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영화와 드라마에서 차용한 것이 분명한 [MD본색: 은밀하게 위대하게]라는 제목은 경쾌하다. 그러나 책에 담긴 내용은 무겁고 어둡기만 하다. 한반도 주변에서 돌아가는 MD라는 톱니바퀴에 발목이 끼어 종아리, 무릎, 허벅지까지 차례로 끼어들어가는 한반도의 형국이 폭로되고 있어서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4대 열강이 각축하는' 한반도에서 외교와 안보는 사활이 걸린 사안이다. 북한과의 군사적 대치 상황은 언제든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달을 수 있다. 위기의 만성화 때문일까, 잠시나마 열렸던 남과 북 사이의 화해와 대화 무드 때문일까, 우리는 이런 위기에 종종 둔감하다. 그러나 우리가 눈을 감고 있는 이 순간에도 각자의 이익과 논리를 앞세운 열강의 각축은 치열하다.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의 피습사건으로 사드(THAAD) 논란이 갑작스럽게 돌출했으나, 사실 사드라는 '부분'을 포함하는 미국의 미사일방어(MD)계획은 동북아 외교안보의 치열한 쟁점으로 부상한지 오래다. MD논란은 탈냉전과 함께 부상한 최근으로 것으로 오인되기 쉽지만 논쟁의 핵심 구조는 미소냉전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냉전기간의 평화를 지탱했던 논리가 상호확증파괴(MAD) 전략이었다. '핵무기를 사용하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다'는 확신이 미소 양측에 있었고, 이로 인한 공포심이 핵전쟁으로부터 인류를 보호했다. 그런데 상호확증파괴는 어느 한쪽이 절대적 핵전력 우위, 즉 절대안보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약속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약속이 바로 ABM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단순히 말해 상대방으로부터 날아오는 탄도미사일 방어망을 구축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미소 양국이 서로의 약점을 방치함으로써 공포에 의한 균형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였다.
MD는 이런 약점을 없애고 상대방의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완벽한 방어막을 구축하는 것이 목표다. 그런데 이게 왜 문제가 될까? 생각해보자.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되는 무기를 지닌 A와 B가 서로 대치하고 있다. 그런데 A가 B의 공격을 막아낼 완벽한 방어막을 구축했다. B의 입장에선 자신이 가진 무기가 무력해졌다는 뜻이 된다. B로서는 A가 언제든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공격할 수 있게 됐다고 두려워할 것이다. 당연히 B는 A의 방어막을 뚫기 위한 새로운 무기 개발에 나서게 된다. B의 무기가 더 위력적이게 되면 A는 방어막을 더 정교하게 만들려고 할 것이다. 이처럼 핑퐁처럼 무한 반복되는 상황을 바로 '군비경쟁'이라고 한다.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가는 무한 군비경쟁은 막대한 이익을 올릴 군수업체와 이들로부터 뇌물 또는 로비를 받을 정치인 빼고는 비효율만 낳을 뿐이다.
그래도 북한 미사일 방어라는 혜택이 있지 않느냐고? 최대 속도가 초속 5킬로미터(시속이나 분속이 아니다!)에 달하는 탄도마시일을 미사일이나 레이저로 맞춘다는 MD가 과연 현실에서 유용한 무기체계인지에 대해선 미국 내에서도 숱한 논란에 휩싸여 있다는 것만 지적하고자 한다.
외교 특히 안보 분야는 어려운 영문 약자가 난무하고, '전략적 안정' 또는 '전략적 모호성', '억지' 등 한글 용어도 일반인이 접근하기는 쉽지 않다. 해당 사안을 쉽게 풀어 전해야 하는 것이 기자들의 기본적인 임무인데, 이런 것들을 다 풀어서 쓰려면 원고량이 너무 길어져서 정작 전해야 할 주제를 심도 있게 건드리지 못한다.
저자는 1990년대 후반부터 외교안보 사안을 단순한 '운동' 차원으로만 접근하는게 아니라 나름의 분석과 자료에 입각해 실증적인 평화운동을 하고 있다. 이 책은 사드와 MD가 왜 국내에서 논란이 되고 있고, 중국이 MD의 한국 배치를 왜 그토록 반대하고 있으며, MD를 한반도에 배치하려는 미국의 의도는 무엇인지, 그리고 MD가 한반도에 배치되면 안되는지에 대한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는 입장은 'MD와 북핵의 적대적 동반성장'이라는 용어에 압축돼 있다.
북핵은 미국의 MD 집착이 만들어낸 괴물이다.
MD는 21세기 유라시아의 철의 장막이 되고 있다.
MD와 북핵은 적대적 동반성장을 하고 있다.
MD와 북핵의 악연을 끊어내지 않는 한, 평화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MD와 북핵의 악연은 끊어낼 수 있다.
이 책의 요지를 다섯 문장으로 요약해본 것이다. 단언컨대, MD는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이다. MD를 아는 만큼 북핵 문제도 볼 수 있게 된다. (머리말)
결국 부시 행정부의 MD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 북한의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에 대한 집착을 다시 호출하고 말았다. 반대로 김정일 부자의 이들 무기에 대한 집착은 MD라는 괴물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고 있다. 한마디로 MD와 북핵의 적대적 동반성장이다. (88쪽)
북핵과 이란 핵, MD와 관련한 미국의 협상 양태를 보면, 대단히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미국이 MD라는 저울에 북한과 이란을 양쪽에 올려놓고 저울질하는 상황이 10년 가까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부시 행정부 말기인 2007~2008년에 북미관계는 2000년에 이어 제2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던 부시가 '테러지원국' 목록에서 북한을 삭제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 MD 구축도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바로 이때 유렵에서는 '신냉전' '미사일 위기'가 언급될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했다. 미국이 이란 위협을 이유로 MD 배치를 강행하려고 하자, 러시아가 중단거리 핵미사일을 재배치하겠다고 맞서면서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2009년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의 조건 없는 6자회담 제의를 거듭 뿌리치면서 북한 위협을 이유로 한-미-일 MD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전략적 인내'라는 이름을 달고 말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이이 세 차례의 핵실험을 단행한 북한은 핵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똬리를 틀고 있다. 동시에 북한 위협을 근거로 아시아 재균형(rebalance) 전략에 박차를 가하기 위한 의도가 내포된 것을 보인다. 이 와중에 동아시아에서는 '신냉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MD를 둘러싼 한미일 대 북중러의 갈등이 커지고 있다. 2014년 '사드(THAAD) 논란'이 대표적이다.
반면 이란과의 핵협상에는 그야말로 올인하고 있다. 이란은 아직 핵실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협상을 통한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 오바마 행정부의 주장이다. 또한 협상을 포기해 이란의 핵무장 문턱을 넘어서면 중동에서 핵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고 중동 분쟁도 격화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미국이 북한과 이란을 상대로 동시에 협상에 나서기가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 필자의 진단이다. 미국은 북핵 협상에 집중할 때는 이란 핵 위협을 이유로 MD 구축에 박차를 가했다. 반대로 이란과의 협상에 몰두할 때는 북핵을 MD의 최대 구실로 삼는다. 이러한 현상이 과연 우연일까? 대화를 통해 적대관계를 해소하려고 하면서도 동시에 또 다른 적을 필요로 하는 것이 미국식 체제의 특징이라면, 이런 현상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119~121쪽)
동북아의 전략적 불안의 매트릭스는 네 가지이다. 하나는 한반도 차원에서 한미동맹 대 북한 사이의 갈등이고, 다른 하나는 지역 차원에서 중국과 일본의 갈등관계이다. 글로벌 차원에서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전략적 경쟁이 있고, 이는 동북아 정세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끝으로는 미일동맹(해양 세력) 대 중러협력체제(대륙 세력) 사이의 대립 격화이다. 이게 한미일(남방 삼각동맹) 대 북중러(북방 삼각동맹)로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북핵 문제 및 이에 대한 한미일의 MD 구축 시도는 이러한 갈등 구조를 더욱 격화시키고 또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MD가 미일동맹의 결속을 다지는 핵심 프로젝트였던 것만큼이나, 미국 주도의 MD는 냉전시대 적대적이었던 중러관계를 우호협력관계로 전환시키고 준군사동맹 관계로까지 나아가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고 있다. (174쪽)
한때 북핵 문제가 5자를 결속시킨 사유였다면, 이제는 MD가 6자를 분열시키고 헤쳐 모이게 만들고 있는 셈이다. 사드 논란은 이러한 속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 문제는 대단히 심각하게 바라봐야 한다. 냉전을 그나마 불안한 평화로 유지케 했던 ABM 조약이 오늘날에는 없다. 한반도에서 북핵과 MD가 적대적으로 동반성장하면서 그 파장이 동북아 전체로 번지고 있고, 강대국 간의 군비경쟁도 고개를 들고 있다. 이는 적어도 오늘날의 동북아 질서가 냉전시대보다 질적으로 좋지 않은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핵과 MD의 적대적 의존관계를 혁파하지 않는 한, 동북아의 전략적 안정과 평화는 공허한 구호로 끝날 것임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현실이다. (175쪽)
더욱 심각한 문제는 북핵 때문에 전작권 환수가 시기상조라면, 핵 문제 해결도, 전작권 환수도 영원히 불가능해지고 한국은 MD의 늪에 더더욱 깊숙이 빨려들어갈 것이라는 데 있다. 한미, 혹은 한미일이 대북 대화는 기피하면서 북한의 위협을 근거로 MD에 매달릴수록 북한도 핵과 미사일 전력 증강에 나설 것이 확실하다. 그렇게 되면 한국의 보수 진영은 또다시 전작권 환수가 곤란하다고 할 것이고, 미국은 이를 지렛대로 삼아 한국에게 MD 참여를 더욱 높은 수준에서 요구할 것이다. 이렇듯 전작권 연기-MD-북핵의 악순환이야말로 오늘날 한국 외교의 가장 참담한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214쪽)
보수 정권 들어 한국의 MD 참여가 가속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방부는 이를 거듭 부인해왔다. 이와 관련해 네 가지 문제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첫째, 한국 영토에 미국 MD 시스템이 배치되면, 그건 MD 참여인가, 아닌가? 둘째, 한국이 누군가의 탄도미사일 발사를 탐지·추적해 그 정보를 미국과 일본에 전달하는 건 MD와 무관한 것인가? 셋째, 한국형 MD라는 KAMD와 미국 MD의 상호운용성이 강화되고 있는 것도 MD 참여와는 무관한 것일까? 넷째, 한국이 미국 및 일본과 함께 MD 대화를 하고 정보고 공유하고 훈련도 함께 하는 것도 MD와는 상관없는 것인가? (214~215쪽)
MD본색 : 은밀하게 위험하게 - 정욱식 지음/서해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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