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회나 국가가 선진적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척도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흔히 선진화를 말할 때 자동적으로 떠올리는 것이 경제성장이다. 선진화된 사회에서의 삶을 '품위 있고 균형 잡힌 삶'이라고 정의할 때 경제적 풍요로움이 이런 삶을 가능케 해 줄 전제조건의 하나일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이 명제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경제적 풍요로움을 이룩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경제적 풍요로움이 선진화의 유일한 조건인가'라는 질문은 남는다.
이 질문은 그 자체로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선진화의 방법론에 대한 문제제기를 담고 있다.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2007년 말 한 칼럼에서 "선진화의 기본은 사회적 신뢰다. 경제성장도 중요하지만 사회통합을 이루면서 선진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제 어떻게 신뢰를 회복하고 선진화를 이뤄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선진화를 모토로 집권에 성공한 정부 아래에서 벌어질 후진적인 행태들을 예견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2주전 독일에서 열린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을 방문한 자리에서 생뚱맞게도 오래전 읽은 이근 교수의 글을 떠올린 것은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을 독일 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신뢰에 있음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박람회장 한쪽에 기자실이 마련돼 있었는데 여러 출판사가 가져다 놓은 홍보물 사이에서 눈에 띄는 것을 발견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발간되는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이 도서전 뉴스만 모아 매일 발행하는 특별판이었다. 첫째날 발행된 타블로이드판 신문 1면은 1950년 설립돼 헤르만 헤세,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 유명 작가들의 책을 낸 출판사 '주어캄프'(Suhrkamp)가 자사 홈페이지에 올린 내용을 큼지막한 사진으로 처리했다. '주어캄프는 베를린으로 간다. 우리는 여기에 남는다. 주어캄프의 일꾼들이 일자리를 찾는다'는 제목과 함께 25명의 이름과 사진 약력 등이 올라 있었다.
오래 전부터 주어캄프와 거래해오던 한국 출판사 관계자를 통해 들은 내용은 이렇다. 직원이 150여명 정도되는 이 출판사가 내년에 본사를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으로 옮기는데 개인 여건상 베를린으로 이주하지 못하는 직원이 다수 생겼다. 출판사를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자 출판사는 여러 경로를 통해 "이 사람들은 주어캄프가 보장하는 인재들입니다. 이들을 믿고 채용하셔도 됩니다"라고 홍보하며 적극적으로 재취업을 알선하고 있었다.
이들이 출판사를 그만둬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은 100% 출판사 책임만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제 곧 남이 될 사람들을 위해 출판사는 섬세한 배려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피고용자를 위해 고용자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독일에서 일반적인지는 모르겠지만 문자메시지로 해고를 통보받는 나라에 사는 사람으로선 참으로 낯선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특히 강자가 약자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기대와 신뢰는 '위험사회'를 살고 있는 현대인으로 하여금 최소한의 삶의 안정성을 기대할 수 있게 해준다. 언제 잘릴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정규직들에게, 재계약 시기가 다가오면 단두대에 선 심정이 되는 비정규직들에게 대통령이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는 한시도 늦출 수 없는 우리의 중요한 과제"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나라의 우리에게, 독일 출판사는 '선진화의 기본은 사회적 신뢰'라는 명제를 곱씹게 한다. <2009.10.29>
**위 사진에 나오는 실제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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