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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구워진 글

[서평]인빅터스...용서는 증오보다 강했다

다큐멘터리형 글쓰기의 모범적인 작품이다. 별다른 시나리오 작업을 거치지 않아도 영화로 바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구성이 치밀하다. 책을 보고 나면 영화를 꼭 봐야하는가라는 고민이 들 것이다.

용서는 증오보다 강했다
-피부색 상관없이 하나가 된 ‘결승전 기적’
-천부적 리더십과 도전…감동의 역사 다큐
인빅터스 - 10점
존 칼린 지음, 나선숙 옮김/노블마인

1990년 2월11일 한 사내가 자유의 몸이 된다. 46살 때 정치범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그는 무려 27년여를 감옥 등 세상과 격리된 시설에서 보냈다. 자유의 몸이 됐지만 그가 걸어가야 할 길은 날카로운 칼날 위였다. 여러 세대 동안 압제의 칼날을 휘두르던 소수의 백인들, 이들에게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던 그의 동족 흑인들을 하나의 국민으로 묶어내는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서로를 향한 불신과 증오, 복수에 대한 두려움은 나라를 한순간에 내전의 지옥으로 밀어넣을 만큼 팽배했다. 무엇이든 그 도화선이 될 수 있었다. 총성 한 발, 작은 칼날, 주먹질 한번으로 충분했다. 아니, 말 한마디도 불씨가 될 수 있었다. 실제 내전의 위기는 무수히 많았다. 그러나 20년이 흐른 2010년 그의 나라는 월드컵 축구대회 개최를 앞두고 있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그’는 바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버지’ 넬슨 만델라다. 책은 1995년 6월24일 새벽 만델라가 대통령 관저에서 눈을 뜨는 순간에서 시작된다. 남아공 럭비월드컵 결승전이 열린 날이다. 이 날은 역사상 처음으로 남아공에 살고 있던 4300만명이 피부색에 상관없이 진심으로 하나가 된 날이다. 약체로 분류되던 남아공 럭비 대표팀이 강력한 우승후보 뉴질랜드를 연장전 접전 끝에 꺾은 것이다. 흑인과 백인은 관중석에서, 거리에서 어깨를 걸고 발을 구르며 함성을 내질렀다. 눈물을 흘렸다. 그들의 눈물은 단순히 럭비 월드컵 우승이 안겨준 성취감 때문만은 아니다.
만델라의 석방은 흑인들에겐 희망의 새 세상을 꿈꿀 수 있게 했지만, 아파르트헤이트(남아공의 극단적 인종차별제도)를 당연하게 여기거나 적극 지지한 백인들에겐 불안의 시작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투사가 될 수밖에 없던 흑인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복수를 떠올렸고, 권력은 잡고 있지만 압도적 소수인 백인들은 기득권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다. 감옥에 있던 시절부터 흑인들의 우상이자 지도자였던 만델라는 ‘혁명’을 선언할 수 있었다. 하루 아침에 노예에서 주인이 되는 것. 많은 흑인들이 바라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을지 모른다

.
그러나 만델라는 그러지 않았다. 감옥생활을 거치며 그는 ‘무장혁명을 꿈꾸던 투사’에서 ‘용서와 화해의 정치인’이 됐다. 그가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백인 정권과의 오랜 비밀 협상에서 공존을 약속했고, 아파르트헤이트로부터의 질서정연한 퇴각을 고민하던 백인 정권이 그의 약속을 믿었기에 가능했다. 만델라는 백인들의 땅을 빼앗거나 공직에서 쫓아내지 않았다.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구 정권 인사들을 정부 요직에 기용, 연립정부를 세웠다. 흑인들에게도 용서와 이해를 역설했다. 모두가 동등한 국민이 되는 것만이 비극의 역사를 치유할 유일한 해법이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수백년 갈등의 역사가 그리 쉽게 치유되겠는가. 만델라의 해법에 동의하는 사람들이더라도 흑백 사이엔 어색함이 지워지지 않았다. 양측의 강경파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수감 시절 백인 교도관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며 감성이 사람을 움직이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체득한 만델라에겐 복안이 있었다. 바로 럭비다.
원래 남아공에서 럭비는 열광과 증오의 대상이었다. 네덜란드계 후손인 백인 ‘아프리카너’들은 럭비라면 사족을 못쓸 정도로 흥분했고, 그럴수록 피압제자인 흑인에게 럭비는 증오의 대상이 됐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흑인들이 남아공 럭비팀 경기를 보러 간다면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상대팀을 열렬히 응원하고, 남아공팀이 깨지는 장면에서 희열을 느끼기 위해서다. 국제사회에 압력을 넣어 남아공 럭비팀이 국제대회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아프리카너들을 좌절시킬 정도였다.
만델라는 과감하게 럭비 월드컵을 유치하고 럭비 팬을 자처했다. 백인들에게 자신이 진심으로 그들을 용서하고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는 뜻이었다. 럭비에 대해 경멸감을 버리지 못하던 흑인들에겐 백인들에게 심리적 탈출구를 마련해줘야 한다는 논리로 다가갔다. 논리보다는 자신의 카리스마로 억제시켰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의 계산은 적중했다. 공포와 죄책감에 시달리던 백인들은 1995년 6월24일 럭비 월드컵 결승전 관중석에서 흑인들의 저항 노래 ‘응코시 시키렐레’를 불렀고, 백인들의 그 모습에서 흑인들은 용서와 하나됨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이 책은 만델라라는 불세출의 정치인이 가진 천부적 친화력과 리더십, 그 이면에 감춰진 철저한 계산과 담대한 도전으로 역사를 바꾸는 과정을 세밀하게 기록했다. 만델라 본인은 물론 그의 추종자들, 맞은편에 섰던 거물급 인사들, 럭비팀 선수들의 관점과 고백이 교차하는 역사 다큐멘터리이자 럭비를 통한 인간 승리를 그린 감동의 스포츠 드라마다. 남아공의 오늘을 이해하기 위한 입문서로도 제격이다.
마침 이 책을 시나리오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하고 모건 프리먼·매트 데이먼이 출연한 동명의 할리우드 영화가 3월 국내에 개봉된다. 한국어판 제목인 인빅터스(Invictus)는 ‘정복되지 않는’이라는 뜻의 라틴어로, 영국 시인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1849~1903)의 시 제목이기도 하다. 승리를 위해 불굴의 의지를 불태운 남아공 럭비팀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증오보다 용서가 훨씬 더 강력할 수 있음을 증명한 만델라에게도 퍽 어울리는 제목이다. <201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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