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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_2019/밑줄긋기

이기적 유전자-1

너무도 유명한 과학고전 <이기적 유전자>를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본다. 너무 전문적이지 않게 적절한 수위로 쓰인 과학서는 생물학에 관한 것이든, 우주과학, 뇌과학에 관한 것이든, 요즘 유행하는 네트워크 이론에 관한 것이든 인문서 못지 않게 흥미진진하다.

리처드 도킨스는 1976년 <이기적 유전자>를 출간했다. 내가 읽은 번역본은 30주년 기념판이었다. ‘전면개정판’이라고는 하지만 책 맨 뒤에 ‘보주’를 추가했을뿐 20주년 기념판을 손대지 않았다고 한다. 20주년 기념판도 초판에 한개 장을 추가했을뿐 역시 본문은 거의 손대지 않았다고 한다. 이 책이 불러일으킨 파장과 논쟁, 그리고 격렬한 비판을 감안하면 대단한 자신감이다. 고집으로 읽힐수도 있겠다.





도킨스는 30주년 기념판 서문에 제목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자신의 원고를 런던 출판계의 베테랑 톰 마슐러(Tom Maschler)가 검토했는데 그가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라는 단어가 ‘침울한 단어’라면서 ‘불멸의 유전자(The Immortal Gene)’을 추천했다고 한다. 도킨스는 이제 와 생각해보면 마슐러가 옳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기적’이라는 표현이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면서 말이다. 그는 비평가들이 책 제목만 읽기만 좋아한다는 것을 감안하지 못했다고 비꼬았다.


여하튼 그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거칠게 압축하자면 진화, 즉 자연선택의 기본 단위는 세포나, 개체, 집단이 아니라 유전자라는 것이며, 유전자는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이게 뭐 그리 논쟁적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이 책은 비전문가들에겐 생소한 생물학의 여러 가지 사안들을 비유를 들어 쉽게 설명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지만 생물학계 내부에선 매우 도발적인 책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그리고 도킨스의 자신만만함과 달리 잘못으로 판명된 것들도 꽤 된다고 한다.


민족사관고등학교의 조진호 생물교사는 최근 발간된 <기획회의> 382호에서 이 책을 평가하면서 “<이기적 유전자>는 대단히 명쾌하고 논리적이다. 이 점이 이 책을 명서의 반열에 올려놓았다”면서 “하지만 유전자, 생물, 우주 안의 복잡한 모든 것들은 바람대로 단순하고 편하게 이해되지 않는 것이라는 게 현대 과학이 말하는 바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더 나아가 “‘이기적 유전자론’은 사실이 아니다. 도킨스의 이론은 근본이 되는 전제부터가 틀리다. 자연선택되는 최소의 단위를 유전자라고 밝혔지만, 이런 임의적인 유전자는 불멸의 절대자가 결코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이 책을 통독하고 나서 이런 지적을 보면 김이 빠질 것도 같지만 조진호 교사도 인정했듯 대단히 명쾌한 논리, 기발한 비유와 흥미진진한 서술 그 자체만 건지더라도 이 책을 볼 이유는 많은 것 같다.


이기적 유전자 - 10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이상임 옮김/을유문화사


초판 서문

이 책은 마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공상 과학 소설처럼 읽어야 한다. 그러나 이 책은 공상 과학 소설이 아니라 과학서다. 진부한 표현인지 몰라도, '소설보다 더 기이하다'는 표현이 내가 이 책에 대해 느끼는 바를 정확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생존 기계다. 즉, 우리는 유전자로 알려진 이기적인 분자들을 보존 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로봇 운반자들이다. 이 사실은 아직도 나를 놀라게 한다. 나는 이 사실을 여러 해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것에 충분히 익숙해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내가 바라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사실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다. (28쪽)


1. 사람은 왜 존재하는가?

이 책이 주장하는 바는 사람을 비롯한 모든 동물이 유전자가 만들어 낸 기계라는 것이다.…이제부터 논의 하려는 것은, 성공한 유전자에 대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성질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비정한 이기주의'라는 것이다. 이러한 유전자의 이기주의는 보통 개체 행동에서도 이기성이 나타나는 원인이 된다.…자연 선택의 과정을 보면 자연 선택을 거쳐 진화해 온 것은 무엇이든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개코원숭이, 인간, 그리고 기타 모든 생물의 행동을 보면 그 행동이 무엇이든 이기적일 것이라고 예상해야 한다. 만약 이 예상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즉 인간의 행동이 진정으로 이타적이라고 관찰될 경우, 우리는 난처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사태에 직면할 것이다. (40~42쪽)


아마도 집단 선택설이 큰 매력을 갖는 이유는 그것이 대부분 우리가 갖고 있는 도덕적 이상이나 정치적 이상과 조화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으로서 우리는 종종 이기적으로 행동하지만 이상적으로는 타인의 이익을 우선하는 사람을 존경하고 칭찬한다.…어느 수준의 이타주의가 바람직한가? 가족인가, 국가인가, 인종인가, 종인가, 아니면 전체 생물인가에 대한 인간 윤리의 혼란은 진화론의 입장에서 보면 어느 수준에서 이타주의를 기대할 수 있는가라는 생물학적인 문제와 혼란을 그대로 반영한다. (49~51쪽)


2. 자기 복제자

오늘날 자기 복제자는 덜거덕거리는 거대한 로봇 속에서 바깥세상과 차단된 채 안전하게 집단으로 떼 지어 살면서, 복잡한 간접 경로로 바깥세상과 의사소통 하고 원격 조정기로 바깥세상을 조종한다. 그들은 당신 안에도 내 안에도 있다. 그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창조했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이론적 근거이기도 하다. 자기 복제자는 기나긴 길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 이제 그들은 유전자라는 이름으로 계속 나아갈 것이며, 우리는 그들의 생존 기계다. (65쪽)


3. 불멸의 코일

유전자는 불멸의 존재다. 아니, 불멸의 존재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유전 단위로 정의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개개의 생존 기계인 우리는 수십 년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유전자의 기대 수명은 10년 단위가 아닌, 1백만 년 단위로 측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유성 생식을 하는 종에서 개체는 자연 선택의 중요한 단위가 되기에는 너무 크고 수명이 짧은 유전 단위다. (86~87쪽)


개체는 안정적이지 않다. 정처 없이 떠도는 존재다. 염색체 또한 트럼프의 패처럼 섞이고 사라진다. 그러나 섞인 카드 자체는 살아남는다. 바로 이 카드가 유전자다. (87쪽)


유전자는 자연 선택의 단위가 될 만큼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는, 충분히 짧은 염색체의 한 조각으로 정의된다. (88쪽)


유전자는 이기주의의 기본 단위인 것이다. (90쪽)


작은 유전 단위, 즉 유전자를 가장 근본적인 독립된 진화의 인자(因子)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성과 교차가 있기 때문이다. (101쪽)


진화는 유전자 풀 속에서 어떤 유전자는 그 수가 늘어나고 또 어떤 유전자는 수가 줄어드는 과정이다. 이타적 행동과 같은 어떤 형질의 진화를 설명할 때는 습관처럼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이 좋다. "이 형질은 유전자 풀 내 유전자의 빈도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102쪽)


4. 유전자 기계

또 하나의 예를 들면, 로저 페인(Roger Payne)이 지적한 대로 바다는 독특한 음향학적 특성을 갖고 있다. 즉,일정한 깊이에서 헤엄치는 어떤 고래들의 엄청나게 큰 '노래'는 이론적으로 세계 모든 곳에서 들을 수 있다. 고래들이 실제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와 교신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화성에 있는 우주 비행사와 같은 처지일 것이다. 수중의 음속으로 계산하면 그 노래가 대서양을 횡단하여 회답이 오기까지 약 2시간이 걸린다. 일부 고래들이 반복 없이 8분간이나 계속 독백하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8분간의 독백이 끝나면 고래들은 노래를 처음부터 계속 여러 번 반복하는데, 그 반복 주기는 8분 정도다. (114~115쪽)


유전자는 우두머리 프로그래머이며 자기의 생명을 위해 프로그램을 만든다. 유전자는 자기의 생존 기계가 생애에서 부딪치는 모든 위험을 그 프로그램이 얼마나 잘 대처하느냐로 심판받는다. 그것은 생존 법정에서 내려지는 냉혹한 심판이다. 언뜻 보기에 이타적인 것처럼 보이는 행동이 어떻게 유전자의 생존을 촉진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생존 기계와, 생존 기계를 대신해 결정을 내리는 뇌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개체의 생존과 번식이다. 이 '군체' 내의 모든 유전자는 이에 동의할 것이다. 그래서 동물들은 먹이를 찾고, 잡아먹히지 않으려 하고, 병이나 사고를 피하려 하며, 나쁜 기후 조건에서 몸을 지키려 하고, 이성을 찾아 교미를 시도하며, 자기들이 누리는 것들을 자손들에게 물려주려 한다. 굳이 예를 들 필요도 없다. 원한다면 주위의 야생 돌물을 잘 관찰해 보라. 그러나 한 가지 특별한 종류의 행동에 대해서는 언급하고자 한다. 이타성과 이기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다시 한 번 이 문제를 언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넓은 의미로 의사소통이라고 부를 수 있는 행동이다. (127쪽)


5. 공격-안정성과 이기적 기계

동물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동종의 경쟁자를 죽이는 데 전력을 다하지 않는 것은 왜일까?

이 물음에 대한 일반적인 답은 앞뒤 재지 않고 싸우는 것에는 이익(이득)과 동시에 대가(손실)가 따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과 에너지의 손실뿐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B와 C는 모두 나의 경쟁자인데 내가 마침 B를 만났다고 하자. 이기적 개체인 내가 그를 죽이려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C는 내 경쟁자이기는 하지만 B와도 경쟁 관계가 아닌가. 내가 B를 죽이면 잠재적으로 C의 경쟁자 하나를 제거해 C에게 이익을 주는 셈이 된다. 따라서 B를 살려 두면 B가 C와 다투거나 싸울 것이므로 결국 나 자신에게는 간접적으로 이익이 될 것이다. 이 단순한 가상적 예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함부로 경쟁자를 죽이려고 하는 것에는 뚜렷한 이익이 없다는 것이다. 크고 복잡한 경쟁 시스템 속에서는 눈앞의 경쟁자를 없애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그 경쟁자의 죽음으로 당사자보다 다른 경쟁자가 이득을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137쪽)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