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아직 마흔이 되지 않았으니 대충 계산하면 "내 인생의 절반을 '학생'으로 살았다"는 명제가 아직도 가능하다. 달리 말하면 몇년만 지나면 내 인생에서 학생이 아닌 신분으로 살았던 시간이 절반 이상이 된다는 얘긴데, 몇년 후를 기다려 의미를 새롭게 부여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올해부터 나는 새로운 계층에 편입됐기 때문이다. 아이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는 자동적으로 '학부모'가 됐다.
학부모 또는 학부형이라는 호칭이 아직은 낯설게 다가온다. 갗난 아이의 부모, 유치원생 아이의 부모와는 다른, 새롭고도 중요한 역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지난해부터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이의 나이가 화제에 오르면 "운명의 날이 다가온다"고 농담삼아 말하곤 했는데 이 말 역시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공부는 아이가 하는 것이지만, 아이가 공부를 하기 위한 동기를 부여하고, 환경을 만들어주고, 때로는 좀 더 공부를 하도록 적절한 자극과 압력을 넣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학부모가 해야 할 중요한 역할 또는 임무이다.
그런데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는 날이 나에게 '운명의 날'처럼 여겨졌던 것은 단순히 학부모로서의 역할이 더해지는 것 외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아이를 학원에 보낼 것인가, 안보낼 것인가'라는 선택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며, 좀 더 근본적으로는 '극도의 경쟁 일변도로 변해버린 한국의 교육 시스템 안으로 내 아이를 들여보내면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라는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상투적인 얘기지만 대학생 시절 과외 선생은 해봤어도, 중고교 시절 과외를 받아본 적도, 학원을 제대로 다녀본 적도 없는 나이기에 '적절한 선'에서 경쟁을 유발하고 '균형을 잃지 않는 수준'으로 사교육을 시킨다는 교과서적인 답을 찾기란 쉽지 않음을 예감한다.
맹자의 어머니가 아이의 교육환경을 위해 세번을 이사했다는 고사(古事)는 치맛바람을 휘날리며 학교엘 드나들고, 밤잠 세워가며 아이의 입시를 위해 골몰하는 부모들을 위한 고전적인 모델이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면 맹자의 어머니가 뭐 그리 대순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다. '내' 아이를 위해서라면 정말 물불을 가리지 않는 부모들을 주변에서 너무나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명 강사의 수업에 등록하기 위해 새벽부터 학원 앞에서 줄을 서고, 아이를 여름방학 해외영어캠프에 보내기 위해 안먹고 안입으며 비용을 마련하고,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해주기 위해서라면 '달러빚'이라도 낼 준비가 돼 있는 부모들 말이다. "한국의 엄마들은 다 맹모가 될 자세가 돼 있는데 문제는 아이가 맹자가 아니라는 것이다"라는 우스개 소리까지 나오는 판이다.
타이거 마더 - 에이미 추아 지음, 황소연 옮김/민음사 |
미국에서 이른바 '호랑이 엄마(타이거 마더)' 논란을 일으킨 중국계 미국인 에이미 추아의 책이 최근 국내에 소개됐다. 그의 책은 미국 언론에서 이미 큰 논란을 일으켰는데 '호랑이 엄마'라는 말이 상징하듯 양육, 특히 교육 문제에서 매우 엄격하고 때로는 강압적인 엄마의 스타일에 대해 찬반 논란이 일었던 것이다. 덩달아 그의 책은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모양이다. 그 책을 읽어보지 못한 마당에 단정적으로 말하긴 조심스럽지만 한국에서 그 책이 거둘 성공에 대해 나는 회의적인 편이다. 에이미 추아의 큰 딸이 하버드와 예일에 동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음에도 말이다. 저자처럼 끈기를 가지고 아이를 양육하기가 결코 쉬운일은 아니겠지만 한국의 엄마들은 아이의 '경쟁력'을 위해서라면 호랑이가 아니라 사자, 또는 더 무서운 무엇이든 될 마음의 자세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아이미 추아의 말은 그닥 새로워 보이지 않는다.
국내 최고의 영재들이 모인다는, 그래서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자녀를 보내고 싶어하는 카이스트에서 올해들어 4명의 학생이 자살을 하자 이를 바라보던 사회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제사 알게된 일인양 문제점을 들춰내고 한때는 '개혁'의 선봉장이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댔던 서남표 총장에게 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서 총장에게 쏟아지는 비판의 요점은 '징벌적 등록금제'를 비롯해 그가 도입한 학사정책들이 아이들이 견뎌낼 수 없을 정도의 경쟁을 강요했고, 이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학생들이 극단의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서 총장은 작금의 사태를 불러온 것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말이다. 그 모든 책임이 서 총장에게만 있는가? 카이스트 학생 4명이 죽어나가기 전에 우리는 이 문제를 전혀 몰랐던 것인가? 김예슬씨가 작년에 자타가 공인하는 명문대를 스스로 자퇴하면서 붙인 대자보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을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정말로 대학들이, 대학생들이 어떤 상태인지 몰랐단 말인가? 다시 말해 우리는 이미 '내 자식' 앞에서 맹모이자 타이거 맘이자 서남표였거나, 서남표와 공범이 아니었냔 말이다. 아니면 우리 사회 자체가 이미 카이스트처럼 극도의 경쟁사회로 변해버린지 오래이기에 대학의 문제는 그리 큰 문제로 다가오지 않았던 것인가?
문제는 또 있다. 우리가 '대한민국 최고의 영재들'이라는 카이스트 학생들의 정신건강을 염려하고 있는 사이 놓치기 쉬운 것들 말이다. '지방대' 축에도 들지 못해 '지잡대'라는 자조섞인 용어로 불리는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의 정신건강은 어떠한가? 모르긴 몰라도 그들 사이의 자살률이 카이스트에 비해 매우 낮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에겐 경쟁의 대열에 합류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들 역시 극도의 경쟁 시스템의 희생자이긴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교육처럼 복잡하고 풀기 어려운 문제는 없다. 모두가 교육의 이해당사자이고, 교육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에 관해 생각하고 말할 때 필요한 덕목이 있다. 바로 솔직함이다. 나 자신 또는 내 아이를 위한 계산과 교육정책에 대한 담론 참여 사이의 간극을 최대한 줄여야만 한치라도 '개혁'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어느 텔레비젼 예능 프로그램 자막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처럼 "나만 아니면(혹은 내 아이만 아니면) 돼!"라는 생각으로, 또는 "내 아이만 잘되면 돼"라는 자세로는 교육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초등학교 1학년 신입생인 내 아이는 오늘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즐거운 마음으로 학교엘 갔다.(정확히는 갔을 것이다라고 말하는게 맞는 말이다. 나는 아침에 아이가 눈을 뜨기 전에 출근을 하기 때문이다.) 햇병아리 같은 아이를 보면 아직은 내 마음도 즐겁기만 하다. 그럼에도 마음 한켠이 항상 무거운 것은 내가 앞에서 말한 질문들에 답해야 할 '운명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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