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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_2019/밑줄긋기

[뉴스의 시대](알랭 드 보통)

[뉴스의 시대](알랭 드 보통) 


반쯤은 실용적 필요에 의해 읽은 책. 번역서 제목인 [뉴스의 시대: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보다는 원서 제목인 [The News: A User‘s Manual]이 좀 더 잘 들어맞는 것 같다. '홍수'라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뉴스가 넘쳐나는 시대. 뉴스와 언론사, 기자의 속성에 대해 알랭 드 보통은 꿰뚫고 있다. 매체들은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지만 그 경쟁의 이유와 목표, 결과가 아주 임의적이고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딴판의 결과를 낳기도 한다. 나 자신이 뉴스매체에 근무하지만 한발 떨어져서 생각해볼만한 거리를 많이 안겨준다.






 우리가 뉴스와 얽힌 정도에 비하면 안타깝게도 많은 언론기관 내부에는 공정하고 중립적인 ‘사실’ 보도가 가장 품격 있는 저널리즘이라는 편견이 광범하게 퍼져 있다. 이를테면 CNN의 슬로건은 ‘여러분께 사실을 제공합니다’이다.…이 ‘사실’이 지닌 문제는 오늘날 신뢰할 만한 사실 보도를 찾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정작 문제는 우리가 더 많은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접한 그 사실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는 데 있다.…

 사실의 정반대에 있는 것은 편향이다. 진지한 저널리즘의 영역에서 편향은 무척 악명이 높다. 그것은 악의적인 의제, 거짓말, 대중의 자유로운 의사결정권을 부정하는 권위주의적 시도와 동의어다.

 하지만 우리는 어쩌면 편향에 대해 좀더 관대해져야 할지도 모른다. 순수한 의미에서 편향은 사건을 평가하는 방법을 뜻할 뿐이다.…오히려 우리의 임무는 편향된 시각이 생산한 더 믿을 만하고 유익한 뉴스에 올라타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32~33쪽) 



 시각예술에서, 원근감을 갖는다는 것은 서로 다른 사물들을 실제의 공간적 관계 속에서 볼 줄 아는 능력이 있음을 의미한다. 떨어져 있는 건 멀고 작게, 가까이 있는 건 가깝고 크게, 화가들이 캔버스에 원근감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건 놀라우리만치 어렵다. 이는 이 기술이 우리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똑같이 지난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를 뉴스에 적용해보면, 원근감을 갖는다는 것은 지금 누가 봐도 분명 충격적인 사건을 역사 전체에 걸쳐 인류가 겪은 경험과 비교하는 능력과 연결된다. 이 사건이 사실상 어느 정도의 관심과 우려를 요하는지 헤아리기 위해서 말이다.

 마음속에 원근감을 갖고 있으면, 우리는 (뉴스가 암시하는 바와 정반대로) 어떤 것도 전적으로 새로운 게 아니며, 아주 일부의 사건만이 진실로 놀라운 것이고, 정말로 무시무시한 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이내 깨닫게 된다. (59~60쪽)



 뉴스의 가장 고귀한 약속은 무지를 줄이고 편견을 극복하게 하여 개인과 국가의 지성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몇몇 분야에서 뉴스는 이따금 정반대로, 우리를 완전히 바보로 만든다고 비난받아왔다. 이 문제를 놓고 언론에 대해 가장 강경한 비난을 퍼부었던 이들 가운데 19세기의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있다.…플로베르의 눈에 신문은 사람을 심하게 오염시키는 것이어서, 그는 오로지 완전한 문맹자와 무지렁이 프랑스인들만이 주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보았다. (79~80쪽)



 헤드라인 밑에서 자신만만하고 냉정하게 자신의 중요성을 내뿜고 있긴 해도, 우리가 읽는 기사들은 천사들의 비밀회의 후 나온 초자연적인 칙령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전망 좋은 사무실에서 머핀과 커피를 앞에 놓고 골치 아픈 회의를 해가며 그럴싸하게 기가 목록을 만들고자 분투하는, 보통은 다소 피곤에 절고 압박에 시달리는 편집자 집단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기사 제목은 현실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이라기보다는, 우리와 똑같이 편견, 실수, 미혹에 시달리는 필멸의 존재인 편집자들이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라는 질문에 맨 처음 떠올린 생각을 통해 정해진다. 우리 종족에게 날마다 닥칠 수억 건의 잠재적 사건들의 웅덩이 속에서 솟아오른 어림짐작 말이다. (85~86쪽)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해외 뉴스는 예술의 몇 가지 기교들을 기꺼이 채택해야 한다. 조지 엘리엇이 말했듯, 매체로서의 예술은 “경험을 증폭하고, 우리의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넘어서는 동료 인간들과의 접촉을 확장하도록” 우리를 도울 수 있다. 엘리엇에 따르면 그로 인한 가장 큰 이점은 ‘공감 능력의 확장’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는 지금 이러한 공감 능력을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엘리엇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쓴다. “일반화와 통계에 근거한 호소는 기성품 같은 공감을 요구한다. (…) 하지만 이를테면 위대한 예술가가 그려내는 인간의 삶은, 심지어 하찮고 이기적인 인간들조차도 그들과는 별개의 문제였던 것, 즉 도덕적 감성의 원재료라 부를 수 있는 것과 마주하고 주목하게 만든다.”

 간단히 말해, 이것이 해외 뉴스의 임무가 되어야 한다: 우리와 ‘별개의 문제인 것에 주목하도록’ 애씀으로써 우리와 다른 나라의 국민들이 서로의 만남을 상상하고 실질적인 원조를 하며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다. (102쪽)



 모든 위대한 뉴스 사진은 이와 비슷하게 현실에 대해 우리가 갖는 불완전하고 편견에 찬 이미지를 질적으로 바꿔놓는다.…

 나는 전쟁이 어쨌든 좋은 게 아니고, 때로 무고한 사람들이 십자포화 속에서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외교적 시도도 가려서는 안 된다고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또한 피로 물든 아들 앞에서 통곡하는 아버지가 생기지 않도록 전쟁을 피할 수만 있다면 중대한 전략적 이점 같은 건 포기해도 상관없다고 얼마나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나는 내가 세상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지금껏 셀 수 없이 많은 사진을 보고 수많은 출판물을 읽었음에도 우리 행성 위에 존재하는 나라들 대부분에 대한 내 심상이 기껏해야 하나 정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135~138쪽)



 우리를 침묵시키는 건 경제의 규모만은 아니다. 그것이 가진 복잡성도 우리를 입다물게 할 수 있다. 선진 경제지역 인구의 극소수만이 자신들이 속한 경제 체제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151쪽)



역사적으로 현대 뉴스 매체는 자본주의의 은행, 중개업, 증권거래소 관련 시장 정보의 필요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발전해왔다. 19세기 중반 영국과 미국 사이에 해저 케이블을 놓는 데는 금융업자들과 언론사들(그중 하나가 로이터다)이 공동으로 자본금을 댔다. 얼음처럼 차가운 대서양의 깊은 곳으로 케이블을 타고 내려간 당시의 뉴스 기사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품고 있었다. ‘구아노(guano·열대지방의 해안이나 섬에 많은, 바닷새의 배설물 덩어리)의 수요는 상승할 것인가 하강할 것인가?’ ‘리옹에서 벌어진 견직공들의 파업은 면화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맥아에 세금을 부과하면 세수가 얼마나 늘어날 것인가?’ ‘수입 규제가 철폐되면 옥수수 가격은 어떻게 될 것인가?’ (163쪽)



셀러브리티를 보다 생산적으로 활용하려는 탐색을 위해서는 뉴스의 지독한 결점 하나를 뜯어고쳐야 한다. 셀러브리티 인터뷰 말이다. 현재 이 장르는 대개 개인 신상 폭로나 ‘새로운 계획’에 대한 두서 없는 질문에 고정돼 있는데, 미래의 인터뷰는 다른 무엇보다 ‘우리가 이 유명한 사람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어야 한다. 셀러브리티가 어느 분야에서 활동하는 상관없다. 교훈은 전이 가능하고 미덕은 활동 영역을 가로질러 영향을 끼친다. (189~190쪽)




뉴스가 전하는 음산한 이야기들은 이런 해골의 현대판으로 사용될 수 있다. 우리가 추호의 의심도 없이 이런 이야기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도록 ‘바니타스’(Vanitas: 허무, 덧없음, 헛됨 등을 의미하는 라틴어. 17세기 유럽에서는 ‘바니타스 정물화’라는 양식이 유행했는데, 이 그림들은 해골, 촛불, 모래시계 등을 사용하여 인생의 덧없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라는 제목 아래 기사가 놓이게 된다면 어떨까. 그러면 그 기사들은 그저 개인적인 고통을 기록하는 데서 멈추는 대신, 우리로 하여금 훨씬 더 중요한 일을 하도록 독려할 것이다. (234쪽)



 우리는 전례없이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인류는 매년 3만 편의 영화와 200만 권의 책, 10만 장의 음반을 생산해내며, 9500만 명이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는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이 문화의 왕국에서도 언론사는 우리가 어떤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그 판단력을 형성하는 데 핵심적이고 특권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우리를 우리 시대 최고의 예술작품으로 향하게 하기 위해 창조성의 급류를 꼼꼼히 살펴 추려내는 것이 문화 저널리즘의 임무다. 문화 저널리즘은 그야말로 예술과 향유자 사이의 만족스러운 혼인을 성사시키는 사명을 띠고 있다.(268쪽)



 모든 뉴스를 (30쪽짜리 신문과 30분짜리 방송을 통해) 한꺼번에 소비하던 시절이 있었다. 뉴스를 공급할 책임을 진 매체들이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믿던 때가 있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배웠다. 이제 우리는 뉴스의 공급량이 거의 무한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 날마다 엑사바이트급의 이미지들과 기사들이 생산되고 있다는 사실과, 신문과 방송이란 실은 압박에 시달리는 기자가 ‘평균적인 독자’라고 추정되는 사람들이 가진 욕망을 추측하면서 무한한 데이터의 바다에서 날마다 임으로 뽑아낸 한줌의 정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277쪽)



 그 규모와 편재성으로 인해, 현대의 뉴스는 우리의 독립적인 사고 능력을 말살시킬 수 있다. (286~287쪽)



뉴스의 시대 - 10점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