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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구워진 글

[서평]일본서 먼저 간행된 <삼국유사>의 기구한 사연

출판을 담당하면서 신간에 숲에 빠져 지낸지 어느새 8개월이 지났다. 나이가 한살 두살 먹어감에 따라 '시간 참 빨리 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데 정말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처음엔 서평할 신간을 고를 때 이미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사안을 깊이 있게 다룬 것들 위주로 나갔다.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인 뒤부터는 영역을 넓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것이 나의 관심사와 연관된 책들을 여러권 읽다보면 뒤에 나온 책은 '기시감'이 작용하면서 지루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넓어진 영역에 들어온 책들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들이 우리 고전과 역사 등에 관한 것들이었다. 예전 같으면 먼저 읽을 책들에 밀려 뒤로 쳐졌을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삼국유사>의 인생유전을 다룬 이 책은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재미있다. <삼국유사>가 걸어온 길에 이토록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는지 미처 몰랐었다. 역사학자들은 그간 <삼국유사> 안에 담긴 내용에 주력하다보니 <삼국유사> 책 자체에 담긴 역사를 소개하는데 소홀했었나 보다.

이 책은 <삼국유사>가 걸오온 드라마틱한 길로 뼈대를 세우고, 한일 양국의 역사, 특히 막부시대 일본 역사로 살을 붙였다. 막부시대의 재미난 일화들이 소개되기는 하는데 본 주제와 겉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여하튼 너무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저자인 고운기 교수는 전에도 <삼국유사>에 관한 여러권의 책을 썼는데 앞으로 1년에 한권씩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책을 쓸 예정이라고 한다. 2권과 3권의 구상은 이미 끝났는데, 2권은 <삼국유사>에 담긴 향가를 일본 학자들이 먼저 연구하게 된 과정을 짚어볼 예정이라고 한다. 이 주제 역시 1권과 마찬가지로 흥미로울 것으로 보인다.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 - 10점
고운기 지음/현암사

<삼국유사>가 일본에서 먼저 간행됐다?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와 함께 한국 고대사를 다룬 역사서로 쌍벽을 이루는 <삼국유사>가 일본에서 먼저 간행됐다니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할 것이다. 고려 후기의 고승 일연(一然·1206∼89)이 충렬왕 7년(1281년)에 편찬한 <삼국유사>는 분명 단군신화를 비롯해 한국 고대사를 담고 있는 우리의 책이 분명하다. 그러나 고려의 뒤를 이은 조선에서도 <삼국유사>가 현대에서처럼 추앙받았을까? 그렇지 않다. 불교를 억압한 조선 사대부들의 눈에는 승려가 썼기 때문에 불교적 세계관이 지배하고 있는 역사책이 거북했고, 더구나 신화와 설화가 가득 담긴 책은 황당무계하게 보였다. 조선 전기의 상소문이나 저술에서 <삼국유사>가 인용된 사례가 종종 눈에 띄지만 성리학이 조선의 중심 학문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은 중기 이후로 갈수록 이런 인용조차 뜸해졌다.
현재 <삼국유사> 초판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모두 몇 차례 인쇄됐는지도 확인할 길이 없다. 현재 확인된 것은 5종류의 판본이다. 가장 멀리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조선 초기이고 마지막은 조선 중종 7년(1512년)에 경주 부윤이던 이계복이 찍은 것이다. 그 이후로는 다시 간행된 적이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1904년 일본 도쿄제국대학이 '문과대학 사지(史誌)총서'의 하나로 <삼국유사>를 현대식 활자로 찍어냈다. 한국에선 최남선이 1927년 계명구락부의 기관지 '계명'에 <삼국유사>를 실었다. '계명'에 실린 <삼국유사>는 도쿄제국대학이 간행한 것을 저본으로 삼았다. 묻혀 있던 <삼국유사>에 새로운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은 것은 일본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추적한다. <삼국유사>가 담고 있는 구체적 내용을 소개한 것이 아니라 그 기구한 운명을 되짚었다. 즉 <삼국유사>는 13세기 후반 지은이의 손을 떠나 16세기 후반 경주 관아의 작은 창고에 묻혀 있다가 새로 인쇄된 뒤 임진왜란에 휘말려 17세기 초반 새 집에 들어가고 20세기 초반엔 남의 나라에서 근대식 활자로 다시 태어났다. '스토리텔링 삼국유사'를 부제로 달고 있는데 우리가 잘 몰랐던 <삼국유사>에 얽힌 이야기들은 한 편의 역사 추리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흥미진진하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왜장 가토 기요마사는 비록 전쟁에선 패하지만 상당한 양의 문화재를 약탈해 본국으로 돌아간다. 왜군의 배에 실린 약탈품 가운데 지금으로 치면 국보·보물급에 해당하는 책도 무궁무진하다. 그중 이계복이 1512년에 찍은 <삼국유사>가 포함됐고, 일본 에도막부의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상납됐다. 현재 국내외에 남은 <삼국유사> 판본 가운데 전승 과정이 상세하게 남은 것은 이 책이 유일하다.
도쿠가와는 상당한 애서가여서 장서각을 만들어 귀중한 책들을 보관했다. 그가 죽으면서 남긴 책들은 아들들에게 물려졌다. 역시 책을 소중하게 여긴 아홉 번째 아들 요시나오(義直)가 <삼국유사>를 비롯한 중요한 책들을 물려받았다.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막을 내리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도쿠가와 가문의 장서는 잘 보존돼 나고야 시립 호사문고(蓬左文庫)의 모태가 됐다. 그런데 19세기 말~20세기 초 일본에 현대적 역사학을 도입하려던 쓰보이 구메조(坪井九馬), 구사카 히로시(日下寬) 같은 학자들에게 <삼국유사>가 눈에 띄었고 현대식 간행으로까지 이어졌다.
도쿠가와 가문의 그 많은 책 중 어떻게 <삼국유사>가 눈에 띄게 됐을까. 여기에 또 하나의 드라마가 숨어 있다. 1624년 도쿠가와 가문이던 오와리 번(尾張藩)에서 천왕에게 32종의 책을 빌려줬다 돌려받는다. 천왕이 봤던 책이라면 특별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당연히 책의 목록이 따로 만들어졌다. 이 목록에 <삼국유사>가 올라 있었다. 저자는 도쿄제국대학 국사학과 학생들이 읽을 원전을 찾던 학자들 눈에 이 목록이 대번에 들어왔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삼국유사>의 현대판 간행이 조선 침략을 뒷받침하기 위한 이론화 작업의 일환이었음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로 여겨지는 <삼국유사>의 고갱이인 단군신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저자는 책 말미에 영국의 인류학자 말리노프스키의 말을 인용해 이 질문에 답했다. "신화는 모든 것의 기원을 신성의 영역과 관련시킴으로써 도덕이나 관습, 질서와 규범을 신성시하고 정당화하는 헌장으로서의 기능을 가진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쓰던 시절의 맥락을 이해하는 게 먼저라는 얘기다. 왜 조선시대 사람들이 <삼국유사>를 '황당하다'며 배척했고, 현대에 와서 이 책이 왜 그토록 각광을 받는지도 마찬가지다. <2009.12.12>

**사진설명: 첫번째 사진은 최남선이 1927년 잡지 '계명'에 실었던 <삼국유사>의 현대판 판본이다. 1512년 경주에서 이계복이 간행한 뒤 최초로 국내에서 중간된 것이다. 두번째 사진은 도쿠가와 가문이 보관해온 <삼국유사> 판본이다. 빨간색 도장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직접 소장했었음을 나타내는 '어본(御本)' 도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