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뒤흔든 20세기 미국의 마녀재판'이란 부제가 붙었다. 나름 잡학다식하다는 소릴 듣는 편이지만 사코와 반제티 사건은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됐다. 미국과 유럽의 지식인들과 저항적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켰던 사건이란다. 업턴 싱클레어는 이들을 소재로 <보스턴>이란 소설을 썼으며, 존 바에즈는 이들에게 바치는 'Here's to you'를 불렀으며, 2007년엔 80주기를 맞아 다큐멘터리 영화도 만들어졌다. 위키피티아에서 'Sacco and Vanzetti'를 검색하면 더 많은 정보를 알 수 있다.
과연 공정한 재판이었나
-1927년 8월23일 그들은 전기의자에서 죽었다
-1927년 8월23일 그들은 전기의자에서 죽었다
영국 출신 변호사 브라이언 해리스는 얼마 전 국내에 소개된 <인저스티스>(열대림)에서 "재판이란 상충하는 여러 사실을 합의된 버전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장치, 그것도 아주 불완전한 장치"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서양 역사에서 부당한 재판으로 기억되는 13가지 사례를 상세히 소개하면서 권력·여론·편견과 같은 외부의 압력, 법률적 모호함이 '불의(injustice)'를 낳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사코와 반제티' 사건은 여기에 딱 들어맞는다. '20세기판 미국의 마녀재판'으로 불리며 서구에서 수많은 예술작품과 음악, 영화, 책의 소재가 됐지만 국내에선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공장 노동자 출신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브루스 왓슨은 사코와 반제티 사건에 관한 재판기록과 정부기록, 신문기사, 성명서와 회고담 등 거의 모든 자료를 샅샅이 뒤져 다큐멘터리를 방불케 하는 생생함으로 사건의 전모를 그려냈다.
사코와 반제티 - 브루스 왓슨 지음, 이수영 옮김/삼천리 |
1920년 4월15일 미국 메사추세츠주의 작은 도시에서 무장강도들이 대낮에 2명을 사살하고 이들이 운반하던 거액을 뺏어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목격자들은 강도들이 이탈리아계로 보였다고 증언했다. 이탈리아 이민자인 니콜라 사코와 바르톨로메오 반제티가 용의자로 체포돼 기소됐다. 반제티에겐 전해 겨울, 인근 지역에서 발생한 강도사건 혐의까지 씌워졌다. 그들은 무정부주의자인 것으로 드러났다.
두 사람은 체포 당시 권총을 갖고 있었지만 범인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되지 못했다. 이듬해 5월 시작된 재판에서 증인들은 엇갈리는 증언들을 내놓았고 검찰이 제시한 증거들은 허점이 많았다. 법정 밖에선 사코와 반제티가 무정부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엉뚱한 사건에 기소돼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받고 있다는 항의와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전 세계가 항의의 물결로 들끓었지만 배심원들은 유죄라고 판단했다.
항소가 기각되자 재심이 청구됐다. 그 사이 사코와 반제티의 무죄 입증에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사실들, 예를 들어 자신을 비롯한 일당이 범행을 저질렀노라는 다른 살인범의 자백 등이 새롭게 나왔다.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나톨 프랑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극작가 버나드 쇼를 비롯한 전 세계 지식인과 노동자들의 재심 요구에도 불구하고 1927년 4월9일 사형이 선고됐다. 그들은 8월23일 전기의자에서 죽었다.
저자는 이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선 1920년대 미국 사회 내부 분위기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1차 대전이 끝나고 돌아온 참전용사들은 일자리가 부족했고 종종 문제를 일으키는 이민자 집단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에 충격을 받은 '적색공포'에 휩싸여 미국은 내부의 혁명분자 분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사코와 반제티는 미국 사회가 혐오하는 두 가지 부류에 모두 속했다. 특히 그들이 속한 정치그룹은 요인을 상대로 폭탄 테러를 시도해 당국의 추적을 받고 있었다. 체포될 당시 그들은 정치범으로 체포될 때에 대비해 자신과 친구들이 만든 문건과 신문 등을 폐기하거나 숨기려고 나선 참이었다.
이런 사실이 사코와 반제티가 강도사건의 범인이라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사건을 맡았던 판사는 사석에서 지인들에게 "무정부주의자 놈들이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라"고 여러 차례 말한 것으로 드러났다. 공정한 재판이 생명인 재판관의 심리가 이러할진대 이 사건을 바라보는 보수적인 주류 사회와 대중의 시각은 어떠했겠는가. 저자는 사코와 반제티를 옹호하는 쪽에 서 있지만 그들이 유죄였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사코와 반제티가 무죄였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들이 과연 공정한 재판을 받았느냐 아니냐가 저자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의 핵심이다.
서울대 조국 교수는 추천사에서 "범죄 혐의를 받는 이주 노동자에 대해 공정한 수사·기소·재판이 이뤄지도록 국가와 사회가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국판 사코와 반제티 사건을 보게 될 것"이라고 썼다. 이주 노동자까지 갈 필요도 없다. 용산참사를 수사한 검찰은 재판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핵심적인 수사기록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70년도 더 흐른 사코와 반제티 사건을 한국 사회가 반추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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