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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구워진 글

[서평]나는 노비로소이다

제도사와 미시사를 연결시킨 작품이다. 우리 역사의 맨살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런 작품은 힘을 실어주고 싶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를 짜깁기 해서 아이템 위주로 접근한 다른 역사서보다 공력이 많이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스턴트와 제대로 맛을 낸 음식의 차이라고 할까?

네가 감히…매우 쳐라? “노비도 소송 제기했다”

나는 노비로소이다 - 10점
임상혁 지음/너머북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라는 불후의 유행어를 남긴 <홍길동전>은 조선시대 신분제도의 모순과 엄격함을 그린 고전소설이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1569~1618)이 살아있던 1586년 음력 3월13일 전라도 나주 관아에서 노비소송이 벌어졌다. 조선시대 소송은 곧 노비소송에 다름 아니었다고 할 정도로 노비소송이 흔했다. 오죽했으면 임금까지도 넌더리를 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소송의 원고는 양반 남성인 이지도(李止道), 피고는 여든의 노파 다물사리(多勿沙里)였다.
이쯤되면 대강의 얼개를 추측할 수 있다. 원고는 피고더러 노비라고 주장하고, 피고는 자신이 노비가 아니라고 반박하는 구도 말이다. 그런데 이들의 입에선 의외의 말이 나왔다. 피고 다물사리는 이 책의 제목처럼 양인이 아니라 노비라고 주장하고, 원고 이지도는 다물사리가 양인이라고 주장했다. 요즘 방영되는 드라마 <추노>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상식과는 동떨어져 보인다. 당시에도 이 사건은 흔치 않은 사례였다. 대체 이들에겐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조선전기 민사소송과 소송이론의 전개’라는 흔치 않은 주제를 연구한 저자는 이지도·다물사리의 소송을 통해 조선시대 노비제도와 재판의 실제 모습을 규명했다. “조선시대에도 정립된 재판 절차에 따라 소송이 진행됐고, 엄격한 법의 적용으로 판결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제도사의 앙상한 뼈대에 미시사의 살을 붙임으로써 조선시대의 사회상에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교양서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양인 아니면 천인 가운데 하나로 태어나 특별한 예외가 없는 한 그 신분으로 살다가 죽었다. 천민은 노비라 불렸다. 노비는 재물처럼 취급받았다. 주인이 죽으면 상속문서에 노비 명단이 나열됐고 매매도 가능했다. 조선시대엔 멀쩡한 양인을 몰래 호적에 올려 노비로 만드는 일, 형편이 어려운 양인이 스스로 노비가 되는 일, 노비가 주인 몰래 달아나는 일 등 노비와 관련된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조선 태종은 억울한 백성은 누구든 와서 치라며 신문고를 걸었는데 노비관련 청원이 하도 많자 노비와 관련해선 신문고를 울리지 못하도록 했다. 다툼은 민사소송으로 이어졌다. 조선은 비록 행정권과 사법권이 분리되지 않았지만 현대인의 상식과 달리 매우 정교하고 치밀한 소송 법규와 절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사극에서 흔히 그려지는 조선시대 재판 장면은 요즘 관점으로 보면 불합리하다 못해 우스꽝스럽기 그지 없다. 높은 곳에 앉은 사또는 “네 죄를 알렷다”라고 호통을 치거나, “저놈이 이실직고할 때까지 매우 쳐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이 전부다. 형사재판인지, 민사재판인지의 구분조차 없다. 그러나 조선시대 민사소송 판결문은 우리의 통념을 깨트린다. 조선시대 판결문은 ①판결문을 발급한 날짜와 관청의 이름 ②소장의 내용 ③시송다짐(양 당사자의 소송 개시 합의) ④원고와 피고의 최초 진술 ⑤이후 당사자들의 사실 주장과 제출된 증거 ⑥결송다짐(양 당사자의 변론 종결의 확인과 판결 신청) ⑦판결 내용 등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한눈에도 요즘 판결문 못지않은 논리적 구조를 갖췄으며, 소송 당사자의 의견개진과 증거조사가 철저하게 이뤄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15~16세기에 만들어진 여러 종류의 재판 실무 매뉴얼 역시 이를 입증한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양인 아니면 천인 가운데 하나로 태어나 특별한 예외가 없는 한 그 신분으로 살다가 죽었다. 천민은 노비라 불렸다. 노비는 재물처럼 취급받았다. 주인이 죽으면 상속문서에 노비 명단이 나열됐고 매매도 가능했다. 조선시대엔 멀쩡한 양인을 몰래 호적에 올려 노비로 만드는 일, 형편이 어려운 양인이 스스로 노비가 되는 일, 노비가 주인 몰래 달아나는 일 등 노비와 관련된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조선 태종은 억울한 백성은 누구든 와서 치라며 신문고를 걸었는데 노비관련 청원이 하도 많자 노비와 관련해선 신문고를 울리지 못하도록 했다. 다툼은 민사소송으로 이어졌다. 조선은 비록 행정권과 사법권이 분리되지 않았지만 현대인의 상식과 달리 매우 정교하고 치밀한 소송 법규와 절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위로부터 김홍도의 타작도, 구한말 관청에서의 재판 장면, 조선시대 민사소송에 필요한 규정을 담은 <사송유취>, 학봉 김성일 종택이 보유한 이지도·다물사리 판결문서.

이지도·다물사리 사건으로 돌아가 보자. 이지도는 다물사리가 원래 양인인데 이지도의 아버지 소유였던 노비 윤필과 결혼해 딸 양이를 낳았다고 주장했다. 노비와 결혼했다고 다물사리의 신분이 천민으로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딸은 달랐다.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손 또한 노비가 된다. 양이는 노비인 구지와 결혼해 6남매를 낳았다. 그런데 노비끼리 결혼할 경우 자녀의 소유권은 여성 노비의 주인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규정돼 있었다. 양이가 자신의 가문 소유이므로 양이가 낳은 6남매 역시 자신의 가문 소유라는 것이 이지도의 주장이었다.
반면 다물사리는 아버지는 누군지 모르고 어머니는 성균관 소속의 관노비였으므로 자신 또한 관노비라고 주장했다. 어머니가 관노비이면 아버지가 사노비라 할지라도 자손은 모두 관노비가 된다. 따라서 딸 양이를 비롯해 손자·손녀 모두 이지도 가문의 사노비가 아니라 성균관 소속의 관노비라는 것이 다물사리의 주장이었다.
이들의 주장엔 조선시대 노비제도의 다양한 면모가 압축돼 있다. 조선시대 노비는 크게 관청에 소속된 관노비, 양반가에서 부리던 사노비로 분류된다. 사노비는 다시 주인집에 살면서 온갖 노동을 제공한 솔거노비, 밖에 나가 살면서 실제 노동 혹은 금전으로 대가를 치른 외거노비로 나뉜다. 그런데 사노비보다 관노비의 처지가 상대적으로 나았다. 이지도는 자신의 재산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으려 한 것이고, 다물사리는 어떻게 해서든 자손들을 사노비의 사슬에서 끌어내 그나마 처지가 나은 관노비로 만들려 한 것이다.
양측의 주장이 맞설 때 중요한 것은 증거다. 조선시대에도 문서의 증거능력이 최우선이었다. 현명한 법관으로 이름을 날린 나주목사 김성일은 원고와 피고의 주장을 청취한 뒤 국가의 공적 장부인 호적과 관청의 천민명단 등을 면밀히 조사하고, 주변인들을 불러 증언을 청취했다. 그런 다음 양 당사자에게 다시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문서 증거는 다물사리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소송 시작 한달 남짓인 4월19일 판결이 내려졌다. 이지도의 승소였다.
우리는 <홍길동전>을 보면서 공분과 통쾌함을 느끼지만 ‘나의 조상’과 쉽사리 연결시키지는 못한다. 길을 막고 물어본들 자신이 노비의 후손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겉으로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는가. 조선시대 노비의 수가 전체 인구에서 적게는 3분의 1, 많게는 3분의 2나 됐다는 것을. 단순대입하면 대한민국 사람 세명 가운데 한명 혹은 세명 가운데 두명은 노비의 후손이라는 말이 된다. 따라서 이 책에 등장하는 다물사리 일가를 비롯한 노비들의 애환어린 숨결은 나 또는 당신 조상의 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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