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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책동네산책

[책동네 산책]‘하버드 책’과 ‘하버드 맛 책’

적어도 내가 아는 출판계 사람들은 프라이드가 강하고, 솔직한 사람들이다. 상업출판으로 밥을 벌어 먹고 살면서도 가슴 속 깊은 곳엔 책에 관한 '그' 또는 '그녀'만의 강한 이데아를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 상업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에서 대체로 굴복하고 말지만 그들의 속깊은 고민까지 무시할 순 없다. 그런 이들이 가장 아파할 곳을 직업 물어보거나 이처럼 글로써 비판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한편으론 '싸잡아 비판'이라는 우려가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개개의 출판사가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로 한 선택들은 의도치 않더라도 하나의 흐름으로 만들어진다. 그게 내 눈에 들어왔다. 하버드를 주제로 한 글을 쓰려다보니 여러해 전에 읽었던 책 한권이 떠올랐다. 정작 글을 쓸때는 찾아볼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엊그제 집을 치우다보니 어느 책 꾸머리에선가 발견이 돼 반가웠다.

7년전 나온 책인데 에티오피아에서 신동 소리를 듣던 소녀가 하버드에 진학했지만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기숙사 동료를 살해하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는 내용이다. 사건 발생을 앞세우고 앞서의 궤적을 추적해 나가는 방식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하버드 맛 책' 보다는 '하버드 책'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미완의 천국, 하버드 - 10점
멜라니 선스트롬 지음, 김영완 옮김/이크

내가 아는 선배 한분은 10년 전쯤 쓴 박사학위 논문의 제목이 <조선인민군의 정치적 역할과 한계>, 부제가 ‘김정일 시대의 당군관계를 중심으로’였다.

정말이지 더할 나위 없이 ‘논문스러운’ 제목을 달고 있던 이 논문이 단행본으로 나오면서 제목이 바뀌었다. 이름하여 <북한 군부는 왜 쿠데타를 하지 않나>. 부제는 ‘김정일 시대 선군정치와 군부의 정치적 역할’이었다. 여전히 딱딱한 느낌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건 소재 자체의 특성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조선인민군의 정치적 역할과 한계’를 보고 ‘북한 군부는 왜 쿠데타를 하지 않나’를 생각해낸다는 건 보통의 내공으론 기대하기 어렵다.

내 선배의 경우는 논문이 단행본으로 만들어지면서 일어난 일이지만, 책이든 영화든 외국에서 만들어진 창작물이 국내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제목이 바뀌는 것은 다반사다. 원제목이 원작자의 의도를 가장 잘 담고 있다고 하겠지만 문화와 관심사가 다를 수밖에 없는 다른 나라, 다른 언어로 옮아갈 땐 변화가 불가피할 수도 있다. 그래서 원작의 이름과 번역된 제목을 비교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예를 들어 프랑스 감독 장 뤼크 고다르가 찍어 고전이 된 영화 <네 멋대로 해라>의 원제목은 ‘숨막힘’이라고 한다. 아마 일본에서 처음 붙였겠지만 ‘네 멋대로 해라’라는 제목은 호평을 받았다. 독일 감독 빔 벤더스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는 원제목이 ‘베를린의 하늘’이었고, 영어로는 ‘욕망의 날개’였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면 언어권이 바뀌면서 생긴 제목의 차이가 흥미롭게 다가올 것이다.

물론, 제목 바꾸기가 좋은 결과만 낳는 것은 아니다.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약빠른 계산이 너무 심해 원제목은 코끼리 코를 만지고 있는데 번역서 제목은 코끼리 엉덩이를 만지고 있는 경우가 쉽게 발견된다. 얼마전 방한한 영국의 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자신의 저서 <이성, 신념, 그리고 혁명>(Reason, Faith, and Revolution)이 한국에 번역되면서 <신을 옹호하다>란 제목이 붙은 것에 대해 “이렇게 희화화한 제목으로는 책의 논지가 제대로 받아들여질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인문서로서는 10년 만에 처음 종합 베스트셀러에 오른 <정의란 무엇인가>의 성공원인을 두고 갑론을박 하지만 쉽게 의견이 일치되는 부분이 있다.

이 책의 표지에 ‘하버드대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란 카피가 올라있거니와, ‘하버드’가 한국에서 가지는 이미지와 권위가 긍정적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그것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요사이 나온 신간 가운데 유독 ‘하버드’란 단어가 제목 또는 부제에서 발견되는 빈도가 높아진 것 말이다. 예상했던 대로 원제목이나 부제 어디에서도 ‘Harvard’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기’라고 단정하긴 애매하다. 저자나 책 내용에서 어떤 식으로든 하버드와의 연줄은 발견되니까.

이처럼 난감할 땐 식음료 제품명에 관한 규제가 떠오른다. 예를 들어 주스 이름에 ‘사과’를 쓰고자 한다면 원료의 몇퍼센트 이상 사과 주스 원액이 들어가야 한다. 원액은 얼마 넣지 않고 인공 향신료로 사과맛을 낸다면? 그럴 땐 ‘사과 맛 주스’라고 해야 한다. 같은 기준을 요즘 하버드를 키워드로 달고 나오는 책들에 적용한다면 ‘하버드 책’이 더 많을까, ‘하버드 맛 책’이 더 많을까. (201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