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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출신의 출판사 대표 한분과 옛날에 기자가 쓴 책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화제는 내가 먼저 던졌는데 '기자가 쓴 책은 왜 대부분 재미가 없는가'였다. 출판담당 기자를 하던 시절 신간으로 나온 기자 선배들의 책을 여럿 접했는데 작정하고 어떤 주제에 대해 쓴 책은 그렇지 않았지만 과거에 쓴 칼럼을 갈무리한 책들은 영 아니올시다였다. 아무래도 그날 그날 짧은 글로 승부를 봐야 하는 신문과 긴 호흡으로 한 주제에 천착해야 하는 책이라는 매체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그 대표님은 나의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자신의 경험을 들어 그분의 지론을 더했다. 출판사를 하고 있다보니 후배 기자들이 이런저런 주제와 원고를 들고 책을 내고 싶다고 찾아오는데 자신은 딱 한마디로 일단 물린다고 했다. "어떤 주제도 좋으니 '나'로 시작되는 일기를 3개월간 써 본 다음 오라"라는 주문이라고 했다. 얘기인즉슨 기자들이 쓰는 기사는 보통 주어가 '나'로 시작되는 경우가 없는데, 신문에서는 그래도 되지만 책을 사는 독자들은 지식도 지식이지만 저자의 생각을 듣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나 역시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로 시작되는 칼럼을 한번 써보았다. 너무 신파조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칼럼을 쓸 때 항상 사전에 데스킹을 해주는 가까운 두사람이 이 정도면 괜찮다고 해주어서 용기를 냈다.


[로그인]현대판 음서제의 진실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시골 초등학교·중학교에서 나는 선생님들로부터 은근한 후의와 대접을 받았다. 성적도 좋고 별다른 말썽을 피워본 기억이 없으니 꾸지람 들을 일이 없긴 했다. 당시 아버지는 정부에서 막 독립한 공기업의 시골 지사에 다녔다. 학부형 대부분이 손바닥만 한 논을 경작하는 농부들이고 재정자립도 전국 꼴찌를 다투는 가난한 지역에서는 말단 기술직이긴 했으나 공기업에 다니는 봉급생활자의 아들조차도 꽤나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내가 누렸던 후의는 일거에 사라졌다. 전학 온 서울의 중학교에서 곰팡내 나는 반지하 전셋집에 사는 학생은 자선의 대상일망정 후의의 대상은 되지 못했다. 선생님들의 다정한 눈길을 받는 학생은 따로 있었다. 그 아이는 외할아버지가 법원에서 높은 자리를 지낸 법조인이었고, 아버지는 검사라고 했다. 그는 성적이 좋았지만 유독 체육을 어려워했다. 체육 시간에 농구 자유투 실기시험을 봤는데 절반도 성공시키지 못했지만 A를 받았다. 다른 종목도 모두 중간 이하였지만 그의 실기점수는 항상 A였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치들은 도처에 있었다. 현역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빡세다’는 방위 부대에서는 내가 배치되고 한달 뒤 소집해제돼 나간 고참의 ‘무용담’을 한참 동안 전해 들었다. 그의 아버지는 현직 대통령을 오랫동안 가까이서 보좌한 유력 정치인이었고, 그는 입시부정이 들통나 대학 입학이 취소된 전력의 보유자였다. 그는 툭하면 결근을 하고, 훈련을 나가면 동료나 후임을 엽기적으로 괴롭히는 등 악행을 저질렀지만 언제나 간부들로부터 특별대우를 받았다. 진급을 노리던 연대장이 그의 아버지의 후원을 기대했다는 것은 연대본부 간부와 병사들이 다 아는 비밀이었다.


현역 의원들의 자녀 취업 청탁 및 특혜 논란이 잇따라 불거지면서 ‘현대판 음서제’라는 공분이 일고 있다. 음서제 앞에 ‘현대판’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호들갑이지만 과연 한국 사회에서 음서제가 사라진 적이 있던가? 도덕적 기준과 투명성이 높아지면서 대표적인 부패 유형의 하나인 봉건적 신분 세습 관행이 완화되기는 했다. 그러나 돈으로, 권력으로, 연줄로,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자녀들을 좋은 학교에 집어넣고, 번듯한 곳에 취직을 시키는 것은 이 땅의 특권층에게 깊이 각인된 유전자이다. 이 유전자는 보수와 진보, 여와 야를 가리지 않는다. 최근에 벌어진 논란은 질 좋은 일자리로 흐르는 수로가 마르면서 수면 아래에 잠겨 있던 관행이 모습을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


과거엔 변변한 배경이 없는 청년 무리도 괜찮은 직장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풍부했기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특권 청년’들의 존재가 희석되었다. 계급 간 이동을 가능케 하는 사다리가 특권 없는 청년들의 좌절과 분노를 해소시켜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악의 청년실업 시대로 접어들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딸 취업 청탁 논란의 당사자인 윤후덕 의원조차도 언론 인터뷰에서 “딸이 대학 시절 모두 A학점을 받을 정도로 우수한 인재임에도 취업이 쉽게 되지 않더라”라고 토로하지 않던가. 이럴진대 ‘부모 스펙’을 갖추지 못한 청년들을 위한 계급 사다리는 허약하다 못해 부러지기 직전이다.


서울지방변호사회가 ‘음서제 방지법’을 제안했고, 야당이 검토에 착수했다고 한다. 고위공직자의 배우자와 자녀의 직업 및 취업 현황을 공개하고, 특혜성 취업·승진이 의심되면 정부가 조사에 나선다는 내용이다. 당장 사생활 침해 논란이 예상된다. 그러나 이런 고육책이 제안됐다는 것 자체가 사태가 전에 비해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현대판 음서제 논란이 과거와 다른 게 있다면 이것이다. 논란의 결말이 달라지려면 역시 돈 없고, 힘 없는 사람들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 특권층이 스스로 특권을 내려놓은 적은 없다. [경향신문 2015년9월4일자]



(낙산사에 있는 의상대와 동해 바다)

Posted by 까만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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