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술을 먹거 늦게 들어왔더니 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나의 감정노동의 시작된다. 굽신굽신...
우리는 노동에 대해 말할 때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라는 이분법에 익숙하다. 서양의 근대가 육체와 정신을 분리시키면서 시작됐듯 ‘몸을 써서 하는 노동’과 ‘정신(지식)을 써서 하는 노동’이라는 구분은 근대산업세계의 노동을 분류하는 데 있어 그럴듯해 보인다. 그래서 공장노동자는 육체노동자, 사무직노동자는 정신노동자라는 도식이 정착됐다.
겉과 속의 불협화음 ‘감정도 노동이다’
불쾌해, 욕해주고 싶어, 하지만 내 감정은 중요치 않아. 웃어라 웃어라 그래도 웃어라.
-항공기승무원·채권 추심원 등 속성 탐색
-정신·육체 이분법 외의 ‘감정노동’ 첫 정의
불쾌해, 욕해주고 싶어, 하지만 내 감정은 중요치 않아. 웃어라 웃어라 그래도 웃어라.
-항공기승무원·채권 추심원 등 속성 탐색
-정신·육체 이분법 외의 ‘감정노동’ 첫 정의
감정노동 - 앨리 러셀 혹실드 지음, 이가람 옮김/이매진 |
우리는 노동에 대해 말할 때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라는 이분법에 익숙하다. 서양의 근대가 육체와 정신을 분리시키면서 시작됐듯 ‘몸을 써서 하는 노동’과 ‘정신(지식)을 써서 하는 노동’이라는 구분은 근대산업세계의 노동을 분류하는 데 있어 그럴듯해 보인다. 그래서 공장노동자는 육체노동자, 사무직노동자는 정신노동자라는 도식이 정착됐다.
만약 당신이 고급 레스토랑의 웨이터 혹은 웨이트리스라면 음식을 나르는 행위는 육체노동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불평을 하거나 뻔뻔한 요구를 반복하는 손님이 있다. 당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손님에게 잘못을 묻거나 불쾌한 내색을 해서는 안된다. 한바탕 욕을 해주고 싶은 손님을 상냥한 얼굴로 달래야 하는 당신의 노동은 무어라 불러야 할 것인가. 1983년 쓰인 이 책(원제 The Managed Heart: Commercialization of Human Feeling)은 이처럼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라는 이분법이 담지 못하는 노동의 유형을 ‘감정노동’이라고 처음 정의한 고전적인 작품이다.
미국 UC버클리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인 지은이가 ‘개인의 기분을 다스려 얼굴 표정이나 신체 표현을 통해 외부에 드러내 보이는 것’을 뜻하는 감정노동의 대표적인 사례로 주목한 것은 항공기 승무원이었다. 그는 80년대 초반 세계 최대의 항공사였던 델타 항공 승무원들을 집중조사하면서 감정노동이 이뤄지는 메커니즘, 감정노동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 등을 추적했다.
앞서 예로 든 레스토랑 종업원과 마찬가지로 승무원은 무거운 기내식 카트를 끄는 동안 육체노동을 한다. 비상착륙·비상탈출에 대비하거나 실제로 그런 상황이 발생할 땐 정신(지식)노동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에겐 승객을 안정시키고 기분을 좋게 해야 한다는 또다른 무거운 임무가 주어져 있다. 승무원 자신의 감정은 중요치 않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웃어야 한다. 절대로 불쾌감이나 공포심을 내비쳐선 안된다. 아니, 속으로 불쾌감을 느끼고 있어도 승객이 알아채면 안된다.
내면의 감정과 외부의 상황이 부딪치는 상황에서 승무원이 대응할 수 있는 방식은 세 가지다. 분노를 아예 느끼지 않도록 감정체계를 바꿀 수 있다. 회사가 요구하는 것도 이것이다. 아니면 겉으로만 웃는 연기를 할 수 있다.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이런 대응은 스트레스에 이어 정신과 육체의 소진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은 연기를 거부하는 것인데 이것은 그의 직장생활을 위태롭게 할 것이다.
항상 웃어야만 하는 감정노동이 있는가 하면 항상 무뚝뚝하고 화를 내야 하는 감정노동도 있다. 채권 추심원이 대표적이다. 채무자의 해명이 아무리 정당하다 하더라도 절대 동조하지 않으면서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이 유능한 채권 추심원이다. 지은이는 승무원과 채권 추심원은 빛과 어둠처럼 달라보이지만 감정노동이라는 본질은 똑같다고 말한다.
물론 감정노동이 일터에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감정을 100% 표출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가족이나 친구와의 만남에서도 감정을 다스려 겉으론 다른 표정을 지어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가족과 친구를 위한 봉사 또는 개인적 연구와 사색처럼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일터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문제는 개인적인 영역이라고 치부되는 감정활동이 대가를 받기 위한 행동으로 이뤄졌을 때, 마르크스식으로 말하자면 감정노동이 상품화됐을 경우 발생한다. 노동자가 시장과 기업의 원리에 따라 육체 혹은 정신의 노동물을 빼앗길 때 발생하는 ‘인간소외 현상’이 정신노동에서도 똑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책은 감정노동의 젠더(사회적 의미에서의 성)적 속성에도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감정노동 종사자는 여성이 압도적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감정적인 동시에 감정을 잘 다스린다는 고정관념에다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경향이 덧붙여진 결과다. 승객이 남성 승무원과 여성 승무원을 대하는 태도나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의 미묘한 차이를 생각하면 감정노동의 젠더적 속성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지은이는 감정노동의 문제점을 파헤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지만 감정노동자에게 어떤 행동을 촉구하거나 소비자에게 감정노동자의 표정에 속지 말라고 힘주어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런 역할은 지은이의 연구에 영감을 받아 간호사, 텔레마케터, 교수, 경찰, 미용사 등 다양한 감정노동의 분야들을 탐색한 후속 연구자들이 맡았다.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시간과 장소에서 감정노동을 소비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감정노동을 판다. 백화점에서 로봇처럼 웃는 얼굴이 고정된 점원을 대할 때, 반대로 대형마트에서 불친절한 계산원을 만났을 때 느껴지는 감정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럴 때 단순히 거북함 또는 불쾌감을 느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번 더 생각해 볼 계기를 마련해 준다. 번역자의 해설을 인용하자면 “감정노동자와 그 결과물을 소비하는 소비자가 감정 그 자체에서 소외되는 일이 없도록 관리되고 상품화된 감정과 그렇지 않은 인간 본연의 감정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20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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