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주의가 오작동 하고 있다는 얘기는 사실 새삼스러운게 아니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공약을 어기고도 목을 세울 수 있는 것, 대통령이 온갖 파탄난 국정 현안에 대해 사과하거나 유감스러워 하지 않는 것, 그런데도 그들에 대한 지지는 식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의 연속선상에 이번 국정원 사건이 있다고 본다.
[로그인]고장난 민주주의와 ‘해킹’
이탈리아 ‘해킹팀’ 자료 유출로 불거진 국가정보원의 민간인 사찰 의혹과 뒤이어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한국 민주주의의 오작동이 징후가 아닌 엄연한 현실임을 다시 한번 극명하게 보여준다.
압권은 자살한 동료 임모 과장을 추모한다며 ‘국정원 직원 일동’이 낸 사상 초유의 성명이다. 그들은 국정원이 민간인을 해킹했을 수 있다는 의혹 제기를 “백해무익한 논란”이라고 규정하고 “자국의 정보기관을 나쁜 기관으로 매도하기 위해 매일 근거없는 의혹을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고 했다. 그리고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질 각오를 하라고도 했다. ‘무명의 헌신’을 한다는 국정원 직원들의 이 과감한 집단행동은 본분을 망각한 심각한 도덕적 해이를 넘어 주권자인 국민에 대한 도발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현대 민주주의의 운영 원리는 대표와 책임, 견제와 균형으로 요약된다. 헌법 제1조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주권자는 국민, 즉 시민이라고 못 박고 있다. 그런데 시민들이 직접 통치를 할 수 없으므로 대표자를 뽑아 통치를 위임한다. 선출된 대표자는 혼자서 모든 공적 업무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기구에 공적 업무의 집행을 맡긴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수직적·수평적 책임성 기제가 작동해야 한다. 대표자가 주권자에게 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 수직적 책임성이고, 국가 공적 업무의 3주체인 입법·사법·행정부가 서로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이 수평적 책임성 기제이다.
문제는 이러한 다층적 대표·위임 체계가 ‘주인·대리인 문제’를 동반한다는 것이다. 주권자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대표자가 주권자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원리상으로는 선출된 대표가 도덕적 해이를 범할 경우 주권자는 다음 선거에서 그 또는 그가 속한 정치집단에 투표를 하지 않음으로써 책임성을 강제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선 대리인의 도덕적 해이가 너무 은밀하게 이뤄져서 드러나지 않거나, 설사 드러난다 하더라도 이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묻지 못하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한국처럼 대통령의 권한이 강하고 정당 제도가 취약한 정치 체제에선 대표자에게 책임을 묻고, 견제를 통해 균형을 이루기는 더욱 어렵다.
대한민국 국민은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통치자로 뽑았고, 국정원에 ‘국외 정보 및 국내 보안정보(대공·대정부전복·방첩·대테러 및 국제범죄조직)의 수집·작성 및 배포’(국정원법 제3조) 임무를 맡겼다. 지난 21일 공개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해킹 프로그램을 대테러·대북용으로만 사용했다는 국정원 해명을 믿는 사람은 10명 중 3명에 불과하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국정원이 해킹을 통해 민간인을 사찰했을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을 품게 된 바탕에는 여러 차례 드러난 국정원 일탈의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 대선의 댓글 사건이다. 많은 국민이 분개하고 대한민국이 커다란 홍역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국정원 개혁은 ‘셀프’에 그쳤고, 정권 안보를 위해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헌신짝 취급을 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사법적 단죄 여부는 아직도 최종 확정되지 않았다.
더욱 암울한 것은 새롭게 불거진 국정원 문제를 치유할 대증요법조차 나오길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국정원의 해킹 의혹이 불거진 지 2주가 지났지만 이에 대해 한마디 말조차 내놓지 않고 있는 박 대통령은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의 수직적 책임성 의무를 수행할 뜻이 전혀 없어 보인다. 수평적 책임성 기제의 작동을 기대하기도 난망하다. 야당이 문제제기를 하고 있으나 국회의 과반을 점유하고 있는 새누리당은 ‘주인을 물어뜯는 개’에게 목줄을 채우기는커녕 그 개를 지목하는 손가락을 깨물 태세다. 추락하는 한국의 민주주의엔 날개가 없다. (경향신문 2015년7월24일자)
책임성과 반응성, 견제와 균형 등 민주주의의 기본 운영 원리에 대해 최장집 교수가 쉽게 설명한 영상이 있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 한국 민주주의 현재와 그에 대한 비평 등에 대해 쉽고 친근하게 설명하고 있다. 역시 대가 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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