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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구워진 글

[리뷰]왜 인도주의는 전쟁으로 치닫는가

세상의 모든 것은 양면을 가진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책이다. 개인적으로 전쟁영화를 좋아했는데-아이를 낳은 이후 제대로 영화를 보지 못했으니 나의 영화 감상기는 7년여 전에 멈춰 있다-영화 <블랙호크 다운>을 재밌게 봤던 기억이 있다.

사실 인도주의적 군사개입은 20세기 말부터 현실 국제정치무대와 국제정치학계의 뜨거운 감자이다. 유엔 헌장이 주권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인데, 유엔은 각종 인도주의적 군사개입을 승인함으로써 이 헌장 해석에 변화가 생겼다.

이 책은 이러한 이론적 논의에서부터 여러 인도주의적 개입의 현장에서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엮어 인도주의적 개입의 양면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한국도 평화유지군을 여러차례 파병한 경험이 있지만 한국인들은 여전히 인도주의적 개입을 분열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즉, 구호단체의 파견과 군대의 파견은 완전히 동떨어진 것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고, 사안에 따라 인류애적 지원과 침략 지원이라는 시각이 병존한다는 것이다. 물론, 사안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겠지만 두가지는 매우 가까이 있다.

하지만 일반 한국인들의 시야가 이 같은 사실을 깨달을 정도로 넓어지려면 얼마나 더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다. 한국은 여전히 미국의 공식, 비공식 입김을 따라 국제정치 현장에서 입장을 정해야 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인도적 개입의 도덕적 딜레마
왜 인도주의는 전쟁으로 치닫는가? - 10점
카너 폴리 지음, 노시내 옮김/마티

‘인도주의’는 인종이나 민족, 종교, 정치적 사상 따위를 초월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인류의 공존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뜻한다. 인도주의는 작게는 헐벗고 굶주리는 이웃을 돕기 위해 자신의 주머니를 터는 자선, 크게는 생명이 위협받는 사람들에게 안전을 제공하기 위해 자신에게 닥칠지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는 행동 등 다양하게 발현된다.
그러나 21세기 국제정치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인도주의란 말만큼 혼란스러운 것도 없다. 북한에 대해 남한에서 이뤄지는 여러 활동만 봐도 그렇다. 구호단체의 물품지원과 봉사활동은 물론이요, 김정일 정권 타도 운동도 인도주의라는 명분을 내세운다. 지난 2월 이뤄진 대한민국 국회의 아프가니스탄 2차 파병 결정의 명분도 인도주의였다.

실제로 인도적 개입은 구호활동에서부터 군사력 사용까지 다양한 행위를 포함한다. 특히 1990년대 들어 소말리아 내전, 코소보 사태 등에 대한 군사적 개입이 연이어 이뤄진 이래로 명백히 대립적으로 보이는 용어인 ‘인도적 군사개입’이 늘고 있다.
지은이는 국제앰네스티와 유엔난민기구(UNHCR) 등 각종 인권단체와 국제기구에 고용돼 코소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콜롬비아,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우간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 분쟁지역 최일선에서 일했던 인도주의 활동가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도주의의 명과 암, 딜레마를 생생하게 들춰내고 인도적 개입주의의 이론적 맹점을 고찰했다. 지은이의 시각은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인 “인도주의는 해답이 아니라 ‘문제’의 일부이다”로 요약된다.
1863년 창립된 국제적십자사는 공정성·중립성·독립성을 원칙으로 고수하고 있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제할 뿐 정치적·군사적 개입은 일절 거부한다는 것이다. 불의를 묵인해서가 아니라 당장의 참상을 완화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라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적십자사의 이런 원칙은 다른 구호단체들로부터도 “학살을 방조한다”는 비난을 받기 일쑤였다.
더구나 인종학살과 인권유린에 관한 보고서와 뉴스가 전해지면 여론은 국제기구와 강대국의 ‘직접적이고 명쾌한 개입’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요동쳤다. 여기서 말하는 직접적이고 명쾌한 개입은 무엇을 말하는가? 총칼로 동족을, 혹은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세력을 총칼로 억눌러 평화를 만들어내라는 요구에 다름 아닌가?
그런데 인도적 개입은 국제법적으로 많은 논란을 양산하고 있다. 강대국의 군사적 개입은 ‘국익을 보호하기 위한 침략’에 인도주의라는 허울을 덧씌운 경우가 많았다. 실제 인도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점령지의 상황을 오히려 악화시키거나 모순을 불러일으키기 일쑤였다.


일부 구호단체들은 고전적 인도주의의 원칙에서 벗어나 군대와 협력하거나 국가건설 임무까지 떠안으면서 ‘공존과 복지의 실현’이라는 목표의 구현은커녕 스스로의 입지를 좁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저자는 단언한다. “최근 몇 년간 인도적 개입이 대규모로 이뤄진 곳 가운데 안정 회복에 성공한 사례는 극소수이며, 거의 예외 없이 통치력의 약화와 극심한 사회 분열을 겪고 있다.”
그 어떤 내전이나 재난도 단순하게 발생하지 않는 것처럼 현장에서 펼쳐지는 인도주의 활동도 결코 단순하지 않다.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수만명의 구호 활동가들은 오만가지 도덕적 딜레마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딜레마는 현장 활동가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일례로 대한민국의 일반인들도 북한에 대한 인도적 개입 방식에 대한 판단을 요구받고 있다. 저자의 조언은 조심스럽다. 개입에 대한 환상과 냉소를 피하면서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접근방법을 고안하는 것이 인도주의가 풀어야 할 숙제이며, 해답의 실마리는 ‘적십자식 중립성’이 쥐고 있다는 것이다. 201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