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책동네 산책을 작년 4월부터 썼는데,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돌아가신 분이 세번째로 주제로 올랐다. 다들 책을 무지하게 좋아했던 분들이어서 피해갈 수 없었다.

리영희 선생하고는 이런저런 개인적 인연이 좀 있다. 신입기자 시절 국제부에서 근무했는데 아프간전에 관한 기사를 보고 리 선생께서 칭찬하는 메시지를 보내온 적이 있다. 감열지 팩스를 이용하던 시절이었는데 손수 칭찬하는 메세지를 써서 문화부 팩스로 보내셨다. 문화부 선배가 기념으로 갖고 있으라며 주셔서 고이 보관했는데 얼마전 보니 오래되서 그런지 글씨가 지워져 버렸다. 감열지는 오래 놔두면 그렇게 되나보다.

선생을 직접 뵐 기회도 있었다. 2003년 가을 즈음 선생 댁으로 찾아갈 일이 있었다. 당시 경향신문이 연재중이던 '실록 민주화운동'의 한꼭지가 <전환시대의 논리>에 관한 것이었는데 자료사진을 구하려 찾아뵌 것이었다. <역정>을 들고가서 사인을 부탁했더니 거짓말 안보태고 정말로 입이 귀에 걸리시는 모습이었다. "아니 이거. 아직도 이 책이 나오나?"라면서 뇌졸중 때문에 불편한 팔로 사인을 해주셨다.

출판계 주변을 얼쩡거린지 1년8개월. 이래저래 낯을 익힌 분들이 적지 않다. 그중엔 소주잔을 기울이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눈 분들도 적지 않은데 ‘정식’ 인사를 드리지도 못하게 출입처를 옮기게 됐다. 좋아서 기자라는 직업을 하고 있지만 몇번 겪었어도 이럴 땐 난감하고 당황스럽다. 격주마다 쥐어짰던 책동네 산책도 이쯤에서 마무리 해야 한다. 다음주쯤 2010 송년 지면에 고별 칼럼을 쓸 수 있을진 모르겠다. 이 블로그에 출판계 분들이 알음알음으로 들어와 보신 것으로 안다. 그간 내가 쏟아낸 주제 넘은 소리들을 귀엽게 봐 주셔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책동네 산책]리영희처럼 읽고 생각하기



리영희 선생이 돌아가셨다. ‘1970년대 젊은이들의 사상적 은사’ 또는 ‘의식화의 원흉’이 그에게 상투적으로 따라붙었던 수식어다. 정반대의 뉘앙스이지만 이런 수식어는 대체로 그가 쓰고 말한 것들에서 유래한다. 기자로서, 학자로서, 저술가로서 선생은 참 많은 글을 썼다. 그래서 우리는 선생이 남긴 글들만 생각하기 쉽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글을 쓰기 위해 그가 누구보다 많은 것을 읽고, 궁리했다는 사실은 잊기 쉽다는 것이다.


선생은 환갑을 몇 년 앞둔 88년 <역정>(창비)이라는 자전적 에세이집을 출간했는데 오래전 읽는 이 책에서 내가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모두 ‘읽기’에 대한 선생의 집념에 관한 것이다. 한국전쟁이 나던 시절 선생은 안동공립중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근무중이었다. 선생은 집에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고 있다가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언제인가 징역을 살 때는 학창시절에 하다 만 프랑스어 공부도 할 겸 가족에게 <레 미제라블> 원서를 넣어달라고 해서 읽었다는 대목도 나온다.

내가 기자가 된 것은 그가 현직기자에서 물러난 지 30년 가까이 흐른 뒤이지만 ‘기자 리영희’가 남긴 전설은 여전히 언론계에 남아 있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통일원 자료실’ 얘기일 것이다. 지금도 완전히 자유로운 편은 아니지만 과거엔 기자 또는 학자라고 해도 북한 또는 공산권에서 나온 자료에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느 북한 관련 연구자가 통일원 자료실을 자주 이용했는데 자기가 열람하는 자료마다 ‘리영희’란 사람이 앞서 열람했다는 기록이 있기에 유심히 봤더니 거의 모든 자료의 열람카드에 리영희라는 이름이 써 있었다고 한다. <리영희 평전>(책보세)을 쓴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은 자신이 그간 쓴 현대사 인물에 관한 10여권의 평전을 선생이 모두 꼼꼼히 읽고 잘못된 부분까지 지적한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이런 에피소드들은 글을 쓰거나 말하기에 앞서 ‘팩트(fact)’부터 챙기는 선생의 습성을 보여준다. 선생의 평론집 <스핑크스의 코>(까치)에는 ‘한국의 젊은 여성들은 바쁘다’란 제목의 칼럼이 실려 있다. 96년에 쓴 글인데 젊은 여성들이 소비주의에 휘둘리는 세태를 꼬집는 내용이다. 선생은 그 해 겨울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가죽부츠가 크게 유행한다는 얘기를 매스컴에서 들었다는 말로 글을 시작했다. 결혼식 참석차 명동에 나간 김에 가죽부츠의 인기가 실제로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기 위해 길 한쪽에 서서 지나가는 여성 20명의 구두를 살폈다고 했다. 그 결과 8명이 가죽장화를 신었더라면서 40%라는 수치를 도출한다. 이처럼 세태를 풍자하기 위한 글에서조차 선생은 근거를 제시하고 싶어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쳤기에 선생의 글들은 차분한 분석적 논조를 유지할 수 있었고, 웅변보다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었다. 시사평론집은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오래됐다는 인상을 받기 쉬운데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두레), <스핑크스의 코>처럼 십수년 전 나온 선생의 평론집은 지금 읽어도 시의성이 느껴지는 글들이 많다. 우리가 선생에게서 ‘리영희처럼 쓰기’뿐 아니라 ‘리영희처럼 읽기’와 ‘리영희처럼 생각하기’도 배워야 하는 이유이다. (2010.12.11)

Posted by 까만주름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애기엄마 2010.12.15 11: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많이 읽는다는 거 정말 힘들지요. 애기엄마의 경우 동화책은 많이 읽지만요^^ 문화부를 떠나신다니 안타깝네요. 정치부에서도 화이팅하시길 바랍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출판계 사람들은 프라이드가 강하고, 솔직한 사람들이다. 상업출판으로 밥을 벌어 먹고 살면서도 가슴 속 깊은 곳엔 책에 관한 '그' 또는 '그녀'만의 강한 이데아를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 상업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에서 대체로 굴복하고 말지만 그들의 속깊은 고민까지 무시할 순 없다. 그런 이들이 가장 아파할 곳을 직업 물어보거나 이처럼 글로써 비판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한편으론 '싸잡아 비판'이라는 우려가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개개의 출판사가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로 한 선택들은 의도치 않더라도 하나의 흐름으로 만들어진다. 그게 내 눈에 들어왔다. 하버드를 주제로 한 글을 쓰려다보니 여러해 전에 읽었던 책 한권이 떠올랐다. 정작 글을 쓸때는 찾아볼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엊그제 집을 치우다보니 어느 책 꾸머리에선가 발견이 돼 반가웠다.

7년전 나온 책인데 에티오피아에서 신동 소리를 듣던 소녀가 하버드에 진학했지만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기숙사 동료를 살해하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는 내용이다. 사건 발생을 앞세우고 앞서의 궤적을 추적해 나가는 방식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하버드 맛 책' 보다는 '하버드 책'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미완의 천국, 하버드 - 10점
멜라니 선스트롬 지음, 김영완 옮김/이크

내가 아는 선배 한분은 10년 전쯤 쓴 박사학위 논문의 제목이 <조선인민군의 정치적 역할과 한계>, 부제가 ‘김정일 시대의 당군관계를 중심으로’였다.

정말이지 더할 나위 없이 ‘논문스러운’ 제목을 달고 있던 이 논문이 단행본으로 나오면서 제목이 바뀌었다. 이름하여 <북한 군부는 왜 쿠데타를 하지 않나>. 부제는 ‘김정일 시대 선군정치와 군부의 정치적 역할’이었다. 여전히 딱딱한 느낌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건 소재 자체의 특성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조선인민군의 정치적 역할과 한계’를 보고 ‘북한 군부는 왜 쿠데타를 하지 않나’를 생각해낸다는 건 보통의 내공으론 기대하기 어렵다.

내 선배의 경우는 논문이 단행본으로 만들어지면서 일어난 일이지만, 책이든 영화든 외국에서 만들어진 창작물이 국내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제목이 바뀌는 것은 다반사다. 원제목이 원작자의 의도를 가장 잘 담고 있다고 하겠지만 문화와 관심사가 다를 수밖에 없는 다른 나라, 다른 언어로 옮아갈 땐 변화가 불가피할 수도 있다. 그래서 원작의 이름과 번역된 제목을 비교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예를 들어 프랑스 감독 장 뤼크 고다르가 찍어 고전이 된 영화 <네 멋대로 해라>의 원제목은 ‘숨막힘’이라고 한다. 아마 일본에서 처음 붙였겠지만 ‘네 멋대로 해라’라는 제목은 호평을 받았다. 독일 감독 빔 벤더스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는 원제목이 ‘베를린의 하늘’이었고, 영어로는 ‘욕망의 날개’였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면 언어권이 바뀌면서 생긴 제목의 차이가 흥미롭게 다가올 것이다.

물론, 제목 바꾸기가 좋은 결과만 낳는 것은 아니다.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약빠른 계산이 너무 심해 원제목은 코끼리 코를 만지고 있는데 번역서 제목은 코끼리 엉덩이를 만지고 있는 경우가 쉽게 발견된다. 얼마전 방한한 영국의 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자신의 저서 <이성, 신념, 그리고 혁명>(Reason, Faith, and Revolution)이 한국에 번역되면서 <신을 옹호하다>란 제목이 붙은 것에 대해 “이렇게 희화화한 제목으로는 책의 논지가 제대로 받아들여질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인문서로서는 10년 만에 처음 종합 베스트셀러에 오른 <정의란 무엇인가>의 성공원인을 두고 갑론을박 하지만 쉽게 의견이 일치되는 부분이 있다.

이 책의 표지에 ‘하버드대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란 카피가 올라있거니와, ‘하버드’가 한국에서 가지는 이미지와 권위가 긍정적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그것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요사이 나온 신간 가운데 유독 ‘하버드’란 단어가 제목 또는 부제에서 발견되는 빈도가 높아진 것 말이다. 예상했던 대로 원제목이나 부제 어디에서도 ‘Harvard’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기’라고 단정하긴 애매하다. 저자나 책 내용에서 어떤 식으로든 하버드와의 연줄은 발견되니까.

이처럼 난감할 땐 식음료 제품명에 관한 규제가 떠오른다. 예를 들어 주스 이름에 ‘사과’를 쓰고자 한다면 원료의 몇퍼센트 이상 사과 주스 원액이 들어가야 한다. 원액은 얼마 넣지 않고 인공 향신료로 사과맛을 낸다면? 그럴 땐 ‘사과 맛 주스’라고 해야 한다. 같은 기준을 요즘 하버드를 키워드로 달고 나오는 책들에 적용한다면 ‘하버드 책’이 더 많을까, ‘하버드 맛 책’이 더 많을까. (2010.9.11)



Posted by 까만주름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