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0/구워진 글

<서평>유시민·강상중…'내 젊음을 뜨겁게 달구었던 책과 사유들'

2005년 가을이었다. 내가 유시민씨를 처음 만난 때가. 당시 총리실을 출입했던 나는 중동 5개국 순방길에 나선 이해찬 총리를 수행취재하고 있었는데 이해찬 총리의 보좌관 출신으로서 열린우리당 의원이었던 유시민씨도 이 순방에 동참했다. 이듬해에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었고, 열린우리당 내부에선 이미 당시부터 친노, 반노로 나뉘어 다툼을 진행하고 있었다. 친노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유시민씨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기자들의 촉각이 곤두섰지만 유씨는 능숙하게 '기사꺼리'가 될만한 질문은 피해갔다.

순방 대상국 가운데 하나인 두바이를 방문했을 때다. 두바이는 지난해 세계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쪽박을 차게 생겼다는 기사가 나오긴 했지만 바다에 인공섬을 만들고 사막에 마천루를 지으면서 최근까지도 사막의 기적으로 추앙받았다.

두바이가 바다에 건설중인 '팜 아일랜드'를 방문했을 때다. 야자수 모양으로 만들어지는 인공섬 팜 아일랜드는 세계지도 모양의 인공섬 '더 월드'와 함께 발상의 전환의 상장이자 두바이의 랜드마크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인공에 인공을 더한 이런 건설 현장이 왠지 불편하게 여겨졌다. 어느 밥자리에선가 유씨가 팜 아일랜드에 대해 평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불편함이 그의 말 한마디로 정리가 됐다.


 
"팜 아일랜드는 야자수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삼엽충 처럼 보이기도 한다. 두바이가 이런 일들을 벌일 수 있는 근원은 화석연료(석유)에서 나오는데 삼엽충 모양의 팜 아일랜드는 아마도 화석연료 시대의 기념물이자 화석으로 남게 될 것이다."

모두가 팜 아일랜드의 장관에 감탄하고 있을 때 그도 나처럼 과도한 인공성에 대한 불편함을 느꼈던 것이다. 나는 그 불편함을 적절하게 표현할 말을 찾아내지 못했지만 그는 명료하게 정리를 해냈다. 그 후 정당을 출입하면서 그를 가까이서 본 적이 여러번 있었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정치권과 대중들 사이에서 평가가 극단으로 나뉜다. 나 역시 정치적 맥락에 놓인 그에 대해선 이런 저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럴수록 두바이에서의 기억이 강렬하게 떠오른다.
 
강상중씨와의 첫 만남은 몇년전 우연히 접한 <재일 강상중>(삶과꿈)이라는 그의 자전적 에세이를 통해서였다. 이 책을 보기 전까지 강상중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상당히 우울했떤 젊은 날을 그린 이 책을 보면서 현재를 살고 있는 재일 조선인들의 갈등과 애환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강상중씨가 상당히 어두운 사람이라고 믿어버렸다. 2006년 남북정상회담 5주년 기념 심포지엄에 발제자로 나선 강상중씨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이런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그는 영문으로 된 장문의 발제문을 내놓았는데 청중을 한번도 쳐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줄줄 읽어댔다. 짧은 시간 내에 영문 발제문을 읽어댔으니 동시통역사가 무척이나 곤혹스러워하는 것을 이어폰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재일 강상중 - 10점
강상중 지음/삶과꿈

고민하는 힘 - 10점
강상중 지음, 이경덕 옮김/사계절출판사

올봄 강상중씨의 <고민하는 힘>(사계절)이 번역출간 됐는데, 이 책을 계기로 강씨가 실제로는 상당히 활달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한국 독자들을 위한 강연을 취재하러 갔는데 시작 전 출판사 소개로 잠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한국어는 거의 하지 못하지만 위트 있는 말들을 자주했다. 강씨는 오래전부터 주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NHK 방송국의 아침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하고 있는데 일본 아줌마들 사이에서 인기가 상당하단다. 재일 조선인만 아니라면 도쿄도지사 선거에 나가도 승산이 있을거란 말도 나온단다.

유시민과 강상중씨의 유사한 컨셉트의 책-제목도 거의 비슷해서 헷갈리는 사람까지 나오고 있단다-이 동시에 나왔다. 출판사에 두사람의 대담을 붙여보면 어떻겠느냐고 농담삼아 말했더니 아닌게 아니라 그런 이벤트도 염두에 두고 있나보다.

 책의 계절이다. 청춘의 뜨거움과 푸름을 담았던 책을 기억하고 계시는지. 장정일 시인은 '열 다섯 살,/ 하면 금세 떠오르는 삼중당 문고'라고 시작되는 시 '삼중당 문고'에서 '파란만장한 삼중당 문고/너무 오래되어 곰팡내를 풍기는 삼중당 문고/어느덧 이 작은 책은 이스트를 넣은 빵같이 커다랗게 부풀어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네'라고 읊었다. 그런가 하면 사계절 출판사 강맑실 대표는 출판전문지 '기획회의' 최근호에 실린 글에서 "책이 경쟁사회에서 남을 누르고 이기는 도구로 전락해가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책을 읽으면서 우리의 경험은 확장되고 생각은 깊이를 얻어야 한다. 그리하여 독서는 한 사람의 행동 변화, 더 나아가서는 사회의 변화를 가져오는 힘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유력 정치인에서 '지식 소매상'으로 돌아온 유시민씨(50)와 도쿄대 최초의 재일 조선인 출신 교수 강상중씨(59)가 각각 내놓은 <청춘의 독서>(1만3800원)와 <청춘을 읽는다>(이목 옮김·1만2000원)는 공교롭게 겹친 출간시기와 헷갈릴 정도로 유사한 제목 외에도 닮은 점이 많다. 두 책 모두 그들의 청춘을 뜨겁게 달구었던 책들을 중년을 넘긴 나이에 꺼내들어 회고한다는 점에서 장정일적이고, 그 책들이 저자들의 사유를 넓히고 행동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강맑실적이다.
청춘의 독서 - 10점
유시민 지음/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학생운동에 투신해 제적과 복학을 거듭하고 사회에 나와 칼럼니스트로서, 정치인으로서 항상 논쟁의 중심에 서 있던 유시민씨는 현재 재야에서 침잠하고 있지만 세인들은 그를 여전히 '정치적 화약고'로 바라본다. 그는 "날이 저물어 사방 어두운데, 누구도 자신 있게 방향을 잡아 발걸음을 내딛지 못한다"면서 자신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면서 "갈림길과 장애물이 나타날 때마다 도움받았던 낡은 지도" 14권을 호명했다. 이 책들을 읽었던 20~30년 전의 자신에게 귀 기울이는 동시에, 대학 신입생이 된 그의 딸을 포함한 이 땅의 청춘들에게 말을 걸어보려는 시도다.
 대학입시를 한 달 앞두고 읽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그에게 "가난의 책임이 나 한 사람뿐 아니라 사회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안겨줬고, 대학 신입생 시절 지하서클 선배들의 권유로 읽은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는 '벌거벗은 임금님'으로서의 미국에 눈뜨게 해줬다. 자취방의 침침한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을 읽고는 "조각배를 타고서 거센 너울이 일렁대는 바다에 나간 것처럼 온몸이 일렁"거림을 느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의문을 풀지 못했기에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도, 주사파도 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영등포 구치소에서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고는 얼마나 감동을 받았던지 편집자 서문에 인용된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시구를 자신의 항소이유서에 덧붙였다. 그는 25년이 지난 지금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아무리 혹독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는 사람. 땀 흘려 일하는 사람. 때로 보상받지 못하는 노동이라 할지라도 인간에게 유용한 것을 만드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의 모습이 주는 감동"이 여전히 자신의 마음에 남아 있음을 발견한다.
청춘을 읽는다 - 10점
강상중 지음, 이목 옮김/돌베개

 재일 조선인으로 태어나는 순간 예고됐던 깊은 방황과 질곡을 10대 후반에서부터 20대 후반까지 온몸으로 경험했던 강상중씨가 써내려간 독서노트에는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 보들레르의 <악의 꽃>, T·K生의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의 사상>,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담겨 있다. 자신이 젊은 시절 읽었던 책들을 통해 지금의 청춘들에게 말을 거는 것은 올해 상반기에 번역된 그의 책 <고민하는 힘>과도 맞닿아 있다. "현대라는 시대가 왠지 1960년대에서 70년대의 시대로 회귀하는 것 같은 느낌"도 그로 하여금 '과거의 책'을 다시 펴보게 했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강씨가 열일곱 살 때 처음 접하고 "날카로운 언어의 칼이 나를 푹 찔러 심장을 깊숙이 도려내는 듯한 아픔과 함께 놀라움을 느꼈다"는 <악의 꽃>에 관한 부분이다. 존재를 스스로 파괴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여 있던 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천사가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악마다. 천사를 바라지 마라. 우리는 악마를 바란다"는 보들레르의 분노와 퇴폐는 역설적이게도 어두움과 자살로부터 구원해줬다는 것이다.
 '독서의 계절이지만 사람들이 가장 책을 읽지 않는 계절'이라는 가을이다. 모두가 독서노트까지는 아니더라도 유년 시절 혹은 청년 시절 자신의 머리와 마음을 강타했던 책들을 꺼내보는 건 어떨까. '지금이 아니면 언제 내가 이 책을 다시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책들을 말이다. <2009.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