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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_2019/밑줄긋기'에 해당되는 글 29건

  1. 2014.10.27 정치 쇠퇴를 보는 두가지 시선, 후쿠야마와 최장집-1
  2. 2014.10.02 이야기 형법
  3. 2014.09.23 고도를 기다리며
  4. 2014.09.22 책과 만나기, 책을 소비하기

정치 불능의 시대다. 정부와 국회, 대통령과 정치인들이 밥값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한탄은 하루 이틀 사이의 일은 아니지만 용광로처럼 갈등을 녹여내야 할 정치가 갈수록 사회 갈등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고 있다.


캐나다 태생의 미국 원로 정치학자 데이비드 이스턴(David Easton)은 정치를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고 정의했는데 이런 과정이 고장났다는 것이다. 정치 체제의 한 형태인 대의제 민주주의의 요체인 3권분립과 정당, 선거, 갈등의 제도적 해소 등도 이념적으로 극단화된 사회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


한국의 경우 국가적 재난인 '세월호 사건'을 정부와 정치권이 해결하지 못한채 6개월째 '정치 무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미국도 지난해 오바마 대통령이 주도한 의료보험 개혁을 둘러싼 여야의 갈등으로 정부 예산이 의회에서 제때 통과되지 못해 역사적인 '정부 폐쇄(government shutdown)' 사태를 겪었다. 한국과 미국 모두 정치, 그리고 민주주의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은 분명해 보인다.


미국과 한국의 내노라하는 원로 학자 2명이 최근 정치 쇠퇴, 민주주의 불능에 대해 각각 분석한 글이 나왔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와 최장집이 주인공이다.


후쿠야마는 지난 세기 말인 1992년 사회주의 붕괴에 즈음해 내놓은 <역사의 종말>이라는 책으로 큰 주목을 받은 보수 성향의 학자다. 후쿠야마는 최근 국제문제 전문 저널인 <포린 어페어스>에 '미국의 쇠퇴(America in Decay)'라는 글을 기고했다. (포린어페어스에 실린 'America in Decay' 전문보기)


최장집은 한국의 노동문제에서 시작해 계급과 정당, 그리고 민주주의의 문제에 천착해온 정치학자다. 그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이후, 즉 한국에서 제도적 민주주의가 완성됐다고 평가받는 시기 이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민주주의의 민주주의화>, <어떤 민주주의인가> 등의 저작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과 분석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 그는 네이버 열린연단에 주기적으로 칼럼을 게재하고 있는데 최근 '대표와 책임'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네이버 열린연단 '대표와 책임' 전문보기)


노장 학자들의 글답게 절제된 표현과 정제된 문장들이 돋보인다. 특히 후쿠야마의 글은 영문 문장이 무척이나 평이하면서도 쓰였으면서도 심도 있는 내용을 담고 있어 내용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영문 글쓰기 교재로 삼아도 좋을만큼 훌륭하다.


그러나 미국과 한국 두 나라의 정치의 쇠퇴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은 서로 다르다. 정치가 제역할을 하지 못하는 현실 묘사는 비슷하지만 이런 현실을 가져온 원인과 해법은 크게 차이를 보인다. 미국의 후쿠야마는 '견제와 균형의 과잉'을 정치 쇠퇴, 그리고 미국의 쇠퇴의 원인으로 본 반면 한국의 최장집은 '허약한 견제와 균형'이 대통령의 책임성 결여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후쿠야마의 글을 발췌번역하고, 최장집의 글 역시 밑줄을 그어 대조해 봤다. 글이 길어 두차례 나눠 올린다.




<정치와 민주주의 쇠퇴 현상>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국의 쇠퇴(America in Decay)'


20세기 전환기에 설립된 미국 삼림청(US Forest Service)은 혁신주의 시대(progressive era) 미국 국가 형성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1883년의 펜들턴법(Pendleton Act)이 통과되기 전 미국에서 공직은 임명권(patronage)의 기반 위에서 정당들에게 할당됐다. 삼림청은 이와 대조적으로 능력에 기반한 새로운 관료제 모델의 원형이었다. 산림청은 능력과 기술적 전문성을 기반으로 대학에서 교육받은 농학자들과 산림관리원을 직원으로 충원했으며, 초대 청장인 지포드 핀초트(Gifford Pinchot)는 의회로부터의 일상적인 개입에서 벗어나 관료적 자율성을 확보하면서 살림청을 정의 내리는 투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당시에는 정치인이 아닌 삼림전문가가 공유지를 관리하고 부처의 직원으로 일한다는 사고는 하나의 혁명이었지만, 삼림청의 인상적인 실적은 이것의 정당성을 입증했다. 학계의 몇몇 주요한 연구들은 삼림청의 초기 수십년을 성공적인 공공행정의 고전적인 사례로 취급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삼림청을 글러먹은 수단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심각하게 고장난 관료제로 간주한다. 삼림청은 여전히 삼림청의 임무에 매우 충실한 직업적 산림 관리인들이 일하고 있지만 핀초트 시절에 누렸던 자율성을 거의 대부분 상실했다. 삼림청은 의회와 법원들이 제기하는 중첩되고 종종 모순되는 지시를 받으며 납세자들이 낸 상당량의 돈을 의심스러운 목표들을 달성하는데 낭비한다. 삼림청의 내부 의사결정 시스템은 종종 교착상태에 빠지고 핀초트가 강화하기 위해 애썼던 직원들의 사기 및 높은 응집성은 이미 상실됐다. 요즘은 삼림청이 완전히 해체돼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책까지 나오고 있다. 삼림청 설립이 근대 미국 국가의 발전의 전형적인 예였다면, 이것의 쇠퇴는 국가 쇠퇴의 전형적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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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은 그의 고전적 저작 <변화하는 사회의 정치적 질서(Political Order in Changing Societies)>에서 '정치적 쇠퇴(political decay)'라는 용어를 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신생독립국에서 나타난 정치적 불안정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했다. 헌팅턴은 사회경제적 근대화는 전통적인 정치 질서에 문제를 일으켰고, 이는 새로운 사회적 집단들의 결집으로 이어졌는데 기존의 정치적 제도가 그들의 참여를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쇠퇴는 변화하는 환경들에 적응하지 못하는 제도들의 무능력에 의해 초래된다. 그러므로 쇠퇴는 여러모로 정치적 발전의 조건이다. 옛것은 새것에 길을 내주기 위해 파괴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변환은 극도로 혼란스럽고 과격할 수 있으며, 오래된 정치적 제도들이 끊기지 않고 평화적으로 새로운 상태에 반드시 적응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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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쇠퇴는 그러므로 지적 경직성의 발로이건 그들이 차지한 자리를 지키고 변화를 봉쇄하려는 집권 엘리트들의 권력에 의해서건 제도들이 외적인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데 실패할 때 발생한다. 쇠퇴는 권위주의든 민주주의든 모든 정치 시스템을 괴롭힐 수 있다. 민주주의 정치 시스템들은 이론상 개혁을 가능하게 하는 자기 교정(self-correcting) 메카니즘을 보유하는 반면, 필요한 변화를 봉쇄하는 강력한 이익집단들의 활동을 적법화함으로써 쇠퇴에도 노출돼 있다.


이것은 미국에서 최근 몇십년 사이 벌어지고 있는 바로 그것인데, 많은 정치적 제도들이 갈수록 기능장애에 빠지고 있다. 지적 경직성과 포획된 정치적 행위자들의 권력의 결합은 그러한 제도들이 개혁되는 것을 막고 있다. 그리고 정치 질서에 주요한 충격이 가해지지 않고 이 상황이 변할 것이란 보장은 전혀 없다.


■최장집, '대표와 책임'


하나의 사건으로서 세월호의 비극은 오늘날 한국 정치, 특히 국가권력과 현임 정부의 책임성의 결여가 만들어내는 한국 정치의 취약성을 축약한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민주주의의 건강한 작동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는 것보다 선출된 대표에게 어떻게 책임을 부과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민주주의의 작동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결과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이 책임성이 효능을 갖도록 하는 여러 조건들 가운데 정당의 건강한 발전과 이들간의 건강한 경쟁을 가능케 하는 정당체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이런 요소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상황이 곧 민주주의의 퇴행 내지 실패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할 때 사회는 분열되고 정치적 불만이 사회 전체에 팽만하게 될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국의 쇠퇴(America in Decay)'


근대 자유민주주의는 정부가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의 세갈래로 나뉜다. 이는 국가, 법의 지배,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정치 제도의 세가지 기본적 범주에 상응한다.…정치학자 스티븐 스코로넥(Stephen Skowronek)은 19세기에 미국 정치를 “법원과 정당의 국가(state of courts and parties)”라고 특징지었는데, 유럽에선 행정부 관료들이 수행할 정부 기능들을 미국에선 법관들과 선출된 대표들에 의해 수행된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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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역사 초기 하나의 정당 또는 다른 정당이 지배적일 때 이 시스템은 다수의 의지를 완화하고 소수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도록 강제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좀 더 균등하게 균형이 이뤄지고, 1980년대 이후 도래한 고도로 경쟁적인 정당 시스템에서는 이것은 교착상태로 가는 하나의 공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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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미국 정치 시스템은 견제와 균형이 다수 측의 의사 결정을 과도하게 제약하고, 책임성이 형편없는 기구에 권한을 위임하는 잠재적으로 위험한 여러 사례가 발생하는 복잡한 풍경이 드러난다. 이러한 위임의 중요한 문제점은 전혀 투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의회는 종종 특정 기관이 임무를 어떻게 수행할지에 관한 명확한 입법적 가이드라인을 제공할 의무를 다하지 못함으로써 해당 기관이 자신의 임무를 스스로 작성하도록 한다. 이렇게 하면서 의회는 만약 어떤 일들이 잘 풀려나가지 않을 경우 법원이 개입해 오남용을 바로잡을 것으로 기대한다. 과도한 위임과 거부정치는 그러므로 서로 얽혀 있다.


■최장집, '대표와 책임'


대의제 민주주의는 두 축으로 구성되는데, 하나는 대표이고, 그와 짝을 이루는 다른 하나는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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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두 측면 가운데 책임에 대해서는 잘 알거나 크게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지 않다. 짧지 않은 기간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해오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는 것은 그 제도가 작동하는 정치과정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러한 과정이 만들어낸 결과에 대한 실망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두 축 가운데 대표의 측면보다 책임의 기능이 약한 것이 가져온 결과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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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책임은 영어로 accountability, responsiveness, 또는 responsibility에 해당하는 말이다. 말 그대로 선출된 대표, 또는 정책결정자가 정책결정과 집행, 의제의 선정, 입법 등 공적 영역에서 자신의 행위와 그 결과에 대해 시민들에게 설명하고 책임진다는 뜻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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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은 선출된 대표가 지켜도 되고 지키지 않아도 되는, 어떤 윤리적인 행위 규범과 같은 선택사항이라기 보다는, 민주주의라면 지켜야 되는 공준(公準)이다. 그러므로 헌법은 삼권분립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통하여 그리고 선거를 포함하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실천을 통해 정부의 최고 수반인 대통령에게 책임을 부과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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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국가기구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선거경쟁의 압력으로부터, 그리고 이념과 정책을 달리하는 정당 간 경쟁으로부터 보호되는 영역이기도 하다. 이들을 어떻게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으며, 그들에게 책임을 부과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하나의 체제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지에 대한 최대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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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민주주의는 치자와 피치자 사이에 잘 제도화된 행정관료기구를 갖는 국가라는 제3의 제도가 존재한다. 즉 시민 피치자-국가 기능적 공직자-선출된 통치자 3자관계의 통치 구조를 갖는다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 구조는 책임을 묻는 제도를 효과적으로 실현하기가 그만큼 어려다는 것을 뜻한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왜 정당이 중요한가 하는 것은 뒤에서 말하겠지만,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책임의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헌법은 '삼권분립'의 원리를 민주주의를 움직이는 제도적 근간으로 삼았다. 국가의 통치기구를 입법, 행정, 사법 기능별로 구분하여 상호간 감시 감독과 견제와 균형이 작용하도록 한 것이다. 그 원형인 미국의 “매디슨 헌법”이 그러하고, 그 모델을 따르는 한국의 헌법 또한 그러하다. 매디슨 헌법은 사회의 한 파당, 한 세력의 수중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전제정으로 정의하고, 이를 방지하는 것을 제도 디자인의 정신이자 목표로 삼았는데, 이를 한국의 조건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정치와 민주주의 쇠퇴의 원인>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국의 쇠퇴(America in Decay)'


행정의 사법화와 이익집단의 영향력의 확산이라는 두 현상은 사람들이 정부에 대해 가졌던 신뢰의 기반을 붕괴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럴 경우 정부에 대한 불신은 영속하면서 스스로를 키워나가게 된다. 행정 기구에 대한 불신은 행정부에 대한 더 많은 법적인 점검이라는 요구로 이어지고, 이는 정부의 질과 효율성을 낮춘다. 이와 동시에 정부의 서비스들에 대한 요구는 의회로 하여금 집행부에 새로운 새로운 명령을 부과하게 만들고, 이것은 종종 수행하기 불가능하거나 아니면 어려운 것으로 판명된다. 두 과정은 모두 관료적 자율성의 감소로 이어지며, 이는 다시 경직되고, 규칙에 얽매이며, 비창조적이고 응집력이 떨어지는 정부를 초래한다.


그 결과는 대의제의 위기로서 보통의 시민들이 민주적이라고 간주했던 그들의 정부가 더이상 진정으로 그들의 이익을 반영하지 않고 그늘 속의 다양한 엘리트가 통제한다고 느낀다. 이런 현상에서 아이로니컬하고 특이한 점은 대의제의 위기는 상당 부분 시스템을 좀 더 민주적으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행해진 개혁들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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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제점에 대한 해법이 단순히 규제를 제거하고 관료제를 폐쇄하자는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지지하는 것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유독성 폐기물 규제나 환경 보호, 특수교육처럼 정부가 수행하는 목표들은 사적 시장에 맡겨질 경우 추구되지 않는 중요한 것들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종종 미국의 시스템을 규제에 관한 법원 중심적인 훨씬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이끈 것이 좀 더 강한 집행부를 가진 민주주의에서 선택된 것이라기보다 바로 정부에 대한 불신 때문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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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진보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도 똑같이 문제가 있다. 그들 또한 남부에서 흑백분리학교 시스템을 만들거나 거대 기업에 포획된 것으로서 관료제를 불신한다. 그리고 그들은 입법자들로부터 지지를 충분히 획득하지 못할 때 사회 정책을 만드는 과정에 선출되지 않은 판사들을 투입하는 것을 선호해 왔다.


행정에 대한 분산되고 법률주의적인 접근은 미국 정치 시스템의 다른 주요한 양상과 딱 들어맞는다. 이익집단의 영향력에 대한 개방성이 그것이다. 이런 집단들은 정부를 상대로 직접 소송을 제기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훨씬 더 강력한 통로가 하나 더 있는데 좀 더 많은 자원들을 확실하게 제어하는 의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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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의 이익집단과 로비의 폭발은 놀라울 정도다. 로비스트로 등록된 기업의 수는 1971년 175개에서 10년 뒤 대략 2500개로 늘었고, 2009년엔 1만3700개의 로비스트들이 35억달러를 썼다.


■최장집, '대표와 책임'


같은 대통령중심제를 갖는 나라라 하더라도 미국과 비교해 볼 때 한국의 대통령은 제도적으로 강력한 권력을 향유한다. 그리고 문화적으로도 그러하다. 이 말은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언제나 강력하고 리더십을 갖는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한국의 대통령이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미국과 같이 강력하고도 독립적인 사법부에 의해 견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한국의 허약한 정당체제에 기반한 허약한 입법부라는 차이도 존재한다. 한국 정부 구조에 있어 권위주의의 유산을 가장 많이 유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사법부이다. 이 점 때문에 한국 민주주의는 쉽게 전제화될 수 있는 구조적 취약성을 갖는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 헌법의 차이가 어떻든 정부 기능을 분리하는 것을 통해 서로를 감시 감독하도록 하는 방식은 책임을 제도적으로 강제(정치학자들은 이를 “수평적 책임(성)”이라고 부리기도 한다)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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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정부의 다른 부분들 사이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 책임을 묻는 방식에 비해 시민과 정부 사이의 관계를 통해 정부에게 책임을 묻는 방식(정치학자들은 이를 ‘수직적 책임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이 더 강력할 수 있다. 시민이 정부에 대해 수직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시민사회를 국성하는 사회 세력, 자율적 기구, 자율적 이익결사체들에 의해 권력이 작용하는 모든 층위, 모든 기능적 영역에서 국가권력을 견제하는 힘을 통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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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제 민주주의는 가장 단순한 선거 경쟁이라는 제도를 통하여 대표-책임이라는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를 지켜 나가게 된다.




Posted by 까만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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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형법 - 10점
양지열 지음/마음산책


 하지만 안타깝게도 법은 여전히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만 고심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쁜 짓을 한 만큼 세게 때려서 정신을 차리게 하겠다는 식인데 그 효과는 미지수다. 시카고 로욜라 대학의 존 브론스틴(John Bronsteen) 교수는 [행복과 벌(Happiness & Punishment)]이라는 논문에서 형벌이 얼마나 범죄자를 바꿔놓을 수 있는지 다루었다. 논문에서 형벌이 얼마나 범죄자를 바궈놓을 수 있는지 다루었다. 그에 따르면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심리 현상인 ‘괘락 적응’이 범죄자에게도 작용한다. 1개월 행복하려면 차를 바구고, 6개월 행복하려면 이성 친구를 바꾸라는 농담이 있지 않은가. 그만큼 사람은 좋은 일에 쉽게 시들해진다는 것이다. 존 브론스틴 교수에 따르면 나쁜 일 역시 마찬가지다. 가슴 설레던 이성에 시들해지는 것처럼 형벌에 대해서도 쉽게 권태기를 맞는다는 것이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모건 프리먼이 그러지 않았던가. 처음에는 답답하게만 느껴지던 감옥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벽에 의지하고 있더라고. 형기가 길건 짧건 수형자는 금방 적응하게 마련인지라 죄에 따라 벌을 달리하는 효과가 적다는 것이다. 게다가 처벌을 받는 과정에서 어떤 경험을 하건 그로 인한 고통스러운 기억이 거의 남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다. 잊을수록 살기 편해져서인지 금세 흐린 기억 속의 그 시절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세게 때려봐야 맞은 것을 기억도 못하니 결국 예방도 기대하기 어렵다. 오히려 교도소에서 범죄 수법을 더 배워 나온다는 얘기가 흔하다. 반면 형기가 길건 짧건 일단 감옥에 익숙해지고 나면 사회에 복귀하는 것에는 똑같이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강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하면서 드는 근거는 주로 예방을 위한 것이다. 잘못하면 크게 혼난다는 것을 범죄자도 알고 주변 사람들도 알아야 감히 죄를 짓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곡 그럴까? 그런 이론이 적용된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의 심진아웃제다. 강도나 절도, 살인 등 같은 범죄를 세 번째 저지르면 반드시 장기형을 선고하는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1994년부터 시행하면서 처음에는 급격하게 범죄자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부작용이 더 컸다. 판사의 재량권이 너무 줄어들다보니 중범죄가 아닌데도 수십 년을 교도소에서 보내도록 하는 판결이 많아졌다. 교도소가 꽉 차 수용 한계 인원을 넘어섰다. 범죄가 발각되면 안 도니다는 생각에 범죄자가 피해자나 목격자를 살해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설령 살인죄로 처벌받더라도 삼진아웃제를 적용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대문이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몇 년간 주춤하던 범죄율이 금방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겁을 주는 것만으로는 범죄를 줄일 수 없다는 단적인 증거였다. 결국 캘리포니아 주는 2012년 삼진아웃제를 폐지했다.

  학자들은 사회가 얼마나 성숙했는가를 측정하는 방법의 하나로 범죄에 대해 얼마나 구체적·개별적 접근을 하느냐를 꼽기도 한다. 범죄를 사회의 병으로 본다면 조금 더 다양한 치료법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경우에 따라 도려내는 수술도 필요하겠지만 보약을 먹여야 할 대도 있다. 예방접종부터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하는데 범죄에 대한 처벌은 삼국시대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갑과 같은 상황에 놓인 범죄자를 갱생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이야기 형법](양지열 지음/마음산책), 140~143)


  '죄와 벌'의 역사는 유구하다. 인류가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하기 시작한 이래로 그 사회의 룰을 어기는 사람은 언제나 있었고 그를 벌하기 위한 개인적·집단적 노력도 언제나 있었다. 그 룰은 명문화된 것이든, 관습화된 것이든 당대 사람들이 인간의 본성에 반하거나 공동체의 질서를 흔들리게 한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막는 것이 목적이었다. 우리는 흔히 '일벌백계(一罰百戒)'라는 말을 자주 쓴다. 한 사람을 벌주어 백 사람을 경계한다는 뜻으로서, 본보기로 한 사람에게 엄한 처벌을 내림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는 뜻이다. 엽기적인 연쇄살인이나 여성·아동에 대한 상습 성폭행 사건이 일어나면 우리 사회는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격한 목소리로 들끓는다. 그런 성난 목소리에 힘입어 법정 최고형량도 늘었고 화학적 거세도 도입됐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나올 때마다 제기되는 반박이 위에 인용한 부분에서 읽을 수 있는 논리다. 엄벌에 처하는 것은 피해자 또는 피해자 가족이 가지는 복수심을 해소시켜줄 순 있겠지만 재범율을 낮추거나 범죄를 예방하는 효과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야기 형법]의 저자가 인용한 존 브론스틴 교수의 논문을 인터넷에서 찾아봤더니 검색이 됐다. 3명이 공저한 것으로서 시카고 대학 법학 학술지(The University of Chicago Law Review)에 실린 논문이었다. 저자들은 이 논문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이 논문은 인간 행복에 관한 행동심리학의 새로운 발견들을 법에서 가장 깊게 분석돼온 질문들에 적용하는 우리의 프로젝트를 계속한다. 한 국가가 범죄자들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 결정할 때 적어도 하나의 중요한 고려사항은 어떤 주어진 형벌이 가할 수 있는 피해의 양이다. 예를 들어 덜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더 큰 피해를 부과하거나 또는 잔인함의 수준으 넘어서는 피해를 부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형벌제도는 범죄에 대한 형벌을 주로 벌금의 규모와 형기의 길이를 조정함으로서 맞추지만 인간 적응성에 관한 새로운 발견들은 이 체계가 기대고 있는 가정들을 흔든다. 특히, 사람들은 재산상의 부정적인 변화들 그리고 심지어 교도소에서의 삶의 여러 특징들에 잘 적응하는 반면 실업, 질병, 사회적 유대의 상실과 같은 출소후의 전형적인 상태에 대해 잘 적응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벌금의 규모나 형기의 길이를 조정하는 것은 부과된 피해의 선형적 형태를 바꾸지 못할 것이다. 두가지 형벌의 규모의 큰 차이가 반드시 각각의 범죄자들이 느끼는 피해에 있어서 큰 차이를 (또는, 어떤 벌금형의 경우에 있어서는 거의 차이를) 낳지 못할 것이다. 이 결과는 형사 행정학과 관련될뿐 아니라 응보주의적 그리고 공리주의적 처벌이론과도 관련이 있다. 형벌에 관한 새로운 접근들은 적응에 의해 제기된 도전을 감안하여 비례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필수적이다. 


본문에 그래프 하나가 등장하는데 이들의 주장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세로축은 수형자가 느끼는 행복의 정도를, 가로축은 시간의 흐름을 나타낸다. 중간 수위에 있던 수형자의 행복감은 교도소 생활이 시작되는 순간 급전직하한다. 이렇게 낮아진 행복감은 형기 끝까지 그대로 유지되지 않는다. 어느정도 시간이 흐른다음 적응시 시작되고 교도소 안이라 하더라도 점점 행복감이 올라간다. 물론 교도소 이전 수준까지 가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한가지 더 눈여겨 볼 것은 수형자가 출소한 다음 느끼는 행복감이 교도소 이전 수준을 결코 회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Posted by 까만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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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 10점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민음사


에스트라공  하지만 우린 약속을 받았으니까.

블라디미르 참을 수가 있지.

에스트라공  지키기만 하면 된다.

블라디미르  걱정할 거 없지.

에스트라공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블라디미르  기다리는 거야 버릇이 돼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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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트라공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리고 있지.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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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중략) 문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뭘 해야 하는가를 따져 보는 거란 말이다. 우린 다행히도 그걸 알고 있거든.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우린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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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남들이 괴로워하는 동안에 나는 자고 있었을까? 지금도 나는 자고 있는 걸까? 내일 잠에서 깨어나면 오늘 일을 어떻게 말하게 될지? 내 친구 에스트라공과 함께 이 자리에서 밤이 올 때까지 고도를 기다렸다고 말하게 될까? 포조가 그의 짐꾼을 데리고 지나가다가 우리에게 얘기를 했다고 말하게 될까? 아마 그렇겠지. 하지만 이 모든 게 어느 정도나 사실일까? 저 친구는 아무것도 모르겠지. 다시 얻어맞은 얘기나 할 테고 내게서 당근이나 얻어먹겠지…….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무서운 산고를 겪고 구덩이 밑에서는 일군이 꿈속에서처럼 곡괭이질을 하고. 사람들은 서서히 늙어 가고 하늘은 우리의 외침으로 가득하구나. 하지만 습관은 우리의 귀를 틀어막지.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겠지. 그리고 말하겠지. 저 친구는 잠들어 있다. 아무것도 모른다. 자게 내버려 두자고. 이 이상은 버틸 수가 없구나. 내가 무슨 말을 지껄였지?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극으로 접한 건 아주 어렸을 적 텔레전을 통해서였다중학생 혹은 고등학생 시절이었던 던 것 같은데 국립극장 같은 데에서 하는 공연을 녹화해서 틀어줬다. 늙수그레한 나이로 분장한 두 남자가 나와서 뜻이 잘 이어지지 않은 대화를 계속 이어갔다. 어린 나이의 내 인내는 그리 오래 버티지 못했고 채널을 돌렸다.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가 누구인지는 전문적인 비평가뿐 아니라 연극 관람자나 희곡 독자 모두가 각자 짐작해볼 수 있겠다. 오히려 나는 고도가 누구인가 보다는 고도를 기다리는 그들의 행위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았다. 객쩍은 농담이나 지껄이다가 돌연 '우리가 뭐하고 있는 거지?'라는 질문에 어김없이 돌아오는 대답이 바로 '고도를 기다리고 있지'이다. 그가 누구인지, 그가 언제 올지, 과연 오기는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버릇'처럼 그를 기다리는 행위를 어떻게 봐야 할까. 사내들은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서 안도하고 있지만, 정작 그 확실하다는 고도를 기다리는 행위는 하나의 버릇에 불과하다. 매일을 다람쥐 챗바퀴 돌듯 살고 있는 우리가 보기에 확실한 것은 '우리가 매일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고 있다'는 사실이지만 이것은 공허한 사실에 불과하다.


이 사실마저도 이야기의 말미에 가면 흔들린다. '밤이 올 때까지 고도를 기다린' 것 마저도 얼마나 사실인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대표적인 부조리극의 하나다.  부조리한 현실 속 인간 존재의 고통과 고독, 헛도는 소통을 보여준다는 부조리극. 어수룩하고 어떨 땐 바보 같은 등장인물이 툭툭 던지는 대사의 행간에 숨겨져 있는 묵직한 생각거리들이 호흡을 가다듬게 한다.


(※구글링을 해보니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사진이 많이 나온다. 유투브에서도 많이 검색된다. 극의 시공간적 배경이 '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 어느 시골길 저녁'이므로 황량하고 쓸쓸한 느낌이다. 그런데 스틸사진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저마다 다르다. 등장인물의 표정도 마찬가지다. 무표정하거나 일그러진 표정과 농담을 하며 웃는 순간으로 대별된다. 감독의 해석에 따라 어둡고 침울한 분위기가 주조를 이루는 경우와 경쾌하게 이어지는 엉뚱한 내용의 대화가 좀 더 부각되는 경우로 나뉘는 것 아닌가 짐작을 해본다. 나의 경우 후자쪽이다. 어릴 적 텔레비전으로 봤던 장면 몇토막에서 배우들의 엉뚱한 대화가 익살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새롭게 읽이면서 가졌던 느낌도 비슷했다. 그래서 좀 덜 어두운 사진을 찾아서 올려본다.)


Posted by 까만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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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더북?! WHAT THE B**K?! - 10점
강용혁 외 지음/엑스북스(xbooks)


1.

(전략) 내 경험으로 보건대, 독서하는 사람 중에 열에 아홉이, 책을 만나는 게 아니라, 다만 소비하는 것에 불과하다.

  책을 만나는 것과 책을 소비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책은 단 한 권만 만나도 엄청난 자기 변화를 꾀할 수 있지만, 책을 몇 천 권 소비해도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자기 고집만 공고해질 수도 있다.


2.

책을 만나는 것과 소비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내게 있어 책을 만나는 것은, 저자의 문장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책이란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책을 소비하는 것은 다만 책을 다 읽었을 뿐, 문장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책을 읽지만, 문장을 기억하진 못한다. 문장은 하나도 기억 못하면서, 책장을 덮고 나면 "아, 재미있게 감동적으로 잘 읽었어!"라고 말한다. 저자는 몇백 쪽 분량으로 말했는데, 독자는 다 읽고 나서 고작 한두 줄로 뭉둥그려 덮어 버린다. 그리고 저자의 약력이나 출신, 판매 부수 따위나 기억한다.

  이렇게 읽으면, 만 권을 읽어 봐야 무용지물이다. 책과 만나려면 문장으로 기억해야 한다. 책은 다만 길게 이어 놓은 문장들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정보들-저자의 나이나 출신, 학벌, 판매 부수 등-은 모두 문장과는 무관한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6.

  (중략)좋은 독서는, 인종이나 나이나 시간대 따위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인류의 빛나는 영혼들의 생각과 똑같은 생각에 독자를 잠기게 만드는 일이다.


8.

  (중략)결국 책을 읽을 때는 좋은 문장, 좋은 단락마다 반드시 표시해 둬야 한다. 아무런 표시도 하지 않고 책을 읽는 것은 결코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소비하는 짓에 불과하다. 밑줄과 표시를 해두고, 소리 내어 낭송해 보거나 따라서 써보기까지 해야 한다.


('부록 책 읽기에 대하여: 좋은 책은 언제나 '더'라고 말한다'(소설가 이만교) 중에서)


지금보다 좀 더 나이가 적었을 때는 '많이' 읽는 것이 항상 소원이었다. 책을 많이 읽어서 많은 지식을 쌓고, 남들보다 더 똑똑해지길 바랐다. 더러는 책에 담긴 내용이 워낙 재밌거나 심금을 울려서 더 읽고자 하기도 했다. 소설이든 인문학 서적이든, 사회과학 책이든 저자의 통찰력이 엿보이는 좋은 문장을 보고는 무릎을 치기도 했다. 그렇다고 내가 남들보다 월등하게 많은 책을 읽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러기엔 너무 게을렀고, 술잔을 나누며 수다를 떠는 걸 너무 좋아했다. 그래서 많은 책을 읽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갈증을 끼고 살았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읽는 책의 권수에 대한 갈증에 더해 읽고 있는 혹은 읽은 책에 대해 내가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떠오르곤 했다. '아무리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책은 나하고 인연이 닿지 않는 책이므로 던져 버린다'는 말을 어느 책에서 읽었던가, 아니면 술자리에서 들었던 얘기였던가? 나에겐 그런 과단성도 부족했으므로 이제 나에게 책은 갈증에 더해 약간의 자괴감까지 더해진 대상이 됐다.


'서평기사'라는 걸 2년 가까이 전담해서 쓴 적이 있으니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내가 너무 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위 글의 필자가 말한 것처럼 나는 여전히 책을 만나기 보다는 책을 소비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는 자책을 피할 수 없다. 다시 밑줄치며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출발점으로 삼기에 충분한 글귀다.



 







(※지난 주말 경기도 광주의 용문산이라는 산엘 다녀왔다. 588미터 높이였는데 산이 제법 가팔랐다. 소나무보다는 밤나무와 참나무 등 활엽수가 무척 많아서 며칠 지나 단풍철이 되면 꽤 아름다울 법했다. 등산로에 도토리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어릴 적 가을만 되면 도토리 주우러 이산저산 쏘다녔던 기억에 한개, 두개 집어서 주머니에 넣다보니 한웅큼이나 됐다. 꽃 사진은 하산길에 들른 '검단산 각화사'라는 절 마당에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다.)

Posted by 까만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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