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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책동네산책

"고전 읽기, 행복한 줄 알아!"

어린 시절 책에 관한 나의 최초의 강렬한 기억은 아버지가 초등학교 졸업기념으로 사주신 40권짜리 <동서양 전래동화 전집>이다. 외딴 산간마을을 찾아온 책 외판원을 통해 구입한 이 전집은 한 권에 200쪽이 넘었는데, 방학 동안 모두 읽어버렸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책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 별로 없다.

넉넉지 않은 형편이라 새로 전집을 선물받는 일도 없었고 학급문고에 꽂힌 책들은 대부분 허접했다. 사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학교 시험 준비에 허덕이다 보면 남는 시간은 놀기에도 빠듯했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동서양 고전은 참고서가 ‘친절하게’ 요약해준 줄거리를 밑줄 치며 외웠다. 허다한 고전들은 이처럼 시험 성적을 올리기 위한 ‘학습’을 통해 앙상한 기억들만 남겼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작품을 뜻하는 고전. 하지만 시대배경이 다르고 현재 우리가 쓰는 문자나 문체와 달라 딱딱하게 느껴지는 고전을 직접 읽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누구나 제목은 알지만 누구도 읽지 않는 게 고전’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은가.

특히나 어린이·청소년에게 고전은 우주 저 멀리에 있다는 안드로메다만큼이나 멀게만 느껴진다. 이런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 그간 손쉽게 시도됐던 방식이 원본을 짜깁기 혹은 변형하거나 만화로 풀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동서양의 고전들을 원전에 가까우면서도 우리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읽기 쉽도록 재해석하는 시도들이 몇몇 출판사에서 이어졌고 결실을 맺고 있다. ‘창비’는 2003년 <토끼전>을 처음 펴낸 이래 지난해 말 20권째인 <최척전>을 마지막으로 ‘재미있다! 우리 고전’ 시리즈를 완간했다. 이 시리즈는 아이들에게 우리의 옛이야기를 원문 그대로 읽히고 싶어하는 부모와 선생님들에게 어필했고 성공을 거뒀다. 올해 초 시리즈 가운데 4권의 판권이 일본에 수출되기도 했다.

‘알마’에서도 2006년부터 ‘샘깊은 오늘고전’이란 타이틀 아래 한문으로 쓰인 우리 고전들을 한글로 다듬어 펴내고 있다. 픽션과 논픽션의 구분을 두지 않은 이 시리즈 역시 조각나고 찢긴 채 읽히고 있는 우리 고전의 원래 이야기를 그대로 살려내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시리즈 목록을 보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들을 발굴하는 것에도 신경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이번주에 나온 <표해록>은 성종·연산군 시대의 문신관료인 최부가 바다를 표류하다 중국 남부지방에 도착, 베이징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아이세움’ 역시 2006년부터 ‘나의 고전 읽기’라는 독특한 시리즈를 시작했다. 전문 연구자들이 <자산어보> <삼국유사> <사회계약론> <법구경> <공산주의 선언> 등 동서양 논픽션 고전의 원문을 발췌해 독창적인 시각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 나온 14권째 책인 <미래를 창조하는 나>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소재다. 원문을 잘근잘근 씹어 소화하기 좋게 펼쳐 놓았다는 느낌을 준다.

‘명불허전’이라더니 이런 책들을 보면 ‘역시 고전(古典)은 고전(高典)’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의 솔기마다 생각의 샘들이 놓여 있다. 전래동화 전집이 유소년 시절 독서기억의 전부인 나로선 요즘 아이들이 부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말인데 요즘 유행하는 말로 아이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행복한 줄 알아. 이것들아!”  <2009. 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