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1년 넘게 '책동네 산책'이라는 문패로 쓰고 있고, 앞서서 선배도 같은 문패로 격주로 연재를 해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인터넷에서 '책동네 산책'을 검색하면 다른 매체에서 새롭게 시작된 코너의 이름으로 '책동네 산책'이 올라온다. 뭐, '책동네 산책'이라고 상표등록을 해놓은 것도 아니고, 이 문패가 그닥 창의성이 발휘된 명칭도 아니긴 하지만 다른 매체가 떡 하니 같은 문패를 달고 연재를 시작하니 좀 거시기 하긴 하다.
“전문번역가라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야?” 한 선배가 뜬금없이 질문을 던졌다. 불만어린 말투였다. 최근 읽은 번역서에 문제가 좀 있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 이러저러한 설명을 했더니 선배는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전문번역가라기보다는 전업번역가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니야?”라고 되물었다. 번역서 비중이 높은 한국 출판계에서 번역가들은 크게 세 그룹으로 나뉜다. 먼저 교수 등 전문연구자를 들 수 있다. 번역계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높은 편이지만 전문학술서 분야로 축소되는 추세다. 두번째는 기자, 금융기관 종사자 등 각자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관심분야에 관한 외국책을 번역하는 경우다. 마지막은 번역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해외유학파 또는 국내 번역대학원, 번역스쿨을 이수한 경우가 많은데 이들이 바로 전문번역가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전문번역가라는 직함이 유행한 것은 대략 5~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통적으로 번역을 많이 하던 교수나 연구자들이 BK·HK 등 돈이 되고 연구실적 산정에도 많은 보탬이 되는 정부 지원 프로젝트들을 우선시하면서 교수 번역자를 찾기가 어려워졌다. 교수 번역자들의 번역물에 대한 문제제기도 누적돼 있던 상태였는데 이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채운 것이 전문번역가들이다. 사실 출판 편집자들에 따르면 전문학술서가 아니라면 전문번역가에게 번역을 맡기는 게 나은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시간 내에 결과가 나오고 문장도 부드럽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냥 번역가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전문번역가라고 소개하는 이유는 뭘까. 먼저 해당 번역가가 특정분야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과 번역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전문번역가라고 표기한다. 인문분야 전문번역가, 경제·경영분야 전문번역가, 과학분야 전문번역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또한 그냥 번역가라고 할 때보다 전문번역가라고 썼을 때 좀 더 권위가 부여된다. 한국의 독자들이 유독 번역자의 권위를 따지는 경향이 심하기 때문에 ‘전문’을 강조해야 할 이유는 더욱 커진다.
번역시장도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번역가가 자신의 전문분야를 알리고 스스로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진정한 전문번역가도 꽤 있을 것이다. 문제는 해당 번역가가 도대체 어느 분야의 전문가인지 알 수 없거나 심할 경우 두번째 혹은 세번째로 번역을 하는 초보자가 전문번역가를 자처하는 경우다. 이럴 경우 말 그대로 ‘전문’과 ‘전업’의 차이가 모호해져 버린다. 전문의 권위가 오히려 떨어지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지적이 당사자들에겐 괜히 까다롭게 구는 것처럼 비칠 수 있겠다. 하지만 전업번역가가 되는 순간 모두 전문번역가를 자처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 언어의 과잉이요, 진짜 전문번역가에 대한 모독이자, 독자에 대한 눈속임이다. 그래서 말인데 번역자가 굳이 전문번역가라고 자신을 소개할 땐 어느 분야가 전문인지 밝혀주고, 해당 분야에 대한 번역 실적이 어느 정도 쌓였을 때에만 ‘전문’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이 어떨까. 이것이 독자들 앞에서 떳떳한 모습이며 번역가 스스로가 그들의 전문성을 제대로 인정받기 위한 길이다. (201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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