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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책동네산책

[책동네 산책]'엄친아' 국제인문학지

인문서를 내는 출판관계자들이나, 인문서를 즐겨 읽는 독자들은 이 잡지를 보면서 묘한 질투심을 느낄지 모른다. 어쨌든 그들은 해냈다.

이것저것 물어보기 위해 허아람 대표와 전화통화를 했다. 보통 취재를 위해 전화를 하면 상대방은 무척 반가워하면서 적극적으로 임하는데 허 대표는 '쿨'했다. 미국, 영국 등에서 주문요청이 들어와 계약관계를 살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단다. 몇마디 하고는 박용준 편집장과 통화하라고 했다. 이미 <INDIGO-ing>이라는 한글판 격월간지를 수년째 내고 있는 허 대표는 영문판 창간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의아스럽다고 까지 했다. 인디고 서원이 성장하는데 언론에 크게 빚진게 없었기 때문일까. 그런 '쿨'함 역시 좋아 보였다.

창간호를 대강 훍어봤는데 영어로 돼 있지만 그리 난해한 수준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아무래도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다보니 필자들도 단어 선택 등에서 고려를 했을 것이다. 박용준 편집장 역시 무난하게 읽어내는 국내 청소년들 독자들도 많다고 말했다.

잡지의 생명력은 계속성일텐데, 여하튼 해외에서 주문들이 들어온다니 다행이다.

INDIGO 인디고 2010.봄 - 10점
계간 인디고 편집부 엮음/인디고서원

“오늘 아침 인디고서원에서 온 레터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INDIGO(인디고)라는 국제인문학 잡지를 만들었다는 소식이 왔더라고요. 편집위원장이 브라이언 파머더군요. 게다가 계간지라니…. 정말 놀라운 속도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웬만한 중견 출판사도 하지 못하는 걸 그들이 해내는 이유가 뭘까요? 기업으로 만들어진 출판사와 태생 자체가 달라서 그런 걸까요? 어쩌면 이런 작업들이 인문학을 하거나 인문서를 내는 사람들에게 많은 자극을 주고 상호작용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긍정적인 기대도 있어요.” 주말을 보내고 상쾌한 기분으로 출근한 지난 월요일 아침, 평소 알고 지내는 한 출판사 편집자가 보낸 e메일의 내용이다.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 ‘청소년 인문학 잡지’를 표방하며 영문으로 발행된 이 잡지를 훑어보면서 묘하게도 이 단어가 떠올랐다. 어쩌면 나에게 e메일을 보낸 편집자 역시 어머니들이 자녀에게 “내 친구 아들 누구는 공부도 잘하고, 착하고, 잘 생기고…”라고 말하며 곧잘 비교를 하는 바람에 생겨난, 완벽한 청소년의 상징이자 질투와 시기의 대상인 ‘엄친아’가 생각났을지도 모른다.
편집위원으로 이름을 올린 사람들의 면면만 봐도 왜 그런지 이해가 갈 것이다. 인디고서원에서 자란 박용준씨가 편집장을 맡았고, 브라이언 파머(스웨덴 웁살라대학 교수)가 편집위원장, 마크 데이비스(영국 리즈대학 교수)가 부편집장이다. 요즘 국내 인문·철학서 독자들 사이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지그문트 바우만(리즈대학 교수)과 슬라보예 지젝(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학 교수)을 비롯해 데이비드 헬드(영국 정경대 교수)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시민운동가들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고 글을 실었다.
이처럼 ‘짱짱한’ 편집진을 자랑하는 국제인문학 잡지의 탄생은 2004년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점’을 표방하며 부산에 인디고서원을 설립한 허아람 대표의 열정과 부산상호저축은행의 지속적인 후원, 자발적 실천으로 사회와 세계 변화의 주인공이 되기를 자처한 인디고서원 아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인디고서원 아이들은 4년 전부터 방학을 이용, 자신들이 감명깊게 읽은 책의 필자들을 찾아가 진지하고 도전적인 자세로 질문을 던지고 토론을 했다. 그들을 감동시키고 열렬한 후원자로 탈바꿈시켰다.
지난해에 대한민국 부산이라는 지방도시에서 온, 고등학생·대학생 인디고서원 아이들을 처음 만난 마크 데이비스는 자신이 받은 충격을 이렇게 설명했다. “서로 완전히 다른 지리·문화적 맥락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21세기 초의 세계화된 소비사회를 지배했다고 할 수 있는 이슈들과 문제들을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대입시험을 위한 암기와 벼락치기 공부가 아니라 문학과 예술을 읽고, 세계의 부조리에 대해 고민하는 또다른 ‘엄친아’들은 이렇게 ‘사고’를 쳤다. 벌써 정기구독신청이 꽤 들어왔고 미국과 영국의 출판 유통업자들로부터도 주문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고 한다. 어느 출판 편집자의 말마따나 ‘대한민국 출판계에선 일어날 수 없는 일’을 해낸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2010.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