 ‘뱀의 지혜’를 가지려고 애쓰지만, 공적 차원에선 ‘비둘기의 순진성’만 갖고 있을 뿐이다. (강준만, 197~1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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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전히 정당한 기득권과 사악한 기득권을 구분하고 분리하지 못하고 있다. 기득권은 유럽에서 근대의 초석을 마련한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다. 사전적 의미로 기득권이란 ‘특정한 자연인 또는 법인이 정당한 절차를 밟아 이미 법규에 의하여 얻은 권리’를 말한다. 그것은 어떠한 권력이나 권위도 침탈할 수 없는 중요한 권리다. 자유로운 개인의 토대는 이러한 기득권의 보호에서 비롯된다. 근대 이전에는 그것이 제대로 보호되지 않았다. 전제왕권과 영주의 횡포에 속수무책이었으나 근대에 들어서 자유로운 개인이 발아되고 투쟁을 통해 그 권리를 획득했다.
정당한 기득권은 어떠한 경우에도 보장되어야 한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철칙이다. 그러나 그것의 힘은 부패한 기득권과의 분리에서 온다. 흔히 기득권이라고 하면 부정적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는 건 그만큼 우리 사회의 기득권이 부정적 수단과 방법으로 흭득한 것이 많다는 의미다. 그런 부정적 인식으로 기득권을 비판하게 되면 건전하고 정당한 기득권까지 반발하게 된다. 이런 식의 비판과 접근 때문에 기득권 비판은 부패한 기득권에게 철퇴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 전체를 똘똘 뭉치게 해 반발 세력만 키워놓은 셈이 되었다. 정당한 기득권층도 부패한 기득권 세력의 실체를 안다. 그리고 그들 때문에 자신들까지 덤터기 쓰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굳이 그들을 배제하지 않은 것은 만에 하나 자신들이 공격을 당하면 부패한 기득권 세력이 전열의 맨 앞에 서서 저항함으로써 결국에는 자신들을 보호하게 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정당한 기득권과 부패하고 부정한 기득권을 분리하는 것이다. (김경집, 144~145쪽)
고장난 저울 - 김경집 지음/더숲 |
청년이여, 정당으로 쳐들어가라! - 강준만 지음/인물과사상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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