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구병 선생 이야기를 많이 듣다가 책이 나온 것을 계기로 뵙기로 했다. 그의 큼지막한 눈과 입은 누렁이 소를 연상시켰다. 사실 보리 출판사도 요즘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순박(?)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꽉막힌 분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우직한 인상 뒤에 본인이 지향하는 세상을 이룩하기 위한 온갖 전략과 전술이 감춰진 듯했다. 여하튼 선후배들과 조만간 합정역 주변의 '문턱없는 밥집'에 한번 가봐야겠다.
사회에서 한 사람을 부를 때 대체로 통용되는 방식은 이름 뒤에 공식직함을 쓰는 것이다. 그런데 다양한 공식직함이 있는데도 그저 ‘선생’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교수·회장·대표·장관 등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있다고 평가받는 직함을 무시하고 선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최대한의 존경의 표시일 것이다. 그래서 선생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도시문명 한계 직면…자급자족시대 대비 농촌과 손잡아야죠”
흙을 밟으며 살다 - 윤구병 지음/휴머니스트 |
꿈이 있는 공동체 학교 - 윤구병 지음/휴머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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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대학교수를 때려치우고 전북 변산에서 농사공동체를 일궈온 윤구병 보리출판사 대표(67). 언제부턴가 생태에 관심 있는 사람들과 출판인 사이에서 ‘선생’이라고 불리고 있는 그를 지난 4일 만났다.
그는 지난 30여년간 썼던 글들을 선별해 공동체·생태·교육을 각각의 주제로 하는 에세이집(<흙을 밟으며 살다> <자연의 밥상에 둘러 앉다> <꿈이 있는 공동체 학교>)을 휴머니스트 출판사에서 묶어 냈다. 자신이 대표로 있는 출판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책을 낸 이유를 물었다. “누가 그럽디다. 우리 출판사에서 내자고 했으면 직원들이 무척이나 싫어했을 거라고요.”
멀게는 80년대 초반에서부터 가깝게는 2008년에 쓰인 글까지 30년에 가까운 시간이 담겼지만 책에선 시간의 흐름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윤 대표는 “예전 글들을 새롭게 묶어 내자는 말을 들었을 때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면구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다”고 말했다. “내가 쓴 글에서 아직도 귀기울 것이 있다면 내가 제기했던 세상 문제들 가운데 아직도 진전이 안되고 해결되지 않은 지점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공동체·생태·교육의 문제는 해결은커녕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윤 대표가 새롭게 쓴 각권 서문에는 이에 대한 분노, 특히 현 정권에 대한 분노가 그대로 표출돼 있다. “어떤 때는 하는 짓이 지렁이 똥만도 못한 것들이 잔머리를 굴려 땅을 살립네, 공기를 청정하게 보호합네, 강바닥을 긁어내고 강둑을 높여서 물길을 바로잡네….” “사랑의 이름으로, 교육의 이름으로, 위에서는 대통령, 수상이라는 연놈들부터 아래로는 어중이 떠중이 놈년들까지 모두 한통속이 되어 아이들을 집단으로 학대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집단 학살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얼마 전 용산참사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만화집 <내가 살던 용산>과 그림책 <파란 집>을 펴낸 바 있는 윤 대표는 올해 상반기에 사회성 짙은 책을 여러 권 펴낼 예정이다.
그가 지난해 3월부터 보리출판사 경영 일선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윤 대표는 “저항을 통한 문화혁명이 일어나고자 할 때 보리출판사가 조금 더 정면으로 맞서야 할 때가 있다”면서 “이대로 두면 다 공멸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저는 싸우기 싫은데 (그들이) 자꾸 싸움판으로 끌어내고 있습니다.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으므로 이제 와서 움츠러들 이유가 없습니다.”
이야기의 주제를 공동체로 돌렸다. 그는 “인류 역사상 도시문명이 가장 취약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도시 사람들은 생명 에너지보다는 물질 에너지에 기대어 생활하고 있는데 이제 물질 에너지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판단에서다.
윤 대표는 “지금처럼 사는 것은 당연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조만간 메갈로폴리스(거대도시)부터 폐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되면 생명이 공존하는 공동체인 농어촌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는데 사람들은 마치 현 체제가 영속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그는 생명 에너지의 원천인 ‘먹을 것’을 스스로 구해야 하는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선 이제부터라도 도농 간의 교류와 연대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말이나 방학 때 와서 ‘이렇게 씨앗 심고 김매고 거두면 살길이 있겠구나’라고 배우고 일손을 도와야 합니다. 자연과 상생하는 준비를 하고 생명과 공존하는 공동체 주민과 연대를 할 때만 길이 열린다고 생각합니다.”
윤 대표가 서울 마포구 합정역 주변에 친환경 유기농 밥집인 ‘문턱 없는 밥집’과 재활용품점 ‘기분 좋은 가게’ 등을 연 것도 도시와 농촌, 여유 있는 사람들과 못 가진 이들 사이에 느슨하게나마 나눔과 연대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문턱 없는 밥집에 세상에서 가장 청정한 음식과 술이 있으니 오셔서 잡숴주시면 청년 백수들이 1000원 내고 밥을 먹을 수 있고, 마을 어르신들이 그냥 잡숫고 가시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한번 와 보세요.” <20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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