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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기로에 선 미국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의 공저자 스티븐 레비츠키 하버드대 교수는 지난달 미국 코넬대에서 열린 학술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장군들이 아니라 선출된 지도자들, 즉 대통령, 총리의 손에서 죽는다. 시민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완전히 이해했을 땐 너무 늦다.”

레비츠키 교수는 민주주의 위기를 분석하면서 미국 역시 남미 국가들이 지난 세기 연속되는 쿠데타와 독재를 경험할 때 맞닥뜨린 것과 같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주장해 논쟁을 일으켰다. 그의 이론의 핵심은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인물과 세력을 ‘경쟁자’를 넘어 ‘적’으로 규정하는 ‘관용의 고갈’, 즉 ‘정치적 양극화’가 극단적 포퓰리스트의 등장을 촉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책이 미국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주목을 받은 것은 정치적 경쟁자를 향해 ‘반역자’ ‘인간쓰레기’라는 욕설을 쏟아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과 깊이 결부돼 있다.

‘연방정부 셧다운’과 함께 2019년을 시작한 미국이 올 한 해 보여준 모습을 돌아보면 미국 민주주의 위기의 징후는 분명해 보인다. 35일간의 연방정부 셧다운을 야기한 쟁점은 트럼프 대통령의 대표 공약이었던 남부 국경 장벽 건설 예산이었다. 민주당은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한 거액의 장벽 건설 예산에 대해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잘랐고, 트럼프 대통령은 “정부가 몇 달, 몇 년이 멈춰서도 상관없다”고 버텼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이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해 다른 예산에서 장벽 건설 예산을 끌어오고, 민주당은 이 조치를 법원에 제소함으로써 각자 ‘체면’을 살리는 선에서 끝났다. 법원은 나중에 트럼프 대통령의 손을 들어줬다.

정부·여당과 야당이 국가 재원 배분의 우선순위를 놓고 갈등하고 대립하는 것은 ‘견제와 균형’을 기본 원리로 하는 민주주의에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정부가 한 달 이상 멈춰서는 진통에도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면 정치의 기능 부전이 아닐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3년차였던 올해도 쉼없이 ‘분열의 정치’를 구사했다. 거짓말을 서슴지 않았고, 그를 비판하거나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인사에 대해 조롱과 인신공격을 퍼부었다. 자신이 임명한 각료나 고위 공직자일지라도 지시를 거스르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칼날을 휘둘렀다.

민주당은 마침내 트럼프 대통령을 탄핵심판대 위에 올렸다. 그가 정치적 경쟁자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의 부패 의혹을 조사하라고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압박하면서 군사원조와 백악관 초청을 지렛대로 사용해 권한을 남용한 혐의를 포착했고, 이를 조사하려는 의회의 헌법적 권한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이 장악한 하원이 조만간 본회의를 열어 미국 역사상 세번째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키면 무대는 상원으로 옮겨지지만 트럼프가 강제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일은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상원을 장악한 공화당은 ‘전광석화’처럼 무죄 판결을 내릴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배경엔 공화당 지지자 10명 중 8명은 탄핵에 반대한다는 사실이 자라잡고 있다. 물론 민주당 지지자 10명 중 9명은 탄핵에 찬성한다.

미국인들은 2020년 ‘선거의 해’를 맞는다. 앞서 말한 코넬대 학술행사에서 한 정치학자는 내년 대선과 관련해 일견 황당한 상상으로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한번 유권자 투표에서 지고도 선거인단 투표에서 이길 경우 친트럼프·반트럼프 집단이 워싱턴에서 격렬하게 충돌하고, 심지어 교외에선 무장 민병대가 등장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미국인 5명 가운데 1명이 정치적 폭력을 일부 용인할 의향이 있고, 4명 중 1명은 정당별로 나라를 쪼개면 좋겠다고 응답했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있다. 민주주의 선진국으로 불리던 미국의 현주소다.

(2019. 12.17)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12171617001&code=990334#csidxf64578b1bcca49bb4fb4c792830ca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