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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반죽글

이광훈 고문을 추모하며

우리는 흔히 '살다보니 해괴한 일도 참 많이 일어난다'고 쉽사리 말하곤 하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경향신문에 오랫동안 몸담았고 후배들의 존경을 받았던 이광훈 전 고문이 하필이면(?) 지난 2일 별세하신 것이다. 기나긴 설 연휴의 첫날 돌아가셨으니 신문으로서 당연히 했어야 할 부고기사를 연휴가 끝나고 나서야 실을 수 있었던거다. 당연히 경향신문 구성원인 나도 연휴기간 동안 이 사실을 몰랐다가 신문이 나오고 난 다음에야 알게 됐다.

이광훈 고문은 내가 입사했을 당시 이미 논설주간인가를 맡고 계셨기 때문에 내가 같이 일을 해볼 기회는 없었다. 사실 같이 식사를 해본 적이 딱 한번 있을뿐이다. 어르신들 드시는 점심자리에 끼어서 몇마디 이야기를 나눠본 것이 전부이다. 개인적인 인연은 사실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거다.

현재 경향신문에 몸담고 계신, 과거 거쳐가신 선배들 가운데 매우 존경스러운 '논객'들이 많지만 나는 이광훈 고문이 경향신문에서 현역으로 활동하실 때 쓰셨던 칼럼들을 무척 좋아했다. 내가 읽은 이 고문의 칼럼의 특징은 칼날을 번쩍번쩍 번득이며 휘두르기 보다는 칼날은 칼집에 넣어둔채로도 대상을 무대 위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요리한다는 비유가 적절할 것 같다. 나는 그런 스타일의 칼럼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주장에 날이 서 있기 보다는 은유와 풍자에서 우러나는 '글맛'이 있는 칼럼들 말이다.

이 고문은 아주 젊은시절부터 문학평론가로 활동을 해왔는데 이런 경력이 그분의 '글발'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본인의 부단한 노력이 없었다면 아무리 문학평론가라 할지라도 '원고지 10장의 예술'을 그토록 능란하게 펼쳐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니었나보다. 경향신문의 공식 부고기사와 시인이자 <김대중 자서전>의 필자인 김택근 논설위원의 추모글을 먼저 스크랩한다.

[부고]글로 향기를 뿜어낸 언론인·문학평론가 떠나다

경향신문 편집국장·논설고문을 지낸 언론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이광훈 삼성언론재단 이사가 2일 오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0세.

1941년 경북 안동 태생인 고인은 고려대 국문과 재학 시절 동인지 ‘비평작업’을 간행하는 등 소년문사(少年文士)로서의 명성을 얻었으며, 대학졸업 직후인 1964년 ‘문학춘추’에 <현대소설의 새로운 모험>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학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염상섭론인 <자연주의 그 위대한 모순>, 김동리 소설의 인물형을 분석한 <사양의 토속적 인간상>, <선우휘론> 등을 차례로 발표하면서 문명(文名)을 날렸다.

고인이 문단에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진 것은 문예종합월간지 ‘세대’의 편집장을 맡으면서부터였다. ‘사상계’가 어려움에 처해 있던 당시 ‘세대’는 영향력 있는 문예교양지이자 뛰어난 신인작가의 등용문이기도 했다. 박정희 군부정권에 의해 투옥됐다가 석방된 이병주가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발표한 것도 바로 이 잡지였다.

500장이 넘는 이 작품의 진가를 단숨에 알아본 고인은 특집으로 실을 예정이던 문학관련 글을 다음호로 미루고 이병주의 소설을 전재했다. 교정과 편집을 혼자 도맡아하는 것은 물론 활자도 기존의 자체(字體)보다 훨씬 더 큰 것으로 조판했다. 목차에는 이병주의 사진을 앉혔는데 이 또한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최인훈의 <광장> 이후 대작에 목말라하던 지식대중은 <소설 알렉산드리아>의 웅혼한 스케일과 공전절후(空前絶後)의 상상력에 열광했다. 이후 그와 이병주는 둘도 없는 글벗이 되어 오랫동안 교유했다.

고인은 1977년 경향신문에 논설위원으로 입사하면서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문화부장, 편집국장, 논설주간·고문과 관훈클럽 총무, 신영기금 이사장 등 신문사 안팎의 ‘벼슬’을 두루 거쳤지만 그가 무엇보다 애정과 열정을 쏟은 것은 경향신문의 사설과 고정 칼럼인 ‘여적’, ‘이광훈 칼럼’ 등을 통한 글쓰기였다.

그의 글은 정치권력의 전횡에 비수를 겨누고, 부박한 염량세태에 화살을 꽂으면서도 부드러움과 서정성을 잃지 않았다. 그는 생전에 “요즘 칼럼에는 쓰는 이의 필체나 문장에서 뿜어 나오는 향기를 찾기 어렵다”며 문기(文氣)와 문자향의 부족을 아쉬워하곤 했다. 저서로는 칼럼집 <메시아의 모범답안> <칼국수와 판도라 상자> 등을 남겼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영자씨와 아들 재규씨(마루필름 부장), 딸 주희씨(영어·불어 번역가)가 있다. (2011년2월7일, 경향신문 김윤숙 기자)

[여적]논객 이광훈

오랜 기간 ‘여적’을 집필했던 논객이 세상을 떠났다. 이광훈 전 경향신문 논설고문이다. 그의 글은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붓 끝에 남아있는 먹물’이란 뜻의 여적(餘滴)을 통해 세상을 품었다. 비록 그의 글에 베인 사람도 따스한 문체에는 웃음을 베어물게 만들었다. 큰 키에 구부정한 모습은 장욱진 화백의 ‘자화상’이란 그림을 떠올리게 만든다. 우산을 들고 휘적휘적 논길을 걸으면 뒤에 개 한마리 쫓아오고 제비가 몇마리 날고….

그는 20대에 종합월간지 ‘세대’의 편집장과 사장을 지내면서 문화계의 거목들과 교유했다. 그래서 동년배보다 10년은 앞서 살았다. 문상객들은 그의 나이가 이제 막 70세라고 하니 생각보다 적은 나이에 적잖게 놀랐다. 일찍부터 문화계의 유명 인사였기 때문이다. 그의 유머는 어느 좌석에서든 보석처럼 빛났다. 얘기를 나누다 보면 처음에는 겸손에, 나중에는 세상을 보는 눈에 놀랐다. 취흥이 돋으면 ‘눈물젖은 두만강’을 불렀다. 혁대를 풀어 그걸로 노를 저으며 꺼이꺼이 우는 시늉을 했는데, 모두가 눈물나게 웃다가 나중에 정말 울고 말았다.

지난해 4월 암에 걸렸음을 알았지만 천연덕스럽게 사람을 만나고 여행을 다녔다. 내내 빈소를 지켰던 정진석 외국어대 명예교수는 중용을 실천하려 했던 유일한 친구였다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광훈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주변 사람들은 이 고문이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떠넘기지 않으려는 또 다른 투병이었다. 암으로 먼저 떠나보낸 아들을 찾아가 주일마다 울었지만 아무에게도 그걸 내색하지 않았다.

그가 생을 접은 섣달 그믐 이 땅의 한파가 물러갔다. 그의 심성처럼 날씨가 포근했다. 그날부터 신문은 유례없이 나흘간 발행되지 않았다. 한 시대를 적신 논객의 부음은 결국 신문에 실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생전에 쌓은 업적을 정리하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었다면 “내가 한 일이 뭐가 있느냐”며 웃어넘겼을 것이다.

물 흐르듯 읽히는 글 속에는 필히 피를 말리는 치열함이 있음이니 삼가 그 글과 삶을 기리는 바이다. 남아있는 우리 ‘여적자(子)’들의 재주없음을 탄하며 붓 끝에 남은 먹물을 바치니, 우리에게 문향(文香)을 내려주시기 바란다. (경향신문 2011년2월12일, 김택근 논설위원)

딱 한 번 점심을 같이 한 것이 아마도 2003년쯤 됐을 것이다. 당시 이 고문의 입담이 매우 좋다고 느꼈던 기억이 남아있다. 반주를 곁들여 선지국밥을 먹는 1시30여분 동안 나는 매우 자주 웃었던 것 같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이 고문이 말씀해주신 일화 하나는 기억이 난다. 당신이 편집국장을 하던 시절 이야기였는데 지금에 비해 과거엔 편집권에 대한 경영진의 간섭이 상상 못할 정도로 심했었다고 한다. 어느날 퇴근해서 집에 있는데 늦은 시간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더란다. 밤늦은 시간 신문사 사장이 편집국장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면 십중팔구 받는 사람 입장에선 별로 달갑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초판 신문 기사에 대한 삭제나 변경 주문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 고문은 일단 전화를 받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짐작했던 사태가 벌어질 조짐이었다. 사장이 기사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는 순간 큰 소리로 전화기에 대고 "예? 뭐라고요? 어? 이상하네, 왜 전화기가 안들리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기지로 사태를 모면한 것이다. 당시 나는 속으로 이분의 칼럼이 핵심을 담고 있으면서도 겉으론 둥글둥글해 보이는 이유를 알겠다고 생각했다. 성격 자체가 그런 분이셨던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잊지 못하는 이 고문의 칼럼이 하나 있다. 이제는 나도 담배를 끊었기 때문에 길거리 흡연자에 대해 불만을 느끼는 경우가 있긴 하다. 그렇지만 이런 생활 속의 주제에서 법과 윤리, 정치와 개인의 영역 등에 관한 담론을 유려하게 풀어내는 글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내가 배우고 싶은 스타일이다.

이 고문은 아마 나를 잘 기억도 못하시겠지만 후배로서 문상도 하지 못해 죄송한 마음으로 이 고문의 명복을 빈다.

[이광훈칼럼] 담배 못끊은 ‘不出’의 항변 

참으로 국지적(局地的)이고 지엽적인 얘기부터 시작해야겠다. 옛날 서대문(돈의문)이 있었던 자리, 즉 경향신문사와 강북 삼성병원이 대각선으로 마주보고 있는 네거리에서 광화문 지하도까지 가는 길에는 모두 다섯개의 관제(官製) 재떨이가 비치되어 있다. 씨티은행 앞과 흥국생명빌딩 모퉁이, 세안빌딩 못미쳐 버스정류장 앞, 현대건설 공사현장 앞, 그리고 광화문 지하도 입구의 횡단보도 앞에 각각 하나씩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북핵(北核)이다, 대선(大選)이다 천하대세를 좌우할 문제들이 산적한 판에 길거리에 놓인 재떨이 숫자나 들먹이고 있으니 이 무슨 한가한 수작이냐고 나무랄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담배를 끊지 못한 골초들에겐 길에 비치된 재떨이의 위치를 파악하는 일도 천하대세 못지 않은 중요한 일이다. 어디쯤에 재떨이가 있다는 정확한 정보없이 담배를 물고 나섰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데나 꽁초를 버렸다가 적발되는 날에는 꼼짝없이 일장훈계와 함께 ‘일금 3만원정’의 범칙금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골초들도 앞으로는 길거리에 놓인 재떨이의 현황을 미리 파악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길거리에서의 흡연이 원천적으로 봉쇄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이근진(李根鎭) 의원(이 분은 2002년 국회수첩에는 새천년 민주당 소속이었는데 신문에는 한나라당 소속으로 나와 있다) 등 국회의원 50여명이 길거리나 옥외장소에서 담배를 못피우게 하는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안을 제출한 것이다. 적발되면 10만원의 벌과금인지 과태료인지를 물어야 한다고 한다.

이른바 ‘이주일 쇼크’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담배를 끊지 못한 불출(不出) 주제에 국민건강증진을 위한 법 개정에 이러쿵 저러쿵 용훼(容喙)할 생각은 없다. 이미 가족이나 담배 안피우는 동료들로부터 온갖 구박을 다 받아온 터에 국민건강을 위해 길거리흡연을 단속하겠다는데 새삼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골초들이 "끊어야지 끊어야지" 하면서도 담배를 끊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본인의 의지가 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핑계없는 무덤이 없다’는 속담도 있듯이 담배를 끊겠다면서도 못 끊는 데는 나름대로 그럴 만한 사연들이 있게 마련이다. 늦게까지 담배를 피웠던 소설가 김정한(金廷漢) 선생은 1980년대초의 한 인터뷰에서 세상 돌아가는 꼴이 ‘하도 더러바서’ 담배를 피운다고 했다. 그런가하면 언론계의 어느 선배 한 분은 장관에 임명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담배끊기가 쉽지가 않다는 사례들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국민건강을 증진한다는 구실로 공중도덕에 속하는 문제까지 일일이 법으로 규제하고 처벌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를. 법률과 도덕률을 혼동하는 것이 동양사회의 전통이긴 하지만 이제는 국가의 강제력이 따르는 법과 강제력이 필요없는 도덕을 구별할 때가 되었다. 국가보안법도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법으로 규제하는 것이 부당하기 때문에 철폐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지 않는가. 또한 간통죄나 혼인빙자간음죄 역시 개개인의 윤리 도덕문제를 형법으로 처벌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미국의 금주법이나 우리나라의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의 실패는 우리에게 국민의 기호나 사회적 관습을 법률로 규제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를 교훈으로 가르치고 있다. 지켜도 그만 안지켜도 그만인 법이나 지키게 할 수 없는 법은 처음부터 안만드는 것이 옳다. 그런 법은 법률의 권위를 무너뜨릴 뿐 아니라 자칫 모든 국민을 위선자나 잠재적인 범법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법으로 규제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법률을 마구 양산하는 이른바 법화(法化)현상도 권력의 오만이다. 담배를 끊어 건강을 증진하는 것이나 담배피울 자리와 피우지 말아야 할 데를 가리는 것은 법 이전에 국민 개개인의 결심과 공중도덕에 속하는 문제가 아닌가. (경향신문 2002년11월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