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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구워진 글

<서평>밴버드의 어리석음


역사는 승자만을 기억한다는 것은 다 아는 뻔한 얘기다. 이 책은 실패자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곡절을 살폈다. 저자가 서문에서 썼듯 "우리는 자신을 선량한 사람으로 여기고, 열정을 가지고 있으면 누구에게나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믿는다. 아니 믿고 싶어한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가? 노력만으로 성공할 수 없는게 인생이고, 사기와 협잡이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보여주는 사람이 허다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열심히 노력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해서 인생마저 실패했다고 할 수 있는가.

때론 승자의 이야기보다 패자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는 법. 사실 우리는 성공한 사람보다 실패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더 높은 것 아닌가?

외고집과 광기, 기발했으나 치명적인 결함…잊혀진 이름 13인
밴버드의 어리석음 - 10점
폴 콜린스 지음, 홍한별 옮김/양철북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고 했던가. 어머니의 탯줄을 끊고 나와 세상의 빛을 본 사람 치고 이름이 없는 사람이 없으니 죽어도 이름이 남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가고 없는 그 사람을 기억해줄 사람이 있는가다.
윌리엄 헨리 아일랜드, 조지 살마나자르, 존 밴버드, 존 클리브스 심스, 르네 블롱들로, 장 프랑수아 수드르, 이프리엄 불, 앨프리드 엘리 비치, 마틴 파쿼 터퍼, 로버트 코츠, 오거스터스 J 플리즌턴, 딜리아 베이컨, 도머스 딕. 이런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없을 것이다. 당연하다. 20세기 이전 유럽과 미국에서 살았던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유럽과 미국에서도 거의 없다.
혹시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딜리아 베이컨 정도는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우리가 셰익스피어가 썼다고 알고 있는 작품들을 프란시스 베이컨을 비롯한 다른 이들이 썼고 셰익스피어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당대에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지만 현대에도 가끔 제기되는 셰익스피어 진위 논란은 대부분 그녀의 이름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이처럼 '기발하지만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사상가들, 지성과 명성의 최고점까지 올라섰다가 실패, 조롱, 혹은 철저한 망각에 묻혀 버린' 13명의 이름을 끄집어냈다.
책 제목에 등장하는 미국인 화가 밴버드부터 보자. 밴버드는 1850년대 전 세계에 생존한 화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으며 백만장자 예술가였다. 그는 긴 천에 그림을 그려 둘둘 만 뒤 돌리면서 관객에게 보여주는 '움직이는 파노라마'를 개발했다. 필름이 아닌 그림을 이용한 영화의 일종인 셈이다. 대표작은 미시시피강의 풍경을 그린 대작 '3마일(약 4.8㎞) 그림'이다.
이 작품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초청돼 상연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고 밴버드는 속된 말로 갈퀴로 돈을 긁어 모았다. 그는 이렇게 번 돈으로 어마어마한 저택을 지었고 사람들은 이 건물을 '밴버드의 어리석음(Banvard's folly)'이라고 불렀다. 밴버드는 야심차게 거대한 박물관을 지었지만 파산함으로써 자신을 나락으로 밀어넣었다. 그가 개발한 움직이는 파노라마 방식은 약삭빠른 사람들에게 모방돼 밴버드의 작품은 대중에게 버림받았다.
이프리엄 불은 또 어떤가. 불은 미국에서 포도로 만들어지는 주스나 젤리, 잼 등의 원료로 가장 많이 쓰이는 포도 종자인 콩코드를 개발한 농부다. 원래 미국땅에서 자생하던 포도 종자는 신맛 때문에 사람들이 먹지도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유럽에서 들여온 종자는 미국의 토양에 적응하지 못해 질좋은 포도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포도나무를 좋아했던 불은 각고의 노력 끝에 맛좋은 포도를 생산하는 포도나무를 만들어 자신이 살았던 마을의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당시 미국의 특허법은 생물체는 보호하지 않았기에 불은 미국 전역에 자신이 개발한 포도나무가 퍼져나갔지만 몇푼 벌지 못했다. 오히려 토머스 웰치라는 사람이 콩코드 포도를 이용해 무알코올 와인 즉, 포도주스를 만들면서 떼부자가 됐다. 포도주스로 유명한 '웰치스' 상표를 만든 사람이다. 사업에 실패한 불은 양로원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고, 그의 묘비에는 자신이 지은 문구가 새겨졌다. '그는 뿌렸고, 다른 이들이 거두었다.'
기막힌 솜씨로 셰익스피어의 문체를 흉내내 영국인들을 감쪽같이 속였던 아일랜드, 빅토리아 여왕 시절 실질적인 계관시인(영국 왕실이 국왕을 위한 시인으로 임명된 사람에게 주는 칭호)으로 칭송받았지만 지금은 영국 문학사에서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는 터퍼, 언어를 음계로 바꿔 음악으로 만국 공통의 언어를 만들었다고 자부했던 수드르….
이들 중에는 위조와 사기로 세상을 속인 사람도 있지만 시기를 잘 만났으면 어쩌면 성공 했을 사람도 있다. 어쨌든 이들은 이름을 남기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이들을 '실패자'라고 쉽게 단정지을 수 있을까. 냉정한 역사에 의해 기억의 밖으로 밀려났지만 자신의 아이디어와 재능을 펼치기 위해 당대의 그 누구보다 뜨거운 열정을 내뿜었던 이들의 인생마저도 실패라고 말한다면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생은 과연 무엇인가. <2009.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