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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책동네산책

[책동네 산책]전자책시대에도 여전한 '뻥튀기 출판'

비번인데도 내일 떠나는 출장을 준비하기 위해 사무실에 잠깐 나왔다. 바람은 좀 찬데 볕이 너무 좋다. 가을이다. 내일 떠나서 도착하는 독일 프랑크푸르트도 다행히 날씨가 좋은 편이라고 한다. 출장은 준비할 땐 귀찮지만 막상 도착해서 활동을 시작하면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항상 그렇지만 출판계 '일반'을 비판하는 것과 '특정' 출판사를 비판하는 것은 글을 쓰는 입장에서 긴장의 정도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이러저러한 에피소드가 많았던 글이었다. 글이 게재되고 난 다음에도 몇분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는데 놀라운 것은 '특정' 출판사든, 출판계 '일반'이든 출판사들에 대해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씁쓸함은 더욱 오래 남는다.

‘학자금 대출은, 원래 1965년 존슨 대통령에 의한 고등교육법 개정으로 만들어진 제도다.

다양한 형태의 장학금과 민간 금융기관의 대출을 정부가 재보증하는 학자금 대출의 등장으로 국가의 교육 원조액은 급격히 증가했다.

이 뒤를 이어 1972년 닉슨 대통령이 도입한 것이 금융기관으로부터 학자금 대출 채권을 구입하는 학생 마케팅 기구, 통칭 샐리 메이(Sallie Mae)다.

운용 자금과 감독 책임 모두 100% 재무성 관할인 샐리 메이는 은행과 대학에 학자금 대출의 제공을 장려하고, 대출 채권을 사들였다….’

이상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일본 출신 저널리스트 츠츠미 미카의 신간 <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Ⅱ> 43쪽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는 2008년에 쓴 같은 제목의 제1권에서는 신자유주의로 파탄난 미국 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고발하고, 올초 일본에서 발간된 제2권에서는 변화를 내걸고 집권한 버락 오바마 정권 2년 동안 상황이 오히려 악화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런데 책을 펼쳤을 때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서 말이다. 위에 인용한 것처럼, 문장마다 행갈이가 돼 있다. 어느 쪽을 펴봐도 비슷하다. 어림잡아 전체 내용의 60~70%가량이 이런 식이다. 글자 크기가 큰 데다 문장마다 행갈이가 돼 있다 보니 오히려 읽기에 몹시 불편하다는 느낌이다.

출판사에 물어봤다. 일본에서 ‘신서(新書)’의 하나로 발행된 것인데 원서가 그런 형식으로 나왔다고 했다. 일본의 독특한 문화인 신서는 직장인들이 통근열차에서 짧은 시간 안에 볼 수 있도록 짤막하게 쓰인 책이다. 형식은 문고판, 내용은 좀 길게 쓰인 잡지 기사 정도를 연상하면 된다.
한국어로 읽기에 거북한 느낌을 줄 정도라면 행갈이를 좀 조정할 수 있지 않으냐고 물어봤다. 분량을 늘려 양장제본한 단행본으로 만들려고 가독성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대로 둔 것 아니냐는 의도가 담긴 질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본문 종이도 두꺼운 편이었다. 출판사는 “내부에서도 그런 의견이 없진 않았지만 원서가 그러니까…”라며 말끝을 흐렸다. 원서가 그렇다는 게 변명은 된다. 그러나 “얇게 내면 서점에 잘 진열되지도 않고 독자들도 잘 안찾기 때문에 아무래도 이렇게 저렇게 ‘힘’을 주게 된다”는 출판사의 설명은 악순환의 단면을 보여준다.

굳이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확인을 한 건 며칠 전 독자로부터 받은 e메일 때문이었다. 전자책을 둘러싼 출판계 안팎의 논의를 소개한 기사에 대한 의견을 보내왔는데, 한국 출판사들에 화가 나 있는 독자였다. 요지는 꼼수를 부리는 한국 출판사들 꼴보기 싫어서라도 전자책이 하루빨리 활성화됐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는 말했다. “우리나라 출판계는 우물안 개구리라고 생각합니다. 지면 늘리려고 한 권인 원서를 글자 키우고, 간격 늘리고, 빈 공간으로 채워서 2~3권으로 뻥튀겨 만드는 사람들 아닌가요?”

나는 전자책 담론과 한국 출판계의 번역서 뻥튀기 관행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취지로 답장을 보내면서 한국 출판사들의 어려운 사정을 소개하며 출판계 편을 들어주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참으로 입맛 씁쓸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201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