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했던 대로' 며칠새 기온이 급속히 내려갔다. 이 정도 챙겨 입었으니 되겠지 싶어 밖에 나가면 서늘한 기운이 바짓가랑이 사이로, 겨드랑이로 비집고 들어온다.
10월의 마지막 날이었는지도 모르고 잠들었다 깨어보니 11월의 첫날이다. 성급한 사람들은 벌써부터 송년인사를 건네고, '해 넘기기 전에 얼굴 한번 보자'는 사람들도 나오겠지.
남아있는 올해는 두달. 바늘 허리에 실 묶어 못쓴다고 올해 허둥지둥 일거리는 많았는데 아직 절반도 다 못마친 것 같다. 남은 기간에라도 최대한 숙제에 매달릴 수 밖에.
우연히 손에 들어온 책은 두께는 가벼운데 하필이면 갑작스레 서늘해진 날씨가 더욱 섬득하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아버지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스트인 지은이는 TED 강연에서 자신의 사연을 담담하게 전했다. 그리 길지 않은 강연을 갈무리 한 것이라 스피디하게 읽히기는 하는데 제법 '쿨'하게 말하지만 말그대로 신산할 수 밖에 없었던 지은이의 삶이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테러리스트의 아들 - 잭 이브라힘.제프 자일스 지음, 노승영 옮김/문학동네 |
사람을 죽일 정도의 증오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누군가에게 배워야 생겨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아니, 그냥 가르침을 받아서도 아니고 강제로 세뇌되어야 한다. 이것은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증오가 저절로 생긴다는 건 거짓이다. 비빌 언덕이 없는 사람들에게, 대안적 세계관을 거부당한 사람들에게 거듭 되뇌는 거짓말이다. 우리 아버지가 믿은 거짓말, 내게 전해주려 했던 거짓말이다. (25쪽)
내가 일곱 살이었을 때, 아버지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범죄로 수감되면서 내 삶은 엉망이 되었다. 하지만 또한 그 덕분에 나의 삶이 가능해졌다. 감옥에서는 내게 증오를 주입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아버지가 악마 취급했던 온갖 사람들을 내가 만나면서 그들이 인간임을, 내가 사랑할 수 있고 나를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임을 깨닫는 것을 그는 막을 수 없었다. 편견은 경험을 이길 수 없다. 내 몸이 거부했다. (28쪽)
학교 복도를 걷는데 어린애들이 한 아이의 가방을 가지고 뺏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이는 울고 있었다. 나는 가방을 낚아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잠깐 동안 만족감이 밀려들었다. 강자의 편에 서면 쾌감이 느껴지는 법이니까. 하지만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의 불쌍한 얼굴을 보자 안쓰러웠다. 아이의 표정은 두려움 반 당혹감 반이었다. 나는 가방을 쓰레기통에서 꺼내 돌려주었다. 아무도 나를 앉혀놓고 공감이 무엇인지, 왜 공감이 권력이나 애국심이나 신앙보다 중요한지 알려준 적 없었다. 하지만 복도에서 나는 깨달았다. 내가 당한 짓을 남들에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100쪽)
공감, 평화, 비폭력. 이것은 내 아버지가 창조하려 한 끔찍한 세상에서는 기이한 도구일 것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 비폭력으로 분쟁을 해결한다고 해서 반드시 수동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가 되거나 가해자를 방관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싸움을 포기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적을 인간으로 대하고, 나와 그들이 공유하는 욕구와 두려움을 인식하고, 복수보다는 화해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간디의 명언을 되새길 때마다 단호하고 강경한 그 어조에 점점 더 끌린다. "내가 목숨을 바칠 대의는 많지만, 남의 목숨을 빼앗을 대의는 하나도 없다." 맞으면 받아치고 더 세게 받아치는 것이 아무리 우리의 본성이라 해도, 폭력의 증대가 적대 행위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일 수는 없다. 세상을 떠난 카운터컬처 역사가 시어도어 로잭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일주일 동안 비폭력을 시도하고는, 이게 '통하지 않으면' 폭력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폭력은 수세기 동안 통하지 않았다." (123~124쪽)
(비구름에 휩싸인 하이델베르그성, 2009년10월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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