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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구워진 글

[리뷰]평화의 사진가

흔히들 프랑스를 출판강국이라고 한다. 우리가 어떤 나라를 출판강국이라고 할 때 출판물의 다양성, 탄탄한 독자층 등을 지칭할 것이다.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 문화적 저력이 되는데, 이런 문화적 파워는 한 나라의 경계 밖을 넘어 다른 문화권 독자들에게 공감을 일으키게 만들고 그 공감이 하나의 표준으로 자리잡게 만든다.

우리가 흔히 '만화'라고 부르는 장르는 영어로는 '코믹(comics)'에 해당한다. 우리가 만화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개념 그대로이다. 이와 달리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로 불리는 장르가 있다. 그림으로 그린 소설 정도 되시겠다. 지금은 인식이 많이 바뀌었지만 만화라고 하면 약간 가볍다는 이미지인데 그래픽 노블은 그것보다는 좀 더 진중하다고 할 수 있다.

<평화의 사진가>가 그런 사례에 해당한다. 프랑스 사진작가가 1986년 국경없는 의사회와 함께 아프가니스탄 의료구호활동을 다녀온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다. 책이 나오게 된 과정도 재미있다. 이 사진작가는 당시 1500여장이 넘는 사진을 찍어왔는데 그중 6장이 프랑스 신문에 게재됐다고 한다. 나머지는 밀착인화(필름 크기 그대로 커다란 인화지에 여러컷을 인화한 것)를 해서 보관하고 있었다. 만화가 친구가 젊은 시절부터 그 이야기를 간간히 들었고, 밀착인화된 사진을 보고는 만화로 그려볼 것을 제안한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이 책이다. 이 책은 2007년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주요 작품으로 주목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며칠 뒤 사진작가는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말았다.

책이 무겁고 가격도 부담스럽긴 하지만 아프간의 모습, 극한의 상황에서 구호활동을 펼치는 의료진의 프로페셔널하고도 감동적인 모습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어 오히려 감동을 준다.

사진과 만화로 보듬은 '아프간의 눈물'
-소련침공 시절 의사회 구호활동 다뤄
-전쟁이면의 삶과 죽음 생생하게 포착
평화의 사진가 - 10점
디디에 르페브르 사진.글, 에마뉘엘 기베르 그림.글, 권지현 옮김/세미콜론

냉전시절 소련에, 새천년이 시작되고 나서는 미국에 침략을 당하며 모순에 찬 고통을 견디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에게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들의 얼굴에 고통과 분노, 체념 외의 표정이 있기는 할까? 1986년 ‘국경 없는 의사회’ 의료구호팀과 함께 아프간으로 향하기 전 29살의 젊은 사진작가 디디에 르페브르도 비슷한 질문에 휩싸여 있지 않았을까?
파리를 출발해 파키스탄-아프간 북부-파키스탄-프랑스로 이어지는 4개월 동안의 여정을 다큐멘터리처럼 담담하게 그려낸 이 책은 사진과 만화가 교차편집된 매우 독특한 형식이다. 86년에 있었던 일을 20년 뒤 만화로 그렸지만 아프간의 현재 상황과 큰 차이가 있으리라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아프간에서 시간은 멈춰 있거나 더디간다. 최첨단 컬러영상이 난무하는 시대지만 제3자에게 아프간은 여전히 흑백으로 기억된다.

소련의 침공에 맞서 싸우고 있는 아프간으로 향하는 패기만만한 르페브르는 심각함보다는 호기심과 설렘에 휩싸인 모습이다. 그는 나름대로 현지에 적응하려고 애쓰고 위험에 대해서도 교육을 받지만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숲으로 캠핑을 나서는 보이스카우트 소년의 모습이랄까. 현지 사정에 밝고 경험이 많은 의료진과 동행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이었으리라.
하지만 목적지로 향하는 길은 출발부터 험준한 산악이고 부상과 죽음의 위험은 곳곳에 널려 있다. 그는 투덜대면서도 복잡하게 꼬인 아프간의 상황과 아프간의 문화, 풍토에 익숙해져 간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게걸스럽게 셔터를 눌러댄다. 그에겐 카메라 뷰파인더에 눈을 들이대고 있는 순간이 긴장과 평온이 함께하는 시간이다.

목적지에 도착한 일행은 본격적으로 의료활동을 펼친다. 전투 도중 참혹한 부상을 당한 무자헤딘(‘성스러운 이슬람 전사’라는 뜻의 아프간 무장 게릴라), 폭탄 파편에 맞아 화상을 입거나 신체가 찢어지고 잘려나간 아이들, 앞을 못보거나 걷지 못하는 노인들, 그리고 질병·출산·사고 등 일상의 환자들이 끝도 없이 밀려든다. 이들은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질지언정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의료팀을 지휘하는 영웅적인 여성 의사 쥘리에트는 말한다. “여기는 다쳐도 울지 않는 애들이 많아. 아파도 끙끙대기만 하는 정도야.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강인하게 자라거든.”
오히려 눈물을 흘린 것은 르페브르였다. 쌀알만한 파편이 척수를 끊어버리는 바람에 평생 걸을 수 없게 된 어린 소녀를 의사 존이 진찰하는 장면을 바라보며 르페브르가 소리죽여 운 것은 그 소녀의 가련한 인생이 불쌍해서였을까, 말할 수 없이 열악한 상황에서도 묵묵히 인류애를 발휘하는 의료진의 모습에 감동을 받아서였을까? 르페브르는 그저 보여줄 뿐 설명하지는 않았다.
정해진 시한이 다가오자 마음과 체력이 모두 지쳐버린 르페브르는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의료팀보다 먼저 출발한다. 베테랑 동료들의 ‘보호’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활동하고픈 욕심도 작용했다. 그러나 아프간 보호자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그야말로 죽을 고비를 넘긴다. 파키스탄에서 다시 동료들과 재회한 르페브르는 올 때 그랬던 것처럼 덤덤한 표정으로 프랑스로 돌아간다. 책은 여기서 끝난다.
에필로그를 보면 이 여정은 그를 변화시켰고 남은 삶에 깊이 각인됐다. 의사 로베르는 왜 자꾸 아프간에 오느냐는 르페브르의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이곳 사람들이 얼마나 착한지 말해줄까? 사람들은 매일 우리에게 빵을 갖다줬어. 그런데 날이 갈수록 빵은 맛이 없어졌지. 어느 날 우리는 빵집에 가서 더 이상은 안 먹겠다고, 다 버릴 거라고 말했어. 그런데 빵집 주인은 부끄러워하면서 빵을 버리지 말고 자신에게 갖다달라고 하는 거야. 그날 오후에야 마을 사람들이 한 달 전부터 빵은 구경도 못하고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됐지. 그런 일을 한 번 겪고 나면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게 돼.” 르페브르도 이후 7번이나 아프간을 방문했으니 이것은 그의 말이기도 하다.
이 책에 전투 장면은 없다. 위대한 용사도, 영웅도 나오지 않는다. 뉴욕타임스는 “전쟁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전쟁의 폐허를 돌보는 사람들에 관한 책”이라고 평했다.
생과 사에 대한 심오한 철학도, 전쟁에 대한 목청 높인 고발도 앞세우지 않았지만 이 책을 덮고나면 가슴 한쪽이 먹먹해진다. <201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