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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구워진 글

[리뷰]정의란 무엇인가 & 경계와 편견을 넘어서

정치철학 분야는 철학 분야의 특성상 전공자의 폭이 그리 넓지 않고 큰 논쟁도 자주 벌어지지 않기 때문에 저술이 그리 활발하게 나오는 분야는 아니다. 전공자들이 참고하는 기존문헌들도 다른 사회과학 분야와 달리 발간 연도가 상당히 떨어진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그래서 같은 시기에 나온 정치철학서 두권을 묶어 일어 보았다.

그런데 정치철학은 우리가 현실에서 접하는 문제들, 일테면 자유, 정의, 권력 등등의 문제들을 다룬다. 물론 우리가 철학이라고 통칭하는 분야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형이상학적인 철학은 일반인이 접근하기엔 꽤 까다로운게 사실이다. 하지만 정치철학은 현실과 맞닿은 면이 넓기 때문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상당히 재미있는 지적 유희를 즐길 수 있다.

마이클 샌델의 책은 워낙 쉽게 씌여져 정치철학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정치철학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하버드까지 갈 필요 없이 안방에서 하버드 최고의 강의를 듣는 셈이다. 곽준혁 교수는 얼마전부터 활발하게 저술활동을 하고 있는 신진 정치철학자인데 최신의 정치철학자들의 이론을 한국의 현실에 견줘서 풀어보려는 지은이의 노력은 보이지만 아무래도 학술적인 성격이 강한 편이다. 이 책은 한길사가 새롭게 시작한 시리즈인데 국내 인문학자들의 저술로 채워나간다는 계획이다. 벌써 박석무 선생이 쓴 <조선의 의인들>이 두번째 타이틀로 출간됐다. 곽 교수의 책은 본격 정치철학서를 읽기전 개략적인 지도삼아 본다면 좋을듯 하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는 서양 정치철학의 유구한 역사를 떠받치는 핵심적인 기둥들이다. 정치철학자들은 고래로 각자가 선택한 기둥에 올라서서 자신들이 그리는 ‘인간 본성에 기반한 이상적인 사회’의 조직 및 작동 원리를 이론적으로 구체화하기 위해 애썼다. 정치철학이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단순히 사변적 탐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집단의 일상적 선택, 국가와 사회의 미래설계에 미치는 강력한 영향력 때문이다. 같은 시기에 발간된 2권의 책은 암울한 정치·사회·경제적 상황에 숨막혀 하는 한국의 시민들로 하여금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국가를 근원에서부터 생각할 수 있도록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어 준다.
'소통'으로 푼 '정의'의 딜레마
정의란 무엇인가 - 10점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김영사

당신은 시속 100㎞로 질주하는 전차의 기관사이다. 그런데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저 앞에 인부 5명이 선로공사를 하고 있다. 순간 오른쪽의 비상철로가 눈에 들어온다. 그곳에도 인부가 있지만 1명뿐이다. 전차를 비상철로로 돌리면 1명이 죽지만 이대로 간다면 5명이 죽는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어느 것이 정의로운 행위인가?
마이클 샌델 하버드 대학교 교수(57)의 실제 강의를 정리한 이 책은 7000명이 채 안되는 하버드대 학부생 가운데 1000명이 그의 수업에 몰려든다는 명성답게 첫장부터 여러가지 딜레마적 상황을 제시, 보는 이를 솔깃하게 만든다. 답변을 이리저리 궁리해보지만 샌델은 허점을 예리하게 파고든다. 이렇게 멍석을 깐 그는 우리를 제레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이마누엘 칸트, 프리드리히 하이예크, 존 롤스, 아리스토텔레스 등 주요 사상가들로 인도하며 서양 정치철학에 입문시킨다.
서양 정치철학에서 정의를 이해하는 방식은 행복의 극대화, 자 유, 미덕의 추구 등 3가지로 압축된다. 흔히 공리주의로 불리는 행복의 극대화는 말 그대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정의의 척도다. 공리주의는 그러나 개인의 권리를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정의가 자유와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라는 시각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다. 이 입장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무엇도 정의에 반한다는 자유방임주의와 공평한 기회에서 오는 선택의 자유를 강조하는 평등주의로 나뉘어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고 있다. 전자가 하이예크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사상이라면 후자는 롤스로 대표되는 시장개입주의적 시각이다.
공리주의와 자유주의의 논리와 장단점을 검토한 샌델은 논의를 정의와 미덕, 즉 정의와 공동선의 관계로 이끌어간다. 그가 보기에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만들 수 없다. 행복의 극대화와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공동체가 필요하고, 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시민의식과 희생·봉사·연대, 시장의 도덕적 한계에 대한 인식 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샌델은 현대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치를 역설한다.
샌델이 이 책의 여러곳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는 시장과 국가의 관계, 낙태, 소수자우대정책, 동성애, 부유층에 대한 중과세, 사형제 등 무엇이 정의인가를 둘러싸고 이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주제들을 일상적으로 접한다. 그는 이런 주제들에 대한 나의 생각을 돌아보고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무엇인지를 스스로 묻게 만든다.
샌델의 설명을 따라가다보면 우리 안에 정의에 대한 여러 생각들이 혼재돼 있고 때로는 모순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예를 들어 자유방임 경제정책을 지지하는 보수주의자들은 동성애나 마약 등 문화적 문제에 대해서는 법을 통한 규제에 찬성한다. 반대로 복지정책을 지지하는 사람 가운데 상당수는 동성애, 출산에 대한 여성의 결정권 등에 대해 자유지상주의자들과 견해를 같이한다.
이 책은 샌델이 서 있는 공동체주의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정의에 대한 다양한 사상과 이 사상들이 현실에서 만들어낸 복잡한 변주들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권력과 압제에 맞서 진실을 말하라"


경계와 편견을 넘어서 - 10점
곽준혁 지음/한길사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마키아벨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신진 정치철학자인 지은이는 한국사회가 두가지 면에서 빈곤하다고 말한다. 모두가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다양한 형태의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서로 다른 의견의 조정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고, 맹목적인 권력추구 현상이 빚은 현실주의가 희망의 빈곤을 낳았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그러면서 한국을 포함한 세계가 발목이 잡혀 있는 경계와 편견을 넘어 새로운 이념적 지평의 씨앗을 던져줄 가능성이 엿보이는 5명의 현대 정치철학자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를 넘어 공화주의의 새로운 토대를 다진 필립 페팃, 다문화·탈민족 시대의 민족주의 이론가 데이비드 밀러,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이자 급진 민주주의 이론가인 샹탈 무페, 민주적 교육의 이론가이자 실천가인 에이미 것만, 개인의 선택과 공공성의 발현이 동시에 충족되는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마사 너스바움이 그들이다.
지은이는 각각의 사상가들이 그려온 사상적 궤적과 장단점을 소개함으로써 독자를 준비시킨 뒤 진지한 대담으로 현대 정치철학의 고민과 비전을 보여준다.
인상 깊은 것은 각각의 대담 뒤에 이들의 사상으로 한국사회를 분석한 부분이다. 이를 통해 그는 갈등을 민주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민적 인내의 필요성, 갈등조정 메커니즘으로서 심의민주주의를 강조하고 한국에서 민족주의 없는 애국심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이 책을 딱딱한 학술서로 치부하고 넘겨버릴 수 없는 이유다. 에이미 것만은 정치철학의 역할을 “인권, 자유와 다른 중요한 정치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권력에 맞서 진실을 말하는 것, 그리고 부패, 전제, 잔인함, 그리고 압제에 맞서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곧 지은이 자신을 포함한 한국의 정치철학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으로 보인다. (201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