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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책동네산책

이사 단상

어제도 짐 정리를 했다. 이사는 다다음주인데 책 정리는 이번 주말에 하기로 했다. 이사를 하도 여러번 해서 책을 착착 쌓아서 노끈으로 단단히 묶는 작업은 꽤 실력을 자랑한다. 근데 이번에 이사하는 집도 전세집이니 빠르면 2년 뒤, 혹은 그 몇년 뒤 다시 이 작업을 해야할 것이다. 그때는 내 아들놈도 나 같은 고민을 하겠지.

책장 빼곡한 헌 책은 고스란히 내가 온 길인데 아쉽지만 이별의 순간

책장이 미어터지는데도 10년 가까이 손길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책을 쉽사리 처분하지 못하는 것이 병이라면 나 역시 이 병의 환자군에 속한다. 이사를 앞두고 주말마다 책 정리를 시도하는데 매번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어디가서 자랑할 정도의 장서가는 아니지만 욕심만큼 책을 쌓아둘 정도로 넉넉한 공간에 살 수 있는 처지는 더욱 아니어서, 헌책방 혹은 폐지상에 보낼 생각으로 과감하게 책을 뽑아들어 본다.
이 책이 처음 내 손에 들어왔던 때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고, 언젠가 내 손길을 다시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바닥에 내려놓지 못한다. 내가 버리자고 하는 책을 아내가 반대하기도 하고, 아내가 바닥에 내려놓은 책을 내가 다시 꽂아두기도 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 사이 이사하는 날은 코앞으로 다가오고야 말았다.
어딜 가나 쉽게 책을 구할 수 있는 시절인데 버릴 헌책을 쉽사리 골라내지 못함은 책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세워두지 못한 탓이 제일 클 것이다. 기준이 모호하다 보니 저인망 식으로 일단 쌓아놓고 보자는 심리가 발동한다. 그러나 한 번 읽었거나 읽으려고 한 책이 담고 있는 과거의 기억에 대한 애착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이미 읽은 책을 버리는 게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인 것 같다. 고속도로를 지나다 만나는 절개지에서 지층의 단면을 보게 되듯 헌책과 새책이 섞여 있는 책장은 책 주인의 생각의 행로를 보여준다.
김우창 교수는 헌책에 대한 단상으로 비평집 <심미적 이성의 탐구>(솔)의 머리말을 대신한 적이 있는데 이런 생각과는 사뭇 다른 말을 했다. 김 교수는 "가지고 있는 책이 헌책이 되는 것은 장서주가 나이가 들어간다는 단순한 사실을 뜻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썼다. 그는 "바랜 종이, 문드러진 책장, 떨어진 표지 등으로 하여 그 몰골이 너무나 흉하고 시들"해진 책을 보면서 죽은 사람이 입던 옷이 주는 이질감과 혐오감을 느낀다고도 했다.
책과 함께 평생을 살아온 그가 헌책에 대해 이처럼 극단적인 표현을 쓴 것은 책을 폄훼하려 한 것보다는 삶의 본질인 직접성과 현재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 책들이 아직 새것이었을 때, 새로 구입했을 때의, 아무리 가벼운 것이었을망정 흥분을 가능하게 한 에너지의 장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의 삶을 살지 어제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는 행위는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이든, 쾌락을 느끼기 위한 것이든 당시의 관심과 필요에 의해서다. 그런데 어떤 내용이 있는지조차 기억되지 않는 옛날 책은 현재의 시점에선 공허한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김 교수가 이 문장을 쓸 때는 환갑을 4년쯤 앞둔 시점이다. 나는 아직 그 나이가 될려면 한참 멀기도 하거니와 김 교수에 비해 티끌에 불과할 독서편력이기 때문인지 그처럼 단호하게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내 책장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헌책이 뭉텅이로 버려지면 아직 무른 땅을 밟고 있는 내가 더 불안정해지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마저 드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나의 '과거'와 이별을 해야 할 날이 머지않았다. 아들 녀석의 '현재'가 한 권, 두 권 쌓이더니 언제부턴가 무서운 기세로 책장에서 부피를 늘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빠의 과거는 자라나는 아들의 현재에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는 노릇 아닌가. <2009.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