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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구워진 글

[서평]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

이미 써서 내 손을 떠난지 좀 된 글들을 블로그에 갈무리 하는 것도 버겁게 느껴진다. 그놈의 게으름 탓이다. 조금씩만 부지런을 떨어보자고 다짐해도 깜빡하는 사이에 시간이 흘러가 버린다. 어찌보면 삶 전체가 그러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당면했을 때 정리를 하고 지나가야 하는 문제들인데도 차일피일 미루다보면 다른 일, 다른 생각해야 할 거리가 밀고 들어오면서 잊혀버리는 것들 말이다. 의도적으로 미루는 것일수도 있고, 바쁘다는 핑계로 혹은 다른 것들에 우선순위에서 밀려서 그럴수도 있다. 역사의 문제도 마찬가지 아닌가 싶다. 역사 문제에 있어 '확실한 정리'란 불가능한 것이겠지만 최소한 기본적은 사실관계에 대한 정리를 해둬야 오해나 왜곡이 생길 소지가 적어지는 법인데 우리는 그러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다. 이 책이 지적하는 것처럼 말이다.


-표지석 하나 없이 묻히고 뒤틀린 역사 당시 기록과 흔적 뒤져 낱낱이 고증
20대 초반 영어 어학연수를 갔을 때의 일이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학생들과 함께 공부를 하게 됐는데 통성명 시간이 끝난 뒤 유럽 출신의 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 영어가 짧은 데다 처음 만난 사이라 할 수 있는 대화란 게 너희 나라는 어디냐, 나이가 몇이냐, 가족이 몇이나 되느냐 등등의 시시콜콜한 수준일 수밖에 없었다. 이 친구는 내 이름과 고향, 현재 사는 곳 등을 묻더니 내 이름과 지명을 두고 "무슨 뜻이냐?"고 묻는 것 아닌가. 급한대로 한자를 풀어서 몇마디 해주고 나니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 친구 역시 제것에 대해 그리 장황하게 설명했던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분명 내 이름이 이렇게 지어지고 고향이 그렇게 불리는 데에는 분명 어떤 뜻이 담겼거나 이유가 있을텐데 그걸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근·현대사, 특히 일제시대에 관한 기록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우리가 잘못 알고 있거나 잊고 있던 것들을 상기시킨 이 책을 읽으면서 십수년 전의 일화가 떠올랐다. '우리는 오늘의 땅 위에서 오늘을 살고 있지만 오늘의 땅과 시간은 지나간 날, 다시 말해 역사의 시간과 땅이다'라는 평범한 진리가 새삼 되새겨졌기 때문이다.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메시지도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2010년이라는 시간에는 여러 의미가 부여될 수 있다. 그런데 2010년은 100년 전과 연관돼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조선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해가 바로 1910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1910년의 사건이 이뤄지는 배경과 과정, 결과에 대해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론 100년이라는 긴 시간에 앉은 더께는 우리로 하여금 그 시절이 우리와 별로 상관이 없다고 착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정말 과거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 그리고 보여준다. 하찮다면 하찮을 수도 있는 것들이 드리우고 있는 역사의 그늘을.
**사진설명/1911년 <일본지조선>에 수록된 총독관저(1910년까지는 통감관저였음). 통감관저는 서울 남산의 옛 국가안전기획부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 앞 왼편에 있는 큰 은행나무만이 오른쪽 사진처럼 오늘날에도 남아 이 사실을 증언한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통감관저 부분을 보자. 우리는 1910년 8월22일 한국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의 한국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했음을 역사적 사실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조약이 체결된 장소는 어디였을까? 통감관저(통감부가 총독부가 된 뒤로는 한동안 총독관저로 사용됨)였다. 그렇다면 이 통감관저는 어디일까? 답을 모른다고 심하게 자책하지 마시길. 놀랍게도 재야 사학자이자 종종 문화재청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문화재 전문가인 저자가 2005년 옛 안기부터에서 이 장소를 찾아내기 전까지 이 답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는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아예 없었다고 봐도 된다. 지금도 이곳엔 공원 벤치 몇개와 농구대만 설치돼 있을 뿐 표지석 하나 없다고 한다. 반면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됐던 장소인 '중명전(重明殿)' 건물은 잘 보존돼 있다. 저자는 그러나 이 건물이 지어질 때나 을사조약이 체결될 당시 이 건물이 '수옥헌(漱玉軒)'으로 불렸으므로 엄밀히 따지면 '수옥헌에서 을사조약이 체결됐다'고 해야 맞다고 말한다.
서울을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는 인왕산 정상 동쪽에는 '병풍바위'라는 거대한 암벽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돼 있어 먼발치에서만 바라볼 수 있다. 그런데 눈밝은 사람은 이 웅장한 바위 아래쪽에서 뭔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저게 뭐지?'라는 의문이 들겠지만 보통사람은 지나쳐 버릴 이 흔적의 연원을 지은이는 추적했다. 1939년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가 친필로 쓴 '동아청년단결(東亞靑年團結)'이라는 글씨가 새겨졌다 지워진 흔적이라는 것이다. 전시동원체제가 가속화되던 그해 가을 조선 수도 경성에서 대일본청년단대회가 열렸는데 이걸 영원히 기리기 위해 인왕산 암벽에 새겨졌다. 그런데 이것이 정확히 언제 누구에 의해 지워졌는지는 아직 오리무중이다.
저자는 이처럼 일제시대 신문자료와 통감부(총독부)의 문서, 일본인과 조선인이 남긴 기록 등을 집요하게 뒤지고 발품을 팔아가며 흔적이 사라져버린, 그래서 관심에서도 멀어진 일제시대 역사의 현장, 섣부른 역사고증 탓에 잘못됐는지도 모른 채 상식으로 굳어져 버린 것들, 땅이름에 남아 있는 진실과 오해, 식민지 시대에 뒤틀린 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상의 제도 등을 낱낱이 밝혔다.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경술국치의 의미와 같은 큰 이야기들을 많이 하는데 과연 우리가 지난 100년을 제대로 정리했는지 묻고 싶었습니다. 과거 자료들을 들춰볼 때마다 의외로 잘못 정리된 것들이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경우엔 차라리 정리를 안했으면 모를까 애국주의랄까, 비분강개형으로 정리한 것도 많죠. 상식으로 알고 있는 것에 오류도 많은데 일제잔재라고 목청을 높이지만 알고 보면 별로 관계가 없는 것들도 있어요. 2010년을 맞아 지난 100년을 돌아본다면 이런 것들을 좀 정리했으면 합니다." 통감부터의 현재 상황이 궁금해 전화를 건 김에 2010년을 맞이하는 소회를 물었더니 저자가 남긴 말이다. <2010. 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