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 결정은 ‘강한 우려와 실망’이라는 미국발 파도를 불러왔다. 파도는 한·미관계에 새로운 갈등 요소를 드러냈다.
미국의 불만 어린 표현은 즉각적이고 직설적이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 등 미국 외교·국방 고위 당국자는 ‘문재인 정부’를 지목해 강한 유감과 실망을 쏟아냈다. 민주당 엘리엇 엥겔 하원 외교위원장, 공화당 마이클 매카울 하원 외교위원회 간사 등 여야 구분도 없었다. 워싱턴 싱크탱크 전문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겠다. 문재인 대통령은 나의 아주 좋은 친구”라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반응이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미국은 지난 두 달 동안 일본이 전략물자 수출통제를 믿을 수 없다면서 반도체 소재 등 3개 품목의 한국 수출을 규제하고,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에서 배제하는 동안 한·일 양국에 ‘상황을 악화시키는 추가 조치 자제’를 요청하는 원론적 입장을 고수했다. 그런데 한국이 일본과의 군사정보 교류를 목적으로 체결한 협정을 종료하겠다고 하자 펄쩍 뛰고 나섰다.
이는 GSOMIA가 자국 안보 이익에 직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일관계에 합리적 시각을 갖고 있다고 평가받는 워싱턴의 한 동북아 전문가는 “문재인 정부가 일본을 향해 극도의 불만을 나타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정보 공유는 한·일 두 나라뿐 아니라 미국까지 포함되는 상호 이해관계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이 일본을 압박한다면서 남의 다리를 긁었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2016년 11월 전격적으로 한·일 GSOMIA를 체결하면서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일본과의 정보협력이 우리 안보 이익에 부합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듯이 미국이 부여한 위상은 그 이상이었다. ‘인도·태평양 전략’이라는 이름 아래 대중국 포위전략을 펼치고 있는 미국은 일본의 군사화를 지지하는 한편 한국과 일본이 역사갈등을 해소하고 안보협력을 강화함으로써 동북아에서 대중국 봉쇄축 역할을 맡기를 바란다. 이른바 미·일동맹 하부구조로 한·미동맹 편입론이다.
한·일 역사갈등 봉합을 도모한 것이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였다면, GSOMIA는 안보협력의 핵심이었다. 공식 파기 선언은 없었지만 한·일 위안부 합의는 사실상 파기 상태다. 이에 더해 한·일 GSOMIA까지 깨져나갈 상황이다. 미국으로선 동북아에 세웠던 대중국 봉쇄축 약화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이제 화난 표정일지언정 미국도 무대 위로 올라왔다. 미국은 한국이 11월22일 GSOMIA 효력 정식 종료 이전에 재고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힌 상태다. 미국이 이를 위해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까지 포함한 중재안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나설지, 한국에 재고만 요청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설사 한·일 갈등이 해소되고 미국 바람대로 한국이 GSOMIA 종료 결정을 번복한다면 이번에는 중국의 반발이 예상된다. 칼을 뽑기도 어려웠지만, 다시 칼집에 넣기도 쉽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앞서 청와대는 한·일 GSOMIA 종료 결정을 발표하면서 “미국은 우리 정부의 결정을 이해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후 미국에서 쏟아진 반발을 보면 청와대가 미국 측 이해 정도를 과장했거나, 예상되는 반발을 과소평가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전자였다면 정직하지 못했고, 후자였다면 나이브했다. 미국에 자제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제는 “미국 입장을 이해한다”는 애매한 말로 일관하고 있다. 청와대와 정부는 더 솔직하고 진지해져야 한다.
한·미 갈등의 파도를 헤쳐나갈 국민적 지지를 모으기 위해선 더욱 그렇다.
(2019.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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