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잠깐 동안 삼성출판사의 고전 시리즈를 사 모으는게 취미였었다. 내로라하는 고전들을 타이틀에 포함시키고 있었는데 당시로선 표지 디자인이 꽤 깔끔하고 편집도 괜찮다 싶어 한권씩 사다보니 한 열권 정도 모았나보다. 여기에 <종의 기원>도 포함돼 있다.
근데, 솔직히 완독한 것은 하나도 없다. ㅠㅠ 언젠간 읽으리라 다짐하며 여러번의 이사에도 끌고 다녔는데 지난해 말 이사하면서도 끌고 왔는지 가물가물하다.(책장이 부족해 좀 묵은 상당수의 책들이 여전히 쌓여있다) 900쪽이 넘는 이 책을 눈알이 돌아가도록 읽어가면서(900쪽을 하루에 읽는, 아니 보는게 가능하냐고? 가능하다. 단, 읽는게 아니라 '보는'거다) 그 생각이 자꾸만 났다.
그러고 보니 요즘들어 자연과학, 특히 생물학 관련 책들을 많이 읽고 소개했다. 딱히 의식하고 한 것은 아닌데 말이다. 지난해에 이 책보다 더 묵직한 <다윈 평전>도 나왔는데 머릿말과 목차에서 눈길이 가는 몇대목만 훑어본 수준이었다. 언젠간 다시 들춰보리라 다짐한다.
이번 책으로 그린비의 '리라이팅 클래식'이 10권째 나왔는데 다들 이 책처럼 '목침' 규격이다. 다행인건 종이를 가벼운 것으로 써서인지 무게는 생각보다는 덜 무겁다.(가볍다는 건 아니다!!!)
딱딱했던 ‘종의 기원’, 친절해졌네
-창조론 비판 다윈의 ‘불온한 명제’ 현대적 시각서 읽기 쉽게 해설
-창조론 비판 다윈의 ‘불온한 명제’ 현대적 시각서 읽기 쉽게 해설
종의 기원,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 소멸의 자연학 - 박성관 지음/그린비 |
현대의 인문·교양서 독자들이 반드시 맞닥뜨리게 되는 대상이 칼 마르크스와 찰스 다윈이다. 요즘 나오는 인문·교양서들을 보라. 상당수가 마르크스와 다윈이 남긴 사상적 유산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확인 또는 반박하거나 변주하고 있다. 2008년 미국발 세계경제위기의 여파로 현대 금융자본주의가 흔들리면서 마르크스가 현실에서 새로운 호흡을 얻었고, 지난해가 다윈 탄생 200주년이자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이 되는 해였다는 요인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이 도래했다고, 탄생 몇백주년이 됐다고 모든 사상가가 주목을 받지는 않는다. 그만큼 마르크스와 다윈이 인류 지성사에 남긴 충격이 컸고, 그 충격으로 만들어진 호수가 꽤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마르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히말라야가 아무나 제발로 걸어서 오를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듯 불세출의 사상가에게 다가가기는 쉽지 않다.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칭송받는 그들의 저작을 독파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인고의 과정이다. 대체 대한민국에서 <종의 기원>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생물학도들조차 몇페이지 넘기면 잠귀신과 맞닥뜨리고 만다는 그 책을 말이다.
보통 사람과 똑같은 과정을 거쳐 마침내 다윈과 친구가 될 수 있었다는 지은이는 사람들이 <종의 기원>을 읽지 않거나 읽는 데 실패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다윈이 증명한 진화론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마따나 교황조차 진화론을 더 이상 하나의 가설이 아니라 다양한 과학 분야에 의해 공통적으로 지지되는 과학 이론이라고 인정하는 판이다.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시대다. 그러니 창조론을 대하장편소설 길이로 비판하는 책이 얼마나 지루하겠는가 말이다.
창조론자들에게 세상 바깥의 완벽한 설계자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으로 비쳐졌던 신비롭고 경이로운 자연이 찰스 다윈에게는 무생물과 생물을 잇는 진화의 증거로 보였고 다윈은 이를 증명해 냈다. 다윈이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가 신이 천지를 창조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태고의 날들(The Ancient of Days)’을 찢어버리는 것처럼 콜라주 방식으로 표현했다.
그럼에도 <종의 기원>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지은이는 다윈이 <종의 기원>으로 철저히 부숴버렸던 인간중심주의와 목적론(세상에서 일어나는 일과 자연 현상은 모두 특별한 목적이 부여돼 있다는 사고)이 현대에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대한민국에서 액면 그대로의 창조론을 믿는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실제로 설문조사를 해봐도 그렇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과 다르고 훨씬 월등한 존재다’라는 표현을 떠올려 보자. 이 말에 스스럼없이 동의한다면 당신은 다윈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다. 자칭 진화론자라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런 사례는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여기에서 바로 ‘인간은 결코 유일하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며, 이 세상의 비밀은 거룩한 기원에 있지 않다’는 다윈의 ‘불온한’ 명제를 담은 <종의 기원>이 현재적 의미를 갖는다. 지은이에 따르면 다윈은 주도면밀했다. 그리고 성실했다. 자신을 빼곤 모두가 창조론자 혹은 사이비 진화론자였던 시대에 일당 백이 아니라 일당 천, 일당 만으로 싸워야 했던 그는 책의 구성, 논증 방식, 세세한 표현에 이르기까지 매우 신중했다. 이 책에 쏟아질 것으로 예상되는 질문과 반론조차도 <종의 기원>에 상세하게 수록하고 반박했다. 책을 집필하기 전 다윈이 스스로에게 수없이 던졌던 것이기도 하다. 5번이나 개정판을 내며 초판의 문장을 75%나 손질했지만 다윈이 수십년에 걸친 연구에서 얻어진 확신을 결코 굽히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들이다.
사실 진화의 장구한 흐름을 인간이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생명의 창조와 진화를 둘러싼 논쟁은 상당 부분 논리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다윈이 자신을 포함한 당대의 과학자들이 난제로 여겼던 주제를 제시하고, 다양한 사례를 검토한 다음 상대방의 허점을 공격하고 자신의 가설을 세워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다보면 진화론에 관한 지식 외에도 고도의 지적·논리적 유희를 선사받게 된다.
한가지 문제는 ‘친절한 다윈씨’를 만나게 해준다고 장담하는 이 책 역시 분량이 900쪽 가까이 된다는 사실이다. 분량에 압도당하지만 않는다면 <종의 기원> 원문을 3분의 1가량 인용하면서도 먹기 좋게 요리한 글솜씨가 독자들을 맞이한다. 스티븐 제이 굴드, 리처드 도킨스 등 다윈의 후예들이 구축한 현대 진화론의 최전선을 한눈에 조망하며 즐기는 기쁨은 책 후반부까지 읽어낸 사람만이 맛볼 수 있다. 20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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