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0/책동네산책

[책동네 산책]만들어진 베스트셀러 '주의 요망'

'한번도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 아닌 적이 없다.' 출판계에서 나도는 우스개소리 가운데 하나다. 사실 출판사들이 워낙 영세하다보니 시장에 자그만 바람만 불어도 출판사들은 비명을 질러댄다. 올해 상반기도 출판사들에겐 참으로 힘든 시절이었을게다. 칠레 지진 여파로 종이값이 엄청 뛰면서 제작비는 올라갔지만 천안함 사건-지방선거-월드컵으로 이어지는 각종 대형 사건들 때문에 구매는 줄어들었다.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터졌을 때 출판매출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다. 천안함 사건이 터지자마자 출판인들 사이에서 "올해 상반기 장사는 글러먹었다"는 말이 나온 것은 그 때문이다.

아무리 불황이라도 팔리는 책은 팔린다.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을 낸 출판사들은 그나마 한숨을 덜었을 것이다. 근데 베스트 목록에 오른 책들도 판매권수가 전보다 많이 줄었다고 한다. 출판시장 불황에 대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처럼 항상 제기되는 문제. 독자들은 읽을만한 책이 안나온다고 하고, 출판사들은 좋은 책을 내놔도 독자들이 외면하니 어렵다고 한다. 어찌됐든 베스트 목록에 너무 기대는 독서습관은 그리 좋지 않다고 본다.

지금은 좀 후회스럽지만 대학생 시절 ‘베스트셀러는 읽지 않겠다’는 엉뚱한 독서원칙을 세웠던 적이 있다. 그래서 남들이 다 사보는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은 꼭 다음해가 돼서야 샀고, 서점에선 구석진 자리의 서가에 오래 머물렀던 것 같다. 10년 넘게 미국 의회 도서관장을 역임한 다니엘 부어스틴은 “베스트셀러란 오로지 잘 팔리고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꽤 많이 팔린 그런 책이다”라는 혹평을 남겼다고 하는데 나에게 베스트셀러에 대해 딱히 안좋은 경험이 있었다거나 어떤 대단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남들 다 보는 책을 봐서 무엇하겠는가라는 치기에다, 남들이 잘 안보지만 좋은 책을 읽어서 잘난 척을 해보겠다는 깜찍한 계산이 더해진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습관은 무서운 것이어서 돌이켜 보면 이런 행태는 꽤 오랫동안 지속됐던 것 같다. 베스트셀러 목록이 나를 포함한 그 시대 사람들의 고민과 욕망을 엿보고 사회적 트렌드를 읽는 창이 될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깨달은 것은 한참 뒤이니 말이다.
교보문고·예스24 등 대형서점들은 이번주에 2010년 상반기 베스트셀러 목록과 도서구매 경향 분석결과를 공개했다. 각자의 서점에서 팔린 책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매우 큰 규모를 자랑하는 서점이므로 나름의 트렌드는 읽을 수 있다.
예상했던 대로 소설 <덕혜옹주>와 ‘절판 유언’을 남김으로써 품귀 현상을 불러일으킨 법정 스님의 책들이 최상위권에 포진했다. 거액의 선인세 지급으로 논란이 됐던 <1Q84>, 삼성의 어두운 면을 정면으로 폭로한 <삼성을 생각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자서전을 표방한 <운명이다>와 같이 사회적 관심이 컸던 책들도 이름을 올렸다. 지난해에 된서리를 맞았던 인문분야가 나름 선전했고, 전자책 판매량이 크게 늘었다.
그런데 교보문고는 전체 판매도서 가운데 베스트셀러 비중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것을 2010년 상반기 특징 중 하나로 꼽았다. 전체 판매량 가운데 상위 100위권 안의 도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2008년 8.2%에서 2010년 9.3%로 늘었다는 것이다. 1000위권 도서 판매 비중은 25%로 더 높아진다.
이 같은 현상은 ‘베스트셀러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 뒤엔 유독 베스트셀러에 집착하는 독자들과 그럴수록 베스트셀러 마케팅에 몰두하는 출판사들이 있다. 출판의 다양성 운운하기 전에 이런 현상은 출판사들로 하여금 편법·탈법 거래의 유혹에 빠지게 한다. 바로 출판계를 왜곡시키는 사재기다. 국내 주요 서점들과 출판단체들은 지난 15일 사재기 근절을 위한 베스트셀러 집계 가이드라인 협약을 맺었다. 동일인의 중복구매, 같은 구매자가 여러 배송지로 주문하는 경우, 여러 구매자가 한 배송지로 주문하는 경우 등을 집계에서 제외시킨다는 것 등이다. 이 같은 자율 정화 움직임은 스스로의 의지를 천명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반대로 보자면 얼마나 사재기가 교묘하고 끈질기게 이뤄지기에 구체적인 가이드라인까지 필요할까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베스트셀러는 읽지 않겠다’는 ‘개똥철학’까지는 아니어도 베스트셀러 목록으로 시대를 엿보려 하거나 구입할 책을 고를 때 참고하려는 사람은 주의가 필요하다. (201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