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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트럼프 독트린과 미국의 퇴각

2017년 7월 중순쯤 언론인 연수 프로그램 참석차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워싱턴에서 머문 짧은 기간 동안 연수 참가자들이 미국 국방부·국무부 관계자 및 싱크탱크 전문가들에게 가장 많이 던졌던 질문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 정책, 특히 동아시아 정책의 기조는 무엇인가?’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고 6개월 남짓 지난 시점이었다. 싱크탱크 전문가들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동아시아 정책은 없다’는 것이었다. 중국 봉쇄라는 정책 방향은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전혀 유추할 수 없는 상태라는 설명이었다.

동아시아 정책만이 아니었다. 사실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정책 노선 전체가 안갯속인 상황이었다. 뉴욕타임스는 2017년 4월8일 ‘트럼프 독트린의 부상: 독트린을 따르지 말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후보 시절 시리아 내전은 미국의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했던 그가 화학무기 사용을 응징한다면서 시리아 공군기지에 미사일 공격을 지시한 직후 나온 기사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연설에서 “의도치 않은 결과로 우리를 이끌었던 경직된 이데올로기를 거부할 것”이라면서 “우리의 가치와 목표에 따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비슷한 시기 “나는 매우 유연한 사람”이라면서 “나는 내가 어디로 향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하길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를 두고 ‘예측불가능성’이 그의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일관성 있는 트럼프 독트린은 없다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예측불가의 행동도 거듭되면 ‘패턴’이 드러나는 법이다. 개별 사안에 대한 그의 판단은 여전히 즉흥적인 면이 있지만, 사례가 축적되면서 귀납적 추론을 통해 ‘트럼프 독트린’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나타났다. 특히 지난 9월25일 트럼프 대통령의 74차 유엔 총회 일반토의 연설과 지난달 23일 시리아 철군에 관한 백악관 기자회견은 트럼프 독트린을 도드라지게 내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유엔에서 한 연설의 핵심은 “각자가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면 세계는 모든 나라에 더 좋은 곳이 된다”는 것이었다. 각국 지도자들에게 ‘국제주의’에 눈을 돌리기보다는 각자의 나라, 각자의 국민을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진력하라고 충고했다. 일종의 ‘자유방임주의’라고 해야 하나. 세계 각국이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노력하면 이민문제 같은 것은 생기지 않는다는 논리다. 74년 전 2차 대전의 참화를 딛고 탄생한 유엔에서 미국 대통령이 한 연설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극도의 민족주의를 강조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시리아 철군을 강행하며 밝힌 군사개입 원칙은 더욱 직설적이다. 그는 “후보 시절 나는 미국 외교 정책이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경험과 역사, 세계에 대한 현실주의적인 이해에 의해 인도되는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면서 해외에서 미군이 개입할 3가지 원칙을 설명했다. 첫째, 미국의 국가적 이익이 명백히 걸려 있어야 한다. 둘째, 분명한 목표와 승리의 계획이 있어야 한다. 셋째, 분쟁에서 빠져나올 경로가 존재해야 한다. 만약 이런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미국의 직접적 이익이 걸려 있지 않다면 그들끼리 싸우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겠다는 게 트럼프 대통령의 의지다.

평가는 다양할 수 있지만 20세기 초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은 그간 세계 질서 유지라는 일종의 공공재를 제공해온 것은 사실이다. 국제무대에서 미국이 퇴장하면 그 자리엔 공백이 생긴다. 공백은 채워져야 하는 게 물리법칙이다. 공백을 차지하기 위한 각축전은 이미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마찰은 불가피하다. 역사가들은 1차 대전과 2차 대전 발발의 가장 큰 원인으로 민족주의와 자본주의의 심화를 꼽는다. 트럼프 독트린의 파장은 이제 시작이다.

(2019. 11. 5)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11051706001&code=990334#csidx1c1906a958d4cbb8d655583b09247a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