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특파원 칼럼

‘100%’ 트럼프표 외교시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전격 경질했지만 의외는 아니었다. 미국 언론에서 볼턴 경질설이 처음 나온 것은 올봄이었다. 이후 나온 경질설을 모두 합치면 그는 족히 서너 번은 밀려났어야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반년 가까이 참았거나, 볼턴이 용케 잘 버텼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미국과 경쟁 혹은 적대관계에 있는 상대는 물론이고 전통적인 동맹 및 우방을 상대로 변칙적인 외교를 펼쳤다. 공 여러 개를 공중으로 연속해서 던지고 받는 저글링 묘기를 하는 것처럼 중국, 이란, 북한, 시리아, 탈레반, 베네수엘라 등을 상대로 ‘압박’과 ‘대화’를 오갔다.

실적은 빈약하다. 작년 5월 이란핵합의(JCPOA)를 일방적으로 탈퇴하고 이란에 ‘최대의 압박’을 펼쳤지만, 이란은 미국이 내건 12가지 요구에 화답하기는커녕 핵합의가 제한했던 핵활동 빗장을 하나씩 풀어가며 저항 중이다. 호르무즈 해협 인근 유조선 피습, 미군 드론 격추,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시설 피습 등을 겪으며 중동정세는 악화됐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2차례 정상회담을 하고 판문점 ‘번개’ 회동에선 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을 밟았지만, 북한 핵보유량은 계속 늘고 있다.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불법정권’으로 규정하고 임시 대통령을 자처한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을 적극 지원했지만 마두로는 권좌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9·11테러 18주기를 코앞에 두고 탈레반 지도부를 캠프 데이비드로 불러들여 평화협정을 맺는 이벤트를 기획했다 불발돼 미국 내 반발만 샀다.

‘거래의 기술’을 자랑해온 그로선 머쓱한 상황이다. 볼턴을 경질함으로써 분위기 쇄신이 필요하다고 느꼈음직하다. 다음 미국 대선이 15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상황이다.

실제로 그는 볼턴이 이른바 ‘리비아 모델’을 북한 비핵화 방식으로 거론한 것은 ‘재앙’에 가까운 실수였다며 이미 잘린 그를 김정은 위원장에게 유화적 메시지를 보내기 위한 지렛대로 활용 중이다. 사우디 석유시설 피습 사건으로 가능성이 낮아지긴 했지만 “나는 매우 유연한 사람”이라면서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여지를 살려두려 신경을 쓰는 모습이다.

대통령은 한 국가의 최고지도자로서 막강한 권력을 누린다. 특히 외교는 다른 분야에 비해 대통령의 권한이 폭넓게 인정된다. 그럼에도 외교정책 결정과정에는 정부 내 여러 조직, 정부를 둘러싼 다양한 정치세력이 펼치는 논리와 경쟁과 저항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민주국가에선 제약이 더 심하다. 집권 3년밖에 되지 않은 트럼프 대통령이 네번째 국가안보보좌관을 앉혔다는 사실은 그의 ‘까탈스러운’ 성벽을 증명하는 것일 수 있지만, 기성 관료 및 정치권의 이견과 반대를 뚫고 자신의 정책을 밀고나가기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 생긴 불가피한 결과였을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볼턴을 경질한 뒤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후임 국가안보보좌관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나와 함께 일하는 것은 매우 쉽다. 왜 쉬운지 아는가? 내가 모든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자신이 국가안보보좌관 역할까지 할 테니 누가 국가안보보좌관이 되든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념형 매파’ 볼턴이 퇴진한 상황에서 미국 외교가 어떻게 변모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의 의지와 아이디어가 관철되는 비율이 높아질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극적인 반전을 연출해 자신이 그 중심에 서는 상황도 더 자주 보게 될 것이다. 그럴수록 세계가 감내해야 할 위험도 커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저글링하는 공의 개수를 늘리거나 속도를 높일수록 공을 떨어뜨릴 위험이 더 커지는 건 당연한 이치다.

(2019. 9.24)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9241422001&code=990334#csidx73253430a7cb8cbb1b140bb41ff0c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