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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미국 대법원장 민주주의 걱정의 ‘모순’

존 로버츠 미국 연방대법원장이 최근 발표한 연말 보고서가 미국 언론 주목을 받았다. 소셜미디어를 통한 거짓 정보 유통이 민주주의에 끼치는 위험성을 경고한 대목이 마치 ‘가짜뉴스 공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겨냥한 것 같다는 추측을 낳았기 때문이다.

“미국 헌법 원리는 폭도의 폭력에는 자리를 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면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당연하게 여기게 됐고, 시민 교육은 도중에 실패했습니다. 소셜미디어가 순식간에 소문과 거짓 정보를 대규모로 확산시킬 수 있는 우리 시대에는 대중이 정부와 정부가 제공하는 보호들을 이해해야 할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미국 대법원장은 연말마다 짧은 보고서를 내는데 2005년 취임한 로버츠 대법원장은 늘 역사의 일화를 서두에 앞세웠다고 한다. 이번엔 헌법 원리 해설서로 유명한 <연방주의자 논설> 집필자 가운데 한 명이자 훗날 초대 연방대법원장이 되는 존 제이의 일화를 소개했다. 1788년 의대생들이 묘지에서 시신을 도굴해 해부학 실습에 사용하고 있다는 소문에 분노한 뉴욕 시민들이 일으킨 이른바 ‘의사 폭동’ 당시 제이가 시위를 제압하려고 나섰다가 돌에 맞아 죽을 뻔했다는 것이다. 앞서 소개한 글의 폭도 얘기는 여기서 나왔다.

로버츠 대법원장이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을 겨냥했거나 말거나, 민주주의가 위협당하고 있다는 우려는 그가 내려온 판결과 모순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취임 당시 50세로 역대 세번째 최연소였던 그가 대의민주주의의 핵심인 선거제도를 왜곡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법률과 판례를 허무는 데 앞장서 왔다는 것이다. 특정 지역에 한해 투표 제도 변경 시 연방정부의 승인을 받도록 함으로써 인종이나 피부색을 이유로 투표권을 제약할 수 없도록 한 ‘선거권법’을 유명무실하게 만든 2013년 ‘셸비 카운티 대 홀더’ 사건 판결, 사법부가 특정 정파의 당리당략을 위해 선거구를 기형적으로 획정하는 ‘게리맨더링’을 심판할 권한이 없다는 지난해 6월 판결이 대표적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엘리트주의적 관점도 엿보인다. 소셜미디어 시대가 아니라도 소문과 거짓 정보의 위험성, 시민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다만 로버츠 대법원장의 글에선 소셜미디어를 통한 ‘여론’을 단순하게 폭도로 싸잡으면서 폄하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든다. 피지배자 사이의 지식과 정보 유통을 두려워하며 억압했던 봉건시대 지배자를 연상한다면 지나친 일이겠지만 말이다.

그가 든 역사적 사례도 논지를 뒷받침하기엔 부적절해 보인다. 근대 서구 의학 발달 과정에서 해부용 시신 부족은 공통적 현상이었다. 이른바 의사 폭동 당시 뉴욕에서도 해부 실습을 위한 시신 도굴은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이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이 컸다. 일부 시민들은 이를 근절해달라는 청원을 했음에도 뉴욕시는 무시했다. 시민들의 소요 사태가 있은 다음에야 해부용 시신 관련 절차와 규정이 확립됐다는 게 역사적 평가다. ‘목욕물을 버리다가 아이까지 버리지 말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소셜미디어가 일상화된 현대사회에 거짓 정보의 유통을 막겠다며 소통 가능성 자체를 억압하는 게 바로 그 꼴이 될 것이다.

(2020. 1. 7)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1071520011&code=990334#csidxc1d93b8e7b1dd9e9a35201c4a74e1c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