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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텔레비전과 담을 쌓고 사는 나에게도 귀에 익숙한 걸 보면 매우 유명한 게 분명한 ‘씨엘’의 아빠 이기진 교수가 쓰고 그린 [20 UP 투애니업]을 읽었다. 밝은 노란색 표지에 예쁜 일러스트가 곁들여진 이 책은 ‘시엘 아빠, 이기진 교수의 일러스트 에세이/청춘을 건너는 5가지 기술’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책을 만든 사람들이 읽기를 희망하는 대상을 ‘청년’으로 명시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 아들내미에게 해줄 공부와 꿈, 사랑, 인생, 행복에 대한 근사한 조언에 관한 아이디어를 좀 얻을 수 있으려나’하는 편한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힘을 빼고 ‘쿨’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저자의 모습은 내게 큰 울림을 안겨주었다. 이 책은 ‘청춘’을 겨냥하고 만들어진 것은 맞지만 중년의 남성에게도 색다른 ‘충격’을 안겨준다.

 한살, 한살 나이를 먹다 보니 어느새 사람들이 ‘중년’이라고 부르는 나이가 됐다. 마음 속에 그려지는 나의 모습은 여전히 어수룩한 실수투성이이지만 사회적으로 요구받는 나의 모습은 매우 노련하고 뭔가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지만 뭔가에 대해 나름의 ‘개똥철학’을 설파할라치면 상대로부터 ‘저 아저씨 뭐래?’라는 눈총이 돌아오곤 한다.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시기라고는 하지만 중년은 이래저래 매우 어정쩡한 시기라는 것을 알게됐다.

 왜 그럴까? 왜 이렇게 무기력하면서도 짜증이 나는걸까 궁금하곤 했는데 [20 UP 투애니업]은 이 문제에 대한 힌트를 담고 있었다. 사람은 먹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니고 살기 위해서 먹는 것도 아니다. 사람에게는 생존이라는 일차적 목표 외에도 다양한 삶의 목표가 있고, 먹는다는 행위는 신체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기능 외에도 맛있는 음식을 먹는 데에서 오는 쾌락을 충족시키는 기능도 한다. 인간은 ‘호모 라보란스(노동하는 인간)’인 동시에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인 것이다.

 [20 UP 투애니업]의 저자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는 이런 모습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공부를 직업으로 하는 교수로서 연구를 하고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로봇 캐릭터를 만든다. 재미난 책을 잡으면 밤을 세우고, 방학이 되면 여행을 간다. 한때 와이너리를 차릴까 고민했을 정도라고 하니 ‘마시는 것’에 대해서도 상당한 취미를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스스로 ‘딴짓박사’를 자처하는 이기진 교수의 딴짓 리스트는 이 밖에도 어마어마 하다. 그는 초등학교 때는 야구에 미쳤고,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는 축구에 미쳤고, 대학 때는 농구에 미쳤으며, 대학원 시절엔 자전거에 미쳤다고 했다. 지금도 자건거를 탄다고 한다. 각종 ‘취향’과 ‘취미’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거기에다 쿨함과 유머러스함까지 겸비했다. “공부의 신도 두려워하는 게 있을까요?”라는 학생의 질문에 “그럼, 옆 반 공부의 신!”이라고 답하는 콩트를 날린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중년이 되어가면서 내가 느꼈던 어정쩡함, 무기력함의 상당 부분은 나의 ‘몰취향’과 ‘무취미’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일’을 빼고는 ‘유일’한 오락거리가 술마시기이고 틈이 났을 때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이 ‘낮잠자기’이며, ‘뭘 먹을까?’ ‘뭘 볼까?’ ‘어디 갈까?’라는 상대의 질문에 ‘아무거나’라는 공통의 답변으로 일관하는 나. 가끔 주말에 산이나 한강변을 걷는 ‘원초적 활동’을 하는 것이 그나마 취미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20 UP 투애니업]을 보면서 오랜만에 부럽다는 느낌을 가져봤다. 나보다 나이가 한참 위인 이가 이처럼 다양한 ‘딴짓’을 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다채롭게 꾸며가고 있는데 나는 뭐하고 있나라는 부끄러움도 들었다. 하지만 “나도 오늘부터 ‘취행’과 ‘취미’를 가질거야”라고 결심한다 한들 없던 취향이 어디서 갑자기 뚝 떨어질 리는 없을 것이다.

 이기진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개성 있는 사람을 흠모하고 따라 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해서 지금 당장 자신의 개성 찾기에 도전해 보자. 그리고 여러 번에 걸친 시행착오를 통해 오롯한 자신만의 개성을 만들어 가는 즐거움을 누려 보자. 그 끝에는 원하던 꿈에한 걸음 다가가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이 중년에게도 해당된다고 믿고 싶다.

 코드를 다 까먹어버린 기타를 잡아볼까? 아님 대학 시절 미쳐 살았던 전통 타악기? 책상 앞에 장식처럼 꽂아 놓기만 한 일러스트 그리기 책을 펼쳐봐?

 음~. 일단은 오늘 저녁 막걸리를 한잔 하면서 생각해봐야겠다.


20 up 투애니업 - 10점
이기진 글.그림/김영사on


Posted by 까만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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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아하자 2016.07.05 22: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저도 좋아하는 가수님이 있어서~ ㅎㅎㅎ 독서랑 음악을 좋아하는 1인입니다. 인생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고 진짜 불행한 사람은 돈못버는 사람이 아니라 인생이 즐겁지 않은 사람이죠~



올 봄 치러진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대결은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사람들은 인공지능의 능력이 이토록 높은 단계에 와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인간 중에서 가장 바둑을 잘 둔다는 이세돌 9단을 기계가 저토록 손쉽게 이길 수 있다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도 기계가 훨씬 더 잘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닌가라는 두려움을 갖게 됐다. 그간 수많은 공상과학(SF) 소설과 만화, 영화에서 '인간 대 기계'의 대결이 그려지고, 인간이 기계의 지배를 받거나 기계에 의해 멸종되는 어두운 시나리오가 상상됐음에도 자신감을 잃지 않았던 인류는 어쩌면 처음으로 기계에 의한 지배 또는 기계에 의한 멸종을 진지하게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일지 모른다.


인류 가운데 가장 뛰어난 천재들이 매달려서 만들고 있는 인공지능은 지금 맹렬한 속도로 발달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당연한 일처럼 보이지만 기계에게 지능을 부여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유명론'과 실재론(실념론)'이라는 서양 철학의 오랜 전통과 맞닿아 있다는 점은 흥미로웠다.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것에 대한 논의는 정말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적어도 2500년 동안 인류가 고민해온 문제죠. 철학에서는 이것을 보편성 문제(universals)라고 합니다.…어떻게 인간은 강아지라는 아주 보편적인 개념을 가질 수 있을까요? 철학에서는 이 보편성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두 가지 파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유명론(nominalism)이고 또 하나는 실념론(realism)입니다. (39~40쪽)



저자의 설명으로 유추하자면 기계에 지능을 부여하기 위한 과거의 노력은 실재론에서 출발했다. 개와 고양이의 정의, 즉 개와 고양이의 '이데아'를 기계에게 가르쳐서 다양한 형태의 개와 고양이를 기계가 인식하고 구분할 수 있도록 가르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실패했다. 인간 스스로가 이런 식으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뇌는 정보를 획득하는 방법이 컴퓨터와 완전히 다릅니다. 뇌가 두개골 속에 있기 때문이죠. 컴퓨터는 정보를 가감 없이 입력합니다. 매개체를 거치지 않죠. 뇌는 사실 현실을 알 수가 없습니다. 세상을 직접 보지 못하니까요. 뇌는 눈, 코, 귀 등 오감을 통해서 들어오는 정보를 패턴화하여 저장하고 그것을 해석합니다. (93~94쪽)


서양철학 2500년의 프로젝트를 떠올려봅시다. 그 프로젝트의 핵심은 세상을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은 거잖아요. 기호와 규칙. 무슨 이야기냐 하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뿐만 아니고 내 머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100퍼센트 표현할 수 있는 기호들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입니다.…‘내 머리 안에서 이런 일들을 기호와 규칙으로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면 사람하고 똑같은 지능을 만들어낼 수 있겠구나’라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했죠.…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시도를 해도 설명으로는 기계가 세상을 인식하지 못하는데 사람은 분명히 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강아지와 고양이를 구별하는 걸 배웠을까?’를 먼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따라서 우리는 현실이라는 우주에서 가장 큰 빅데이터를 통해 경험하고 학습하여 지능을 얻은 것 같습니다.…이제 사람들은 뇌가 세상을 인식하는 과정을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들이 20세기에 들어와 밝혀지기 시작했습니다. (115~117쪽)



20세기 뇌과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인간이 어떻게 인식하는지 밝혀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알파고로 인해 유명해진 '딥러닝' 방식이 인공지능 연구에 도입됐다.



우선 딥러닝은 더 이상 인간이 기계에게 세상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관한 엄청나게 많은 데이터를 그냥 집어넣어주는 겁니다. 빅데이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겠지요. 기계는 이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자체 인공신경망 구조를 통해 스스로 학습합니다. 무엇을 학습할까요? 이 데이터에 포함된 통계학적인 정보에 대해 점점 더 압축된 표현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학습이라고 말합니다. (126쪽)



기술의 발달이 어떤 질적인 변화로 이어지는 순간인 '특이점'이 그리 멀지 않았다고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알파고의 가공할 지능을 보면서 인류가 느꼈던 전율과 두려움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인공지능의 발달에 따른 특이점이 언제 어떻게 올 지 인류가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기술이 발전하는 과정 중 늘 걱정해야 할 부분은, 기술은 어느 한순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시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특이점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특이점은 나중에 알 수 있어요. 대체로 직선 형태로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특이점은 미래의 일이기 때문에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죠. 우리는 과거로 미래를 예측하다 보니 현상태에서는 선형으로 증가한다고 예상하는 것이 더 일반적입니다.…인공지능 기반의 기술이 분명 특이점을 만들 것인데, 이 시점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확실한 것은 200년 후가 아니라 10~30년 남짓 남았다는 거죠.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일상을 즐기던 칠면조들처럼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지는 않나요? (270~272쪽)


실리콘밸리 사람들이 간과하는 점은, 과거의 산업혁명이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은 인류가 19세기에 엄청난 노력을 했기 때문에 결국에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인류는 세 가지 혁신적인 노력을 했습니다. 첫째로는 프랑스에서 공교육이란 것을 시작했습니다.…둘째로 독일에서 사회보장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보험제도지요. 셋째로 영국에서 세금제도가 생겼습니다.…이 세 가지 제도로 19세기 1, 2차 산업혁명은 잘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닥칠 산업혁명은 지금도 벌어지고 있고, 향후 20~30년 후에도 벌어질 일이지만 인류는 아직 아무 준비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핵심적인 문제가 아닐까요? (291~292쪽)



저자는 인공지능을 연산력과 지능이 뛰어나지만 자유의지를 갖고 있지 않은 '약한 인공지능'과 사람처럼 자유의지, 즉 정신을 갖고 있는 '강한 인공지능'을 구분한다. 그리고 전자는 기정사실이 됐지만 후자가 가능한지는 아직 모른다고 말한다. 약한 인공지능 만으로도 인류 사회는 커다란 변화를 겪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만약 강한 인공지능이 등장한다면 인류는 정말로 살아남기 위한 걱정을 해야 한다. '터미네이터'가 더이상 SF 속의 이야기만은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강한 인공지능은 현재로선 SF입니다. 가능하다는 증거도 없고 불가능하단 증거도 없습니다. (318쪽)


강한 인공지능을 이야기할 때 이 두 사람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티븐 호킹과 엘론 머스크. 스티븐 호킹은 인공지능이 생기면 인류가 멸망한다고 이야기했고, 엘론 머스크는 핵폭탄보다 더 위험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말하는 인공지능은 강한 인공지능입니다.…강한 인공지능이 생겼을 때 인류에게 주는 영향을 시뮬레이션을 해봤습니다. 다양한 시나리오로 시뮬레이션했어요. 구글이 만든 답, 정부가 만든 답, NGO가 정말 조심스럽게 만든 답. 모든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해보니 결론이 항상 똑같습니다. 약간 시간적인 차이가 있지만 강한 인공지능의 모든 끝이 인류멸망입니다. (319~320쪽)


그렇다면 강한 인공지능이 현실화 됐을 때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이 책의 마지막에 던져진 아래의 질문은 정말 섬찟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지금 있는 그 모든 시나리오를 봤을 때 강한 인공지능이 생기는 순간 인류는 가장 큰 적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엘론 머스크와 스티븐 호킹이 말하는 인류멸망이죠. 카네기멜론대학의 앤드루 무어(Andrew Moore) 교수는 이렇게 이야기한 적도 있습니다. ‘강한 인공지능이 등장하면 인류는 멸망한다. 근데 그게 왜 나쁜가? 인류가 멸망하는 것이 왜 나쁜지 한번 설명해봐라’라고 말이죠. (338쪽)


강한 인공지능은 어차피 다 SF입니다. 하지만 약한 인공지능은 100퍼센트 실현됩니다. 앞으로 닥칠 미래가 있는데 인간이 이미 기계 같은 삶을 살고 있다면, 기계한테 100퍼센트 집니다. 결국 우리가 기계에게 이기기 위해서는 인간다운 삶을 살아야겠죠. 다시 말해, 내가 하는 일이 이미 기계 같다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가진 유일한 희망은 ‘우리는 기계와 다르다’입니다. 그 차별화된 인간다움을 가지고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350쪽)



김대식의 인간 vs 기계 - 10점
김대식 지음/동아시아


Posted by 까만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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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아하자 2016.06.16 21: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장 개발자인 저는 먹고살 걱정을 해야... ㅡㅡ; 프론트엔드 개발도 가까운 미래에 기계가 다 할수있을 거 같거든요.

    • 까만주름 2016.06.17 09: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게요. 이 책에도 그 내용이 나오더라고요. 아무리 코딩을 잘하는 사람이더라도 몇백줄에 한번씩은 실수를 하기 마련인데 기계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니까요. ㅠㅠ




이태 전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출근해 점심을 먹을 때 빠르게 바뀌고 있는 우리 장례 문화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한 선배가 “내가 신문사 들어오고 얼마 안됐을 때 매장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몇십년 뒤 전국이 산소로 변할 것이라는 기획기사를 쓴 적이 있는데 그런 우려가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화장문화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각 민족의 문화에서 가장 느리게 바뀌는 것 가운데 하나가 장례문화라고 하는데 한세대 안에 장례문화가 급속하게 바뀌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어디 장례문화뿐이랴. 인터넷과 디지털의 등장은 수십, 수백년 간 존재하던 것들의 모습을 재빠르게 변화시키고 있다. 자가용마다 뒷자석 한자리를 차지하던 ‘운전용 도로교통지도’는 사라진지 오래이며, ‘종이사전’은 아직 서점에서 한 코너를 차지하고 있지만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이제 지도와 사전은 컴퓨터로, 휴대전화로 언제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는 물건이 됐다. 그런데 종이로, 책으로 묶여 있던 사전이 단순히 인터넷이라는 매체로 모습을 바꾼 것에 불과할까? 아니기 때문에 이 책이 나왔을 것이다.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은 1755년 [영어 사전(A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을 펴내 근대적인 어학 사전의 개념이 확립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펴낸 [영어 사전]에서 ‘사전편찬자’(lexicographer)를 ‘사전의 작가, 무해하고 틀에 박힌 지겨운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여러 사람이 틀에 박힌 지겨운 일을 해야 사전 한권이 나올 수 있다.


[검색, 사전을 삼키다]의 저자는 사전을 이렇게 정의한다.


사전은 ‘지식에 대한 지식’을 정리한 책이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지식에 대한 개념을 서술한 책이다. (54쪽)


용어 정의는 건조해야 한다. 더 이상 뺄 단어가 없을 때까지, 더 이상 추가할 단어가 없을 때까지 고민해서 정의를 내려야 한다. 그렇게 건조시킨 용어는 하나의 벽돌이 된다. 이 벽돌을 어떻게 쌓아서 지식과 학문으로 만드느냐는 그 다음 단계다. 일단 벽돌 자체가 견고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분석과 건조화라는 두 과정을 지속적으로 거쳐야 한다. (55쪽)



백과사전이든, 어학사전이든, 온라인에 자리잡은 위키백과이든 사전 편찬자 혹은 편집자는 수집벽, 정리벽이 남달라야 한다. 그래야 지독히도 틀에 박힌 지겨운 일을 괴롭게 느끼지 않고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배를 엮다]라는 소설이나 [행복한 사전]이라는 영화는 말로만 스토리를 전해 들은 것이 있는데 기회 되면 찾아봐야 겠다. 이 이야기를 해준 사람도 부러움 섞인 감정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취미로 시작한 수집·정리가 직업으로까지 발전한 저자 역시 마찬가지 감정을 내비친다.


2014년 사전 편찬자의 일생을 다룬 영화 [행복한 사전]이 개봉해서 소소한 호응을 얻었다. 오다기리 조(小田切讓)와 마츠다 류헤이(松田龍平)라는 인기 남자 배우들이 주연을 맡은 영화였지만, 한국에서의 성적은 중간 정도였던 것 같다.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인 [배를 엮다(舟を編む)](2011) 역시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다.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번역되자마자 사서 읽었는데, 나에게 흥미로웠던 것은 어떻게 이런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을까 싶은 일본의 문화였다. (73쪽)



종이사전은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정체기를 맞게 있다. 우리의 사정이 훨씬 심하지만 영어권이나 다른 언어권도 처한 환경은 비슷할 것이다. 또한 컴퓨터의 발달이 사전 편찬 과정에 큰 변화를 끼친 것도 사실이다. 지금도 사전 편찬자의 축적된 지식이 사전 편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겠지만 ‘감’에 크게 의존하던 전통적인 방식에 비해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실증적으로 작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말뭉치 언어학의 발전은 컴퓨터 성능의 발전에 의존한다. 1961년 ‘브라운 말뭉치(Brown Corpus)’가 만들어졌을 때는 100만 어절 규모였고, 책으로 출간이 가능한 수준이었다.…이제 누구도 말뭉치를 인쇄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지금은 사실상 구글이 색인한 인터넷의 모든 페이지가 일종의 말뭉치 역할을 하고 있다. 언어의 샘플을 다루는 수준이 아니라 언어 자체를 다루는 수준으로 가고 있다.

또 하나 사전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집단지성이다. 인터넷 발달 이후 여러 사람이 하나의 문서를 공동으로 작업할 수 있는 ‘위키위키’를 기반으로 한 ‘위키백과(Wikipedia)’가 등장했다. 위키백과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영어 위키백과는 이미 500만 표제어를 넘어섰다. (82~83쪽)



인터넷의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구글이 이번에도 등장한다. [빅데이터 인문학(Uncharted)]이 소개한 구글의 엔그램 뷰어 이야기다. [빅데이터 인문학]을 보면 엔그램 뷰어로 사전에 등재된 단어들의 ‘자격’을 점검해보는 대목이 나온다. 사전에 ‘신생어’가 얼마나 시의 적절하게 반영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결과는 영 신통치 못한 것으로 나왔다. 컴퓨터의 도움을 받으면 이런 격차가 줄어들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명성은 언급 빈도로도 알아볼 수 있다. 명성이라는 말 자체가 이름이 언급된다는 의미다. 구글 엔그램 뷰어(Google Ngram Viewer)는 디지털화한 수백만 권의 책에서 특정 단어의 사용 빈도를 살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즉 특정 인물이 책에서 얼마나 많이 언급되었는가를 측정할 수 있다. 이것을 이용하면 히틀러가 처칠이나 스탈린에 비해 얼마나 많이 언급되었는지 비교가 가능하다. 이를 절대적으로 믿을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무엇을 먼저 살펴볼 것인가를 정할 때 유의미한 자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155쪽)



스스로 수집광, 정리광임을 인정하는 저자는 일찌감치 인터넷 서비스 회사에 자리를 잡고 검색과 사전을 기획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지금의 상태가 계속될 때 초래될 위험을 강조한다. 일상에서 인터넷으로 키워드를 검색하고 사전을 활용하는 것은 좋은데 그렇다고 ‘진지하게’ 사전을 만드는 일을 게을리 한다면-이미 상당히 게을러져 있는 상태다-지식의 밑동이 허약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나 사전 만들기 역시 고도의 지식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면 언젠가는 사전을 만드는 법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국가의 공적인 책임을 강조한다. 충분히 명분이 있는 주장이다. 국가가 게임산업을 육성한다고 수십억, 수백억씩 정책자금을 풀어온 마당에 전국민적 공공재인 사전을 만들기 위한 기본적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적극 나서야 한다.


그런데 국가만 나서면 그것으로 족한가? 저자는 네이버를 거쳐 현재는 다음에서 근무하고 있다는데 나는 거대 포털이 할 수 있는 일들도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한다. 사용자들의 검색 기록, 사용자들이 스스로 올리는 컨텐츠를 요구하는 연구자들은 아마도 지금도 무척 많을 것이다. 그런데 네이버와 다음은 이들에게 얼마나 문호를 개방하고 있는지 스스로 질문해야 할 것이다.


어학사전에는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다. 정규화된 말뭉치를 계속 만들어나가야 이후 어떤 사전이든 쓸 만한 것을 만들 수 있다. 좋은 말뭉치 없이 좋은 사전을 만들기란 21세기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한국어 말뭉치는 믿고 사용할 만한 것이 없다. 이는 말뭉치라는 사회저 인프라를 개별 작업자들이 따로 만들기 때문이다. 한국어세계화재단이 진행했던 21세기 세종 계획 말뭉치, 연세대학교 말뭉치, 고려대학교 말뭉치가 있지만 모두 각자 따로 진행한다. 즉 규모의 경제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왜 함께 만들어질 수 없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 어떤 이유도 대규모 말뭉치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당위를 깨지는 못한다. 현재 상황에서는 국가가 말뭉치를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을 전면 개방하여 개인이나 대학이 그에 기초해 사전 작업을 진행할 수 있게 해야 한다. (234~235쪽)



검색, 사전을 삼키다 - 10점
정철 지음/사계절


Posted by 까만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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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알랭 드 보통) 


반쯤은 실용적 필요에 의해 읽은 책. 번역서 제목인 [뉴스의 시대: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보다는 원서 제목인 [The News: A User‘s Manual]이 좀 더 잘 들어맞는 것 같다. '홍수'라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뉴스가 넘쳐나는 시대. 뉴스와 언론사, 기자의 속성에 대해 알랭 드 보통은 꿰뚫고 있다. 매체들은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지만 그 경쟁의 이유와 목표, 결과가 아주 임의적이고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딴판의 결과를 낳기도 한다. 나 자신이 뉴스매체에 근무하지만 한발 떨어져서 생각해볼만한 거리를 많이 안겨준다.






 우리가 뉴스와 얽힌 정도에 비하면 안타깝게도 많은 언론기관 내부에는 공정하고 중립적인 ‘사실’ 보도가 가장 품격 있는 저널리즘이라는 편견이 광범하게 퍼져 있다. 이를테면 CNN의 슬로건은 ‘여러분께 사실을 제공합니다’이다.…이 ‘사실’이 지닌 문제는 오늘날 신뢰할 만한 사실 보도를 찾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정작 문제는 우리가 더 많은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접한 그 사실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는 데 있다.…

 사실의 정반대에 있는 것은 편향이다. 진지한 저널리즘의 영역에서 편향은 무척 악명이 높다. 그것은 악의적인 의제, 거짓말, 대중의 자유로운 의사결정권을 부정하는 권위주의적 시도와 동의어다.

 하지만 우리는 어쩌면 편향에 대해 좀더 관대해져야 할지도 모른다. 순수한 의미에서 편향은 사건을 평가하는 방법을 뜻할 뿐이다.…오히려 우리의 임무는 편향된 시각이 생산한 더 믿을 만하고 유익한 뉴스에 올라타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32~33쪽) 



 시각예술에서, 원근감을 갖는다는 것은 서로 다른 사물들을 실제의 공간적 관계 속에서 볼 줄 아는 능력이 있음을 의미한다. 떨어져 있는 건 멀고 작게, 가까이 있는 건 가깝고 크게, 화가들이 캔버스에 원근감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건 놀라우리만치 어렵다. 이는 이 기술이 우리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똑같이 지난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를 뉴스에 적용해보면, 원근감을 갖는다는 것은 지금 누가 봐도 분명 충격적인 사건을 역사 전체에 걸쳐 인류가 겪은 경험과 비교하는 능력과 연결된다. 이 사건이 사실상 어느 정도의 관심과 우려를 요하는지 헤아리기 위해서 말이다.

 마음속에 원근감을 갖고 있으면, 우리는 (뉴스가 암시하는 바와 정반대로) 어떤 것도 전적으로 새로운 게 아니며, 아주 일부의 사건만이 진실로 놀라운 것이고, 정말로 무시무시한 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이내 깨닫게 된다. (59~60쪽)



 뉴스의 가장 고귀한 약속은 무지를 줄이고 편견을 극복하게 하여 개인과 국가의 지성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몇몇 분야에서 뉴스는 이따금 정반대로, 우리를 완전히 바보로 만든다고 비난받아왔다. 이 문제를 놓고 언론에 대해 가장 강경한 비난을 퍼부었던 이들 가운데 19세기의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있다.…플로베르의 눈에 신문은 사람을 심하게 오염시키는 것이어서, 그는 오로지 완전한 문맹자와 무지렁이 프랑스인들만이 주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보았다. (79~80쪽)



 헤드라인 밑에서 자신만만하고 냉정하게 자신의 중요성을 내뿜고 있긴 해도, 우리가 읽는 기사들은 천사들의 비밀회의 후 나온 초자연적인 칙령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전망 좋은 사무실에서 머핀과 커피를 앞에 놓고 골치 아픈 회의를 해가며 그럴싸하게 기가 목록을 만들고자 분투하는, 보통은 다소 피곤에 절고 압박에 시달리는 편집자 집단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기사 제목은 현실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이라기보다는, 우리와 똑같이 편견, 실수, 미혹에 시달리는 필멸의 존재인 편집자들이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라는 질문에 맨 처음 떠올린 생각을 통해 정해진다. 우리 종족에게 날마다 닥칠 수억 건의 잠재적 사건들의 웅덩이 속에서 솟아오른 어림짐작 말이다. (85~86쪽)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해외 뉴스는 예술의 몇 가지 기교들을 기꺼이 채택해야 한다. 조지 엘리엇이 말했듯, 매체로서의 예술은 “경험을 증폭하고, 우리의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넘어서는 동료 인간들과의 접촉을 확장하도록” 우리를 도울 수 있다. 엘리엇에 따르면 그로 인한 가장 큰 이점은 ‘공감 능력의 확장’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는 지금 이러한 공감 능력을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엘리엇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쓴다. “일반화와 통계에 근거한 호소는 기성품 같은 공감을 요구한다. (…) 하지만 이를테면 위대한 예술가가 그려내는 인간의 삶은, 심지어 하찮고 이기적인 인간들조차도 그들과는 별개의 문제였던 것, 즉 도덕적 감성의 원재료라 부를 수 있는 것과 마주하고 주목하게 만든다.”

 간단히 말해, 이것이 해외 뉴스의 임무가 되어야 한다: 우리와 ‘별개의 문제인 것에 주목하도록’ 애씀으로써 우리와 다른 나라의 국민들이 서로의 만남을 상상하고 실질적인 원조를 하며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다. (102쪽)



 모든 위대한 뉴스 사진은 이와 비슷하게 현실에 대해 우리가 갖는 불완전하고 편견에 찬 이미지를 질적으로 바꿔놓는다.…

 나는 전쟁이 어쨌든 좋은 게 아니고, 때로 무고한 사람들이 십자포화 속에서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외교적 시도도 가려서는 안 된다고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또한 피로 물든 아들 앞에서 통곡하는 아버지가 생기지 않도록 전쟁을 피할 수만 있다면 중대한 전략적 이점 같은 건 포기해도 상관없다고 얼마나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나는 내가 세상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지금껏 셀 수 없이 많은 사진을 보고 수많은 출판물을 읽었음에도 우리 행성 위에 존재하는 나라들 대부분에 대한 내 심상이 기껏해야 하나 정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135~138쪽)



 우리를 침묵시키는 건 경제의 규모만은 아니다. 그것이 가진 복잡성도 우리를 입다물게 할 수 있다. 선진 경제지역 인구의 극소수만이 자신들이 속한 경제 체제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151쪽)



역사적으로 현대 뉴스 매체는 자본주의의 은행, 중개업, 증권거래소 관련 시장 정보의 필요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발전해왔다. 19세기 중반 영국과 미국 사이에 해저 케이블을 놓는 데는 금융업자들과 언론사들(그중 하나가 로이터다)이 공동으로 자본금을 댔다. 얼음처럼 차가운 대서양의 깊은 곳으로 케이블을 타고 내려간 당시의 뉴스 기사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품고 있었다. ‘구아노(guano·열대지방의 해안이나 섬에 많은, 바닷새의 배설물 덩어리)의 수요는 상승할 것인가 하강할 것인가?’ ‘리옹에서 벌어진 견직공들의 파업은 면화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맥아에 세금을 부과하면 세수가 얼마나 늘어날 것인가?’ ‘수입 규제가 철폐되면 옥수수 가격은 어떻게 될 것인가?’ (163쪽)



셀러브리티를 보다 생산적으로 활용하려는 탐색을 위해서는 뉴스의 지독한 결점 하나를 뜯어고쳐야 한다. 셀러브리티 인터뷰 말이다. 현재 이 장르는 대개 개인 신상 폭로나 ‘새로운 계획’에 대한 두서 없는 질문에 고정돼 있는데, 미래의 인터뷰는 다른 무엇보다 ‘우리가 이 유명한 사람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어야 한다. 셀러브리티가 어느 분야에서 활동하는 상관없다. 교훈은 전이 가능하고 미덕은 활동 영역을 가로질러 영향을 끼친다. (189~190쪽)




뉴스가 전하는 음산한 이야기들은 이런 해골의 현대판으로 사용될 수 있다. 우리가 추호의 의심도 없이 이런 이야기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도록 ‘바니타스’(Vanitas: 허무, 덧없음, 헛됨 등을 의미하는 라틴어. 17세기 유럽에서는 ‘바니타스 정물화’라는 양식이 유행했는데, 이 그림들은 해골, 촛불, 모래시계 등을 사용하여 인생의 덧없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라는 제목 아래 기사가 놓이게 된다면 어떨까. 그러면 그 기사들은 그저 개인적인 고통을 기록하는 데서 멈추는 대신, 우리로 하여금 훨씬 더 중요한 일을 하도록 독려할 것이다. (234쪽)



 우리는 전례없이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인류는 매년 3만 편의 영화와 200만 권의 책, 10만 장의 음반을 생산해내며, 9500만 명이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는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이 문화의 왕국에서도 언론사는 우리가 어떤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그 판단력을 형성하는 데 핵심적이고 특권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우리를 우리 시대 최고의 예술작품으로 향하게 하기 위해 창조성의 급류를 꼼꼼히 살펴 추려내는 것이 문화 저널리즘의 임무다. 문화 저널리즘은 그야말로 예술과 향유자 사이의 만족스러운 혼인을 성사시키는 사명을 띠고 있다.(268쪽)



 모든 뉴스를 (30쪽짜리 신문과 30분짜리 방송을 통해) 한꺼번에 소비하던 시절이 있었다. 뉴스를 공급할 책임을 진 매체들이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믿던 때가 있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배웠다. 이제 우리는 뉴스의 공급량이 거의 무한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 날마다 엑사바이트급의 이미지들과 기사들이 생산되고 있다는 사실과, 신문과 방송이란 실은 압박에 시달리는 기자가 ‘평균적인 독자’라고 추정되는 사람들이 가진 욕망을 추측하면서 무한한 데이터의 바다에서 날마다 임으로 뽑아낸 한줌의 정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277쪽)



 그 규모와 편재성으로 인해, 현대의 뉴스는 우리의 독립적인 사고 능력을 말살시킬 수 있다. (286~287쪽)



뉴스의 시대 - 10점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문학동네





Posted by 까만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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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입김이 호호 나오지만 너무 춥지 않고, 눈이 내렸지만 건조해서 바람이 불 때 마른 나뭇가지에서 '타닥타닥'하는 소리가 들리는 아침과 같은 청명한 느낌을 주는 책을 만났다. 미국 시인 메리 올리버의 산문집 <휘파람 부는 사람>이다. 이 시인이 자연과 사물을 대하는 자세가, 한글자 한글자가 깊은 울림을 준다. 



휘파람 부는 사람 - 10점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마음산책

 


자연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우리가 자연을 사랑하는 자세는 올바른가. 이명박 정부 초대 환경부 장관으로 지명됐다 낙마한 박은경씨 같은 경우 땅투기 의혹이 제기되자 "자연의 일부인 땅을 사랑한다"라는 어록을 남기면서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자연을 유용, 확용의 대상으로 대하는 게 사실이다. 또한 우리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예찬할 때 껍데기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대하는 자세, 그리고 개악이든 개선이든 변화되어 버려서 돌아오지도 못한 '원시자연'을 동경하지 않는 자세에 대한 시인의 담담한 서술은 어떤 강령(manifesto) 보다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다.


에세이 '겨울의 순간들' 중에서


2

  나는 자연에 대해 쓰거나 언급할 때 이런 생각들을 갖고 있다. 우선 나는 자연을 장식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아무리 아름다운 물결무늬가 들어가 있고 아무리 빛이 난다고 해도 말이다. 그리고 자연에 인간을 위한 유용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그런 잣대는 자연이 지닌 고유한 가치를 감소시키고 박탈한다. 또, 나는 자연을 재해, 경치, 휴가, 오락으로 보지도 않는다. 나는 풍경에서 휴식과 기쁨을 얻기보다는(물론 그런 걸 얻긴 하지만) 세상을 하나의 신비로 보는 시각과(이런 시각은 자신의 특권뿐 아니라 다른 존재들의 특권까지도 존중하게 만든다) 그 신비를 보호하거나 약화시키는 옳고 그른 행위들에 대한 인식을 높인다.

  자연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집 지붕 아래를 걷듯 나뭇잎 아래를 걷지 않는 사람은 불완전하고 상처 입은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의 몰인정함과 무관심으로 야생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마찬가지다. 자연은 앞으로도 늘 존재할 것이지만 지금 우리의 자연과는 다를 것이며 하물며 우리의 어릴 적 추억 속에 있는 무성한 숲과 들과는 더 다를 것이다. 반 고흐와 윌리엄 터너, 윈슬러 호머, 워즈워스, 프로스트, 제퍼스, 휘트먼의 세상은 가버렸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아직 우리는 제정신을 찾고 세상을 구할 수 있지만 본디 자연을 되찾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배울 나이가 되었을 때 다른 대부분의 아이들처럼 지식의 습득을 지향했다. 여기서 지식은 생각들보다는 입증된 사실들을 의미한다. 내가 아는 교육은 이미 성립된 그런 확실성들의 수집이었다.

  지식은 내게 즐거움을 주고 나를 기워줬지만 결국 나를 실망시켰다. 나는 여전히 허기를 느낀다. 내 삶의 가장 진지한 질문을 던지면서 나는 이성을, 증명 가능한 것을 지나쳐 다른 방향들을 보기 시작했다. 이제 나의 관심을 끌 만한 가치를 지닌 주제는 하나뿐이며 그건 세상의 정신적 측면에 대한 인식과 그 인식 내에서 나 자신의 정신적 상태다. 그렇다고 꼭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정신성은 신학적인 것이 아니라 자세다. 그러한 관심은 사실을 담은 최고의 책보다도 더 나를 살찌운다. 지금 내 마음속에서는 입증된 사실들과 입증되진 않았지만 강렬한 직관들이 겨루면 사실들이 진다.

  그래서 나는 단지 실내를 피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안쪽으로(실험실로, 교과서로, 지식으로) 통하는 문 자체를 보지도 않는 일종의 자연시를 쓸 것이다. 올빼미, 지렁이도마뱀, 수선화, 붉은점도롱뇽에 대해 육체뿐 아니라 나만큼 예민한 신경과 나보다 뛰어난 용기를 지녔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제멋대로인 정신과 잠에서 깨지 않은 마음에 위안과 신호, 필요하다면 경고가 되어줄 찬양시를 쓸 것이다.

  우리 개개인과 다른 모든 것 사이엔 끊어질 수 없는 무수한 연결고리가 존재하고 우리의 존엄성과 기회들은 하나다. 머나먼 하늘의 별과 우리 발치의 진흙은 한 가족이다. 어느 한 가지나 몇 가지만을 찬양하고 끝내는 건 품위나 분별 있는 일이 아니다. 소나무, 표범, 플랫강, 그리고 우리 자신, 이 모두가 함께 위험에 처해 있거나 지속 가능한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우리 모두는 서로의 운명이다.



이처럼 진지한 자세로 자연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에 세들어 사는 집 계단 구석에 자리잡은 거미가 들어온다. 암컷 거미가 낳은 알주머니에서 나온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새끼 거미들을 보면서 작가가 느낀 희열이 다사롭게 전해진다.


에세이 '기절' 중에서


거미의 기이한 삶을 지켜보며 내가 느꼈던 의문들은 책을 찾아보면 해결될 것이고 그런 지식을 제공하는 책은 많다. 하지만 지식의 궁전은 발견의 궁전과 다르며 나는 발견의 궁전의 진정한 코페르티쿠스다.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 그 이상이다! 나는 그걸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



바닷가를 산책하다 거북이가 모래밭을 파고 알을 낳는 것을 본 작가는 얼마 뒤 다시 그곳을 찾아가 모래를 파헤친 다음 얼만큼의 거북이 알을 가져다 스트램블을 해먹으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뿐이다. 


에세이 '거북이 자매' 중에서


식욕, 내 식욕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이런 사실으 인정한다. 그것은 생각이 떠오르는 속도보다더 빠르게 나타나고 추방해버릴 수가 없으며 고삐로 묶어둘 수는 있되 간신히 그럴 수 있을 뿐이다. (중략) 나는 식욕이 신 가운데 하나라는 걸 안다. 거칠고 야만적인 얼굴을 지니긴 했지만 그대로 신이다.

  테야르 드샤르댕(프랑스 예수회 신부이자 고생물학자, 지질학자)은 어딘가에서 말하기를, 인간이 처한 가장 괴로운 정신적 딜레마는 음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그것은 불가피하게 고통과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누가 그 말에 동의하지 않겠는가.



시 '휘파람 부는 사람'


  갑자기 그녀가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어. 내가 갑자기라고 말하는 건 그녀가 30년 넘게 휘파람을 불지 않았기 때문이지. 짜릿한 일이었어. 난 처음엔, 집에 모르는 사람이 들어왔나 했어. 난 위층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그녀는 아래층에 있었지. 잡힌 게 아니라 스스로 날아든 새, 야생의 생기 넘치는 그 새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지저귀고 미끄러지고 돌아오고 희롱하고 솟구치는 소리였어.


  이윽고 내가 말했어. 당신이야? 당신이 휘파람 부는 거야? 응, 그녀가 대답했어. 나 아주 옛날에는 휘파람을 불었지. 지금 보니 아직 불 수 있었어. 그녀는 휘파람의 리듬에 맞추어 집 안을 돌아다녔어.


  나는 그녀를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해. 그렇게 생각했어. 팔굼치며 발목이며. 기분이며 욕망이며. 고통이며 장난기며. 분노까지도. 헌신까지도.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알기 시작하긴 한 걸까? 내가 30년간 함께 살아온 이 사람은 누굴까?


  이 맑고 알 수 없고 사랑스러운, 휘파람 부는 사람은?



(시인의 모습인데 아~주 오래 전에 찍은 것 같다. 시인은 1935년생이므로 올해 80세이다.)

Posted by 까만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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