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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_2019/밑줄긋기

떨어지는 낙엽을 본 법학자는 무슨 생각? <손호영의 로하우>

법은 하나의 세계를 구성한다. 법이 구성하는 세계가 현실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음은 당연하다. 깔대기에 부어진 액체가 깔대기의 좁은 목으로 흘러들어가듯 현실에서 벌어지는 범죄는 물론이요, 갈등과 분쟁, 시비들은 최종적으로 법의 심판과 판단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법이라는 제도의 생성과 발전 자체가 현실의 윤리와 관습이 확대·심화돼 성문화되는 과정이었다. 평행우주론이 현실의 우주 공간과 똑같은 쌍둥이 우주를 상정하는 것처럼 법은 현실 세계의 쌍둥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법이 구성하는 세계는 현실 세계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논리와 가치라는 씨줄과 날줄을 가지고 법이 구성하는 세계가 현실세계와 완전히 같을 순 없다. 일란성 쌍둥이가 유전적으로는 동일하더라도 생활(현실)세계에서 두 사람은 동일한 사람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더구나 법은 구조적으로 현실의 변화에 맞춰 실시간으로 자신의 모습을 바꿀 순 없다. 물론 법의 세계가 바뀌면서 현실의 세계를 바꾸는 반대의 경우도 있지만 이 역시 일정한 시간차를 요구한다.


무척 무미건조해 보이는 법조문은 마치 법의 세계가 완전 중립 혹은 완전 객관의 세계처럼 오인되도록 한다. 그러나 법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끝까지 가치와 가치, 논리와 논리가 치열하게 투쟁하는 세계이다. 법의 세계에 중립은 없다. 법이 다루지 않기로 했다면 모를까 일단 다루기로 했다면 시비는 분명히 가려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름의 체계를 가지고 구축된 법의 세계는 완벽할까? 그렇지 않다. 현실의 변화에 시차를 두고 따라가야 하는 법의 구조적 한계가 엄연하고, 제 아무리 촘촘하게 짠다 한들 법의 세계엔 그물코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법에 관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이런 엄연한 사실을 간과하는 사람을 간혹 보게 된다. 대놓고 이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법이 구축한 세계의 완벽성을 신봉하거나, 모든 것을 법의 문제로만 치환하는 사고방식을 보인다는 점이다. 물리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사람을 살리고 죽일 수 있는 법에 관련된 일을 실제로 하는 사람이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면 위험할 수 있다. 엄연한 현실과 법의 괴리를 무시하고 자칫 현실을 법에 꿰맞추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대 판사의 우리가 법을 공부하는 이유'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 <손호영의 로하우>는 내가 앞에 풀어 놓은 그런 문제의식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책은 아니다. 또다른 부제 '법대로 합시다. 법은 합리적 사리판단의 최선을 지향하므로'가 이 책의 의도를 잘 말해준다.


85년생으로서 판사의 일을 시작한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이 책의 지은이는 법의 세계에 존재하는 그물코 보다는 법이 구축한 세계의 견고함을 나름 경쾌하게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하긴, 법이 구축한 세계를 제대로 알아야 그 세계가 노정하는 그물코가 더 잘 보일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느 날씨 좋은 가을날 물리학자, 철학자, 시인, 법학자가 은행나무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어디선가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고, 은행잎이 마치 커튼처럼 눈앞을 드리우는 장관이 연출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장면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이들 네 사람의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느낌은 각기 달랐습니다.

물리학자는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을 떠오렸고, 철학자는 ‘생명의 유한함과 대자연의 섭리’를 곱씹었으며, 시인은 “또 하나의 가을이 간다”하며 감상에 젖었습니다.

그렇다면 법학자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중략)

낙엽을 바라본 밥헉자의 생각은 이러했다고 합니다.

“부동산이 동산이 되는구나.”

나뭇가지에 잎이 매달려 있을 때는 땅에 붙어 있는 것이니 부동산이지만, 낙엽이 되면 땅에서 떨어지니 동산이 되는 것이죠. (들어가며 5~9쪽)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법이야말로 인문학의 꽃입니다.

법은 현실의 구체적인 분쟁에 대해 다룹니다. 당장 여러분과 저의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은 이러한 분쟁에 대해 어떻게든 해답을 내립니다. 그렇기에 힘이 있습니다. 공허한 말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법은 그 어떤 인문학보다 가장 ‘실제적’입니다. (들어가며 6쪽)


형사법의 기본 원칙 중 하나인 죄형법정주의는 말 그대로 ‘법 없으면 범죄 없고, 형벌도 없다nulla poena sine lege’라는 법 원칙이다. 어떤 행위가 범죄가 되고 그 범죄에 대하여 어떤 처벌을 할 것인지 미리 법에 규정이 되어 있어야 한다. 죄형법정주의의 관점에 따르면 국가가 살인자를 처벌하는 이유는, ‘살인자가 나쁘기 때문에 처벌한다’라기보다 ‘살인자는 처벌한다고 법에 규정되어 있으므로 처벌한다’가 타당한 표현이 된다.

이러한 죄형법정주의 덕분에 국가가 행하는 형벌권의 한계가 명백히 밝혀지고, 형벌권이 마음대로 행사되는 것이 방지되어 국민의 자유와 권리가 보호될 수 있다. 그러나 명明이 있으면 암暗도 있다. 죄형법정주의에 따를 경우 사회적으로 충분히 비난 가능한 행동임에도 만약 이를 처벌하기 위한 법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그 이유만으로 그 행동을 처벌할 수 없게 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Part1. 논리적인 그러나 인간적인 법 21쪽)


법이란 한마디로 무엇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두 개의 근간을 이야기하라면 이처럼 논리와 가치를 빼놓을 수 없다. 명제를 설정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가치, 그리고 명제가 적용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논리, 이 둘은 법을 이해하는 두 개의 기둥이라고 할 것이다. (Part1. 논리적인 그러나 인간적인 법 45쪽)


사실 정의와 효율은 보기와는 달리 반드시 모순되는 관계가 아니다. 정의가 효율의 전제가 되기도 하며, 효율이 곧 정의가 되기도 한다.

법에서 정의란(무엇인지 규정지으려 시도하는 것 자체가 무모하지만 소박한 의미에서)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각자에게 그의 것을 정확히 주는 것이 바로 정의(이를 ‘교환적 정의’라고 한다)의 한 측면이다. 각자의 재산권, 노동의 대가, 혹은 범죄에 대한 처벌 등을 정확하게 그에게 귀속되게 하는 것이 바로 (교환적) 정의이다.

그렇다면 이때 ‘각자의 것’은 무엇일까? 어떠한 원칙과 기준에 의해서 ‘각자의 것’이 무엇인지를 정할 수 있을까?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면, 재산권 보호의 정도는 어떠하며 그 한계는 어떠한가? 노동의 대가는 어느 정도여야 하며, 범죄의 처벌 수준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답해야 하는 것도 정의의 몫이다. 각자에게 귀속될 ‘각자의 몫’을 확정하는 문제도 정의의 또 다른 측면(이를 ‘배분적 정의’라고 한다)이다.

이러한 교환적 정의와 배분적 정의가 모두 이루어질 때 우리는 ‘정의롭다’라고 한다. 그리고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교환적)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효율’을 달성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각자에게 각자의 몫이 귀속되는 것이 보장되면 이에 따라 개개인들은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고, 합리적인 개개인들이 자유롭게 활동을 한다는 것은 ‘효율’을 달성하는 지름길이 되기 대문이다. 그렇기에 ‘(교환적) 정의’는 ‘효율’의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Part1. 논리적인 그러나 인간적인 법 52쪽)


이 규정(※가중처벌)은 이탈리아 지오반니 팔코네Giovanni Falcone 검사를 떠오르게 한다. 마피아가 기승을 부리던 이탈리아에서 팔코네는 변호사, 판사를 거쳐 1980년 팔레르모 검찰청의 수사팀에 합류하면서 마피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그는 1986년 마피아 조직원 474명을 기소하면서 일약 슈퍼스타가 되었는데, 이 사건은 참여한 증인이 1000여 명, 변호사가 100여 명에 이르고 소장만 40권에 달하는 거대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서 그는 기소한 474명 중 334명에 대해 유죄판결을 이끌어내었으며, 마피아 핵심 조직원들에게는 종신형을, 나머지 조직원들에게는 총합계 2665년의 징역형을 받게 하는 거대한 성과를 이루어낸다.

하지만 미피아가 팔코네를 가만둘 리 없었다. 이를 갈고 있던 그들은 1992년 5월 23일 고속도로에서 팔코네가 타고 있던 승용차를 500킬로그램의 폭발물로 폭발시킨다. 이로 인해 팔코네와 그의 부인, 경호원들이 모두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후 팔코네를 기리기 위해 이탈리아는 팔레르모 공항을 팔코네-보르셀리노 공항Falcone-Borsellino Airport(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함게 마피아를 수사하던 보르셀리노 또한 마피아에 의해 사망하여 둘 모두를 기리고자)으로 명명했으며, 이탈리아는 지금까지 그를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죽은 팔코네는 돌아올 수 없고 법의 권위 또한 훼손되어 상처가 남았다. (Part2. 세상의 눈, 법의 눈 81~82쪽)


형사와 민사에 대해서는 “형사는 가슴이 답답하고, 민사는 머리가 아프다”와 같은 말이 전해 내려온다. 형사와 민사에 대한 통찰이 빛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죄를 지었다 하고 벌을 주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그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을 수 있다. 뜻하지 않게 엿보이는 그의 삶까지 바라보게 되면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피해자도 있다. 피해자의 억울함도 고려해야 한다.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해지게 마련이다.

손해를 배상하는 문제도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손해로 보아야 하는가 아닌가? 피해자의 손해는 과연 얼마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을까? 하나하나 따져봐야 하니 머리가 아파진다.

가장 좋은 것은 역시, 이런 것을 몰라도 되는 삶, 아무 분쟁 없는 삶이다. 형사든 민사는 결국 가슴이 답답하거나 머리가 아플 테니까. “송사는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必也使無訟, <논어> ‘안연편’).” 공자님이 하신 말씀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Part3. 형사와 민사의 차이 147쪽)


사법연수원 2년 동안 습득하는 것은 결국 글쓰기이다. 이때 배운 법의 글쓰기 원칙은 다음과 같다.

제1원칙: 빠짐없이 작성하라

제2원칙: 제1원칙을 잊지 말라

제3원칙: 논리적으로 쓰라

제4원칙: 깔금하게 쓰면 더할 나위 없겠다 (Part4. 법은 사용하기 나름 222쪽)


법의 글쓰기에는 왕도가 없으며,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을 뿐이다. 때로는 상대방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감성적인 글쓰기도 필요하다. 아름다운 판결로 이름난 대전고등법원의 판결문이 그러한 대표적인 예이다.

“가을 들녘에는 황금물결이 일고, 집집마다 감나무엔 빨간 감이 익어 간다. 가을걷이에 나선 농부의 입가엔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바라보는 아낙의 얼굴엔 웃음꽃이 폈다. 홀로 사는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쫓아내 달라고 요구하는 원고의 소장에서는 찬바람이 일고, 엄동설한에 길가에 나앉을 노인을 상상하는 이들의 눈가엔 물기가 맺힌다.

우리 모두는 차가운 머리만을 가진 사회보다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함게 가진 사회에서 살기 원하기 때문에 법의 해석과 집행도 차가운 머리만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갖고 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이 사건에서 따뜻한 가슴만이 피고들의 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도 그들의 편에 함께 서 있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이다(대전고등법원 2006.11.1. 선고 2006나1846 판결).” (Part4. 법은 사용하기 나름 230쪽)


손호영의 로하우 - 10점
손호영 지음/동아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