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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죽음의 도구’와 인류의 통제능력

핵미사일과 공격용 소총. 작동 원리와 파괴력이 판이한 두 무기가 최근 사람들의 근심거리로 새삼 떠오르며 이목을 끌었다.

미국은 지난 2일(현지시간) 중거리핵전력조약(INF)에서 탈퇴함으로써 세계 군축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찢어냈다. 32년 전 미국과 소련은 INF를 통해 사거리 500~5500㎞ 탄도·순항미사일을 실험·생산·보유·배치하지 않기로 약속했었다. 이로써 핵미사일 능력을 제한해 ‘공포의 균형’을 이룰 수 있게 해줬던 기둥 하나가 무너졌다.

공교롭게도 INF가 무너진 것과 거의 같은 시기 미국 텍사스주 엘패소와 아이오와주 데이턴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잇따라 터졌다. 총기난사 사건이 일상화되다시피 한 미국이라지만 15시간의 시차를 두고 32명이나 숨진 사건의 충격은 컸다.

두 사건은 죽음의 도구를 통제할 능력이 있는지 묻는 시험대에 인류를 올려놓았다. 배경에 자리잡은 발달한 기술, 변화된 환경, 파편화된 세계는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미국은 INF 탈퇴 이유로 러시아가 INF 금지 미사일을 개발하고, 중국이 INF 바깥에서 미사일을 자유롭게 개발·배치하고 있는 점을 들었다. 이런 불만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들어 처음 나온 건 아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도 2014년 7월 러시아의 이스칸데르 미사일이 INF를 위반했다고 공식 항의한 이후 문제제기를 해왔다.

냉전 시절 미국과 소련이 체결한 군축 합의들이 전 세계 핵무기 비축량과 핵무기에 접근할 수 있는 행위자들이 늘어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측면도 있다. 같은 맥락에서 시효가 2년 앞으로 다가온 ‘신전략무기감축협정’(뉴스타트)의 연장도 위태로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극초음속 미사일, 핵추진 순항미사일, 핵탄두 탑재 수중 드론 등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기존 군축 논의에서 거론되지 않은 것들이다.

그럼에도 트럼프 행정부의 행동은 충격적이다. 기존 군축 합의를 보완하고 폭을 넓히려고 노력하기보다 조약 자체를 허물어 버렸다. 미국의 선택이 새로운 군축 패러다임으로 가기 위한 ‘창조적 파괴’인지, ‘신군비경쟁’의 신호탄인지는 시간이 판명해줄 것이다. 미국이 INF에서 탈퇴하자마자 아시아에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하겠다고 나선 것을 보면 안타깝게도 전자일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미국 사회에서 재연된 총기규제 논쟁도 변화된 현실과 제도 사이의 괴리를 타고 흐른다. 엘패소와 데이턴의 총격범은 공격용 소총을 사용했다. 특히 데이턴 총격범은 30초 만에 41발을 쏴서 9명을 죽였다. 그는 총알이 100발이나 들어가는 탄창을 가지고 있었다. 더 빨리, 더 많은 총알을 더 멀리 보내 더 많은 이를 죽일 수 있도록 개발된 무기가 대형마트·유흥가에서 시민들을 죽이는 데 사용된 것이다.

이제 공격용 소총은 총기난사 사건의 필수 구성요소나 다름없다. 말 그대로 전쟁터에서나 사용될 법한 치명적인 총기류가 민간에 퍼져 있다. 그런데도 미국 연방의회는 지난 25년간 새로운 총기규제 법안을 단 한 건도 성공적으로 통과시키지 못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내놓은 대책은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공격용 소총 판매 금지 같은 근본적 대책은 외면하고 총기난사범 사형 구형, 정신질환자 총기 소유 제한 등 사후적이고 소극적인 대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지난 2월 하원에서 총기거래자 신원조회 전면 확대 법안을 통과시킨 민주당은 상원을 장악한 공화당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지만 아직은 요지부동이다.

미국에서 총기규제는 민주당 지지자 78%가 지지하지만, 공화당 지지자는 불과 18%만 찬성(2017년 퓨리서치 조사)할 정도로 당파적인 주제다. 대선을 15개월 앞두고 새롭게 불거진 총기규제 논쟁의 향배는 미국 사회와 정치권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공통의 인식에 도달할 능력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잣대가 될 것이다.

(2019. 8. 13)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8131132001&code=990334#csidx852a7acf08c0eb4b4d7ef1c89430ef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