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입김이 호호 나오지만 너무 춥지 않고, 눈이 내렸지만 건조해서 바람이 불 때 마른 나뭇가지에서 '타닥타닥'하는 소리가 들리는 아침과 같은 청명한 느낌을 주는 책을 만났다. 미국 시인 메리 올리버의 산문집 <휘파람 부는 사람>이다. 이 시인이 자연과 사물을 대하는 자세가, 한글자 한글자가 깊은 울림을 준다.
휘파람 부는 사람 -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마음산책 |
자연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우리가 자연을 사랑하는 자세는 올바른가. 이명박 정부 초대 환경부 장관으로 지명됐다 낙마한 박은경씨 같은 경우 땅투기 의혹이 제기되자 "자연의 일부인 땅을 사랑한다"라는 어록을 남기면서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자연을 유용, 확용의 대상으로 대하는 게 사실이다. 또한 우리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예찬할 때 껍데기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대하는 자세, 그리고 개악이든 개선이든 변화되어 버려서 돌아오지도 못한 '원시자연'을 동경하지 않는 자세에 대한 시인의 담담한 서술은 어떤 강령(manifesto) 보다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다.
에세이 '겨울의 순간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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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연에 대해 쓰거나 언급할 때 이런 생각들을 갖고 있다. 우선 나는 자연을 장식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아무리 아름다운 물결무늬가 들어가 있고 아무리 빛이 난다고 해도 말이다. 그리고 자연에 인간을 위한 유용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그런 잣대는 자연이 지닌 고유한 가치를 감소시키고 박탈한다. 또, 나는 자연을 재해, 경치, 휴가, 오락으로 보지도 않는다. 나는 풍경에서 휴식과 기쁨을 얻기보다는(물론 그런 걸 얻긴 하지만) 세상을 하나의 신비로 보는 시각과(이런 시각은 자신의 특권뿐 아니라 다른 존재들의 특권까지도 존중하게 만든다) 그 신비를 보호하거나 약화시키는 옳고 그른 행위들에 대한 인식을 높인다.
자연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집 지붕 아래를 걷듯 나뭇잎 아래를 걷지 않는 사람은 불완전하고 상처 입은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의 몰인정함과 무관심으로 야생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마찬가지다. 자연은 앞으로도 늘 존재할 것이지만 지금 우리의 자연과는 다를 것이며 하물며 우리의 어릴 적 추억 속에 있는 무성한 숲과 들과는 더 다를 것이다. 반 고흐와 윌리엄 터너, 윈슬러 호머, 워즈워스, 프로스트, 제퍼스, 휘트먼의 세상은 가버렸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아직 우리는 제정신을 찾고 세상을 구할 수 있지만 본디 자연을 되찾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배울 나이가 되었을 때 다른 대부분의 아이들처럼 지식의 습득을 지향했다. 여기서 지식은 생각들보다는 입증된 사실들을 의미한다. 내가 아는 교육은 이미 성립된 그런 확실성들의 수집이었다.
지식은 내게 즐거움을 주고 나를 기워줬지만 결국 나를 실망시켰다. 나는 여전히 허기를 느낀다. 내 삶의 가장 진지한 질문을 던지면서 나는 이성을, 증명 가능한 것을 지나쳐 다른 방향들을 보기 시작했다. 이제 나의 관심을 끌 만한 가치를 지닌 주제는 하나뿐이며 그건 세상의 정신적 측면에 대한 인식과 그 인식 내에서 나 자신의 정신적 상태다. 그렇다고 꼭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정신성은 신학적인 것이 아니라 자세다. 그러한 관심은 사실을 담은 최고의 책보다도 더 나를 살찌운다. 지금 내 마음속에서는 입증된 사실들과 입증되진 않았지만 강렬한 직관들이 겨루면 사실들이 진다.
그래서 나는 단지 실내를 피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안쪽으로(실험실로, 교과서로, 지식으로) 통하는 문 자체를 보지도 않는 일종의 자연시를 쓸 것이다. 올빼미, 지렁이도마뱀, 수선화, 붉은점도롱뇽에 대해 육체뿐 아니라 나만큼 예민한 신경과 나보다 뛰어난 용기를 지녔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제멋대로인 정신과 잠에서 깨지 않은 마음에 위안과 신호, 필요하다면 경고가 되어줄 찬양시를 쓸 것이다.
우리 개개인과 다른 모든 것 사이엔 끊어질 수 없는 무수한 연결고리가 존재하고 우리의 존엄성과 기회들은 하나다. 머나먼 하늘의 별과 우리 발치의 진흙은 한 가족이다. 어느 한 가지나 몇 가지만을 찬양하고 끝내는 건 품위나 분별 있는 일이 아니다. 소나무, 표범, 플랫강, 그리고 우리 자신, 이 모두가 함께 위험에 처해 있거나 지속 가능한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우리 모두는 서로의 운명이다.
이처럼 진지한 자세로 자연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에 세들어 사는 집 계단 구석에 자리잡은 거미가 들어온다. 암컷 거미가 낳은 알주머니에서 나온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새끼 거미들을 보면서 작가가 느낀 희열이 다사롭게 전해진다.
에세이 '기절' 중에서
거미의 기이한 삶을 지켜보며 내가 느꼈던 의문들은 책을 찾아보면 해결될 것이고 그런 지식을 제공하는 책은 많다. 하지만 지식의 궁전은 발견의 궁전과 다르며 나는 발견의 궁전의 진정한 코페르티쿠스다.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 그 이상이다! 나는 그걸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
바닷가를 산책하다 거북이가 모래밭을 파고 알을 낳는 것을 본 작가는 얼마 뒤 다시 그곳을 찾아가 모래를 파헤친 다음 얼만큼의 거북이 알을 가져다 스트램블을 해먹으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뿐이다.
에세이 '거북이 자매' 중에서
식욕, 내 식욕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이런 사실으 인정한다. 그것은 생각이 떠오르는 속도보다더 빠르게 나타나고 추방해버릴 수가 없으며 고삐로 묶어둘 수는 있되 간신히 그럴 수 있을 뿐이다. (중략) 나는 식욕이 신 가운데 하나라는 걸 안다. 거칠고 야만적인 얼굴을 지니긴 했지만 그대로 신이다.
테야르 드샤르댕(프랑스 예수회 신부이자 고생물학자, 지질학자)은 어딘가에서 말하기를, 인간이 처한 가장 괴로운 정신적 딜레마는 음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그것은 불가피하게 고통과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누가 그 말에 동의하지 않겠는가.
시 '휘파람 부는 사람'
갑자기 그녀가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어. 내가 갑자기라고 말하는 건 그녀가 30년 넘게 휘파람을 불지 않았기 때문이지. 짜릿한 일이었어. 난 처음엔, 집에 모르는 사람이 들어왔나 했어. 난 위층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그녀는 아래층에 있었지. 잡힌 게 아니라 스스로 날아든 새, 야생의 생기 넘치는 그 새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지저귀고 미끄러지고 돌아오고 희롱하고 솟구치는 소리였어.
이윽고 내가 말했어. 당신이야? 당신이 휘파람 부는 거야? 응, 그녀가 대답했어. 나 아주 옛날에는 휘파람을 불었지. 지금 보니 아직 불 수 있었어. 그녀는 휘파람의 리듬에 맞추어 집 안을 돌아다녔어.
나는 그녀를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해. 그렇게 생각했어. 팔굼치며 발목이며. 기분이며 욕망이며. 고통이며 장난기며. 분노까지도. 헌신까지도.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알기 시작하긴 한 걸까? 내가 30년간 함께 살아온 이 사람은 누굴까?
이 맑고 알 수 없고 사랑스러운, 휘파람 부는 사람은?
(시인의 모습인데 아~주 오래 전에 찍은 것 같다. 시인은 1935년생이므로 올해 80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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