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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_2019/밑줄긋기

고도를 기다리며

고도를 기다리며 - 10점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민음사


에스트라공  하지만 우린 약속을 받았으니까.

블라디미르 참을 수가 있지.

에스트라공  지키기만 하면 된다.

블라디미르  걱정할 거 없지.

에스트라공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블라디미르  기다리는 거야 버릇이 돼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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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트라공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리고 있지.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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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중략) 문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뭘 해야 하는가를 따져 보는 거란 말이다. 우린 다행히도 그걸 알고 있거든.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우린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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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남들이 괴로워하는 동안에 나는 자고 있었을까? 지금도 나는 자고 있는 걸까? 내일 잠에서 깨어나면 오늘 일을 어떻게 말하게 될지? 내 친구 에스트라공과 함께 이 자리에서 밤이 올 때까지 고도를 기다렸다고 말하게 될까? 포조가 그의 짐꾼을 데리고 지나가다가 우리에게 얘기를 했다고 말하게 될까? 아마 그렇겠지. 하지만 이 모든 게 어느 정도나 사실일까? 저 친구는 아무것도 모르겠지. 다시 얻어맞은 얘기나 할 테고 내게서 당근이나 얻어먹겠지…….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무서운 산고를 겪고 구덩이 밑에서는 일군이 꿈속에서처럼 곡괭이질을 하고. 사람들은 서서히 늙어 가고 하늘은 우리의 외침으로 가득하구나. 하지만 습관은 우리의 귀를 틀어막지.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겠지. 그리고 말하겠지. 저 친구는 잠들어 있다. 아무것도 모른다. 자게 내버려 두자고. 이 이상은 버틸 수가 없구나. 내가 무슨 말을 지껄였지?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극으로 접한 건 아주 어렸을 적 텔레전을 통해서였다중학생 혹은 고등학생 시절이었던 던 것 같은데 국립극장 같은 데에서 하는 공연을 녹화해서 틀어줬다. 늙수그레한 나이로 분장한 두 남자가 나와서 뜻이 잘 이어지지 않은 대화를 계속 이어갔다. 어린 나이의 내 인내는 그리 오래 버티지 못했고 채널을 돌렸다.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가 누구인지는 전문적인 비평가뿐 아니라 연극 관람자나 희곡 독자 모두가 각자 짐작해볼 수 있겠다. 오히려 나는 고도가 누구인가 보다는 고도를 기다리는 그들의 행위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았다. 객쩍은 농담이나 지껄이다가 돌연 '우리가 뭐하고 있는 거지?'라는 질문에 어김없이 돌아오는 대답이 바로 '고도를 기다리고 있지'이다. 그가 누구인지, 그가 언제 올지, 과연 오기는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버릇'처럼 그를 기다리는 행위를 어떻게 봐야 할까. 사내들은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서 안도하고 있지만, 정작 그 확실하다는 고도를 기다리는 행위는 하나의 버릇에 불과하다. 매일을 다람쥐 챗바퀴 돌듯 살고 있는 우리가 보기에 확실한 것은 '우리가 매일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고 있다'는 사실이지만 이것은 공허한 사실에 불과하다.


이 사실마저도 이야기의 말미에 가면 흔들린다. '밤이 올 때까지 고도를 기다린' 것 마저도 얼마나 사실인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대표적인 부조리극의 하나다.  부조리한 현실 속 인간 존재의 고통과 고독, 헛도는 소통을 보여준다는 부조리극. 어수룩하고 어떨 땐 바보 같은 등장인물이 툭툭 던지는 대사의 행간에 숨겨져 있는 묵직한 생각거리들이 호흡을 가다듬게 한다.


(※구글링을 해보니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사진이 많이 나온다. 유투브에서도 많이 검색된다. 극의 시공간적 배경이 '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 어느 시골길 저녁'이므로 황량하고 쓸쓸한 느낌이다. 그런데 스틸사진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저마다 다르다. 등장인물의 표정도 마찬가지다. 무표정하거나 일그러진 표정과 농담을 하며 웃는 순간으로 대별된다. 감독의 해석에 따라 어둡고 침울한 분위기가 주조를 이루는 경우와 경쾌하게 이어지는 엉뚱한 내용의 대화가 좀 더 부각되는 경우로 나뉘는 것 아닌가 짐작을 해본다. 나의 경우 후자쪽이다. 어릴 적 텔레비전으로 봤던 장면 몇토막에서 배우들의 엉뚱한 대화가 익살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새롭게 읽이면서 가졌던 느낌도 비슷했다. 그래서 좀 덜 어두운 사진을 찾아서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