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때문에 온통 난리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당시 나와 우리 가족은 국내에 있지 않았다. 한꺼번에 희생된 많은 사람들에 대한 애석함과 미안함, 무능하기 짝이 없는 정부에 대한 분노, 그리고 오보와 과도한 취재경쟁을 일삼는 언론에 대한 짜증을 실시간으로 겪지 않았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다행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런데 보름 전쯤 메르스 국내 환자가 최초 발생한 이래 스멀스멀 퍼져가더니 급기야 둑이 터져버린듯 동시다발로 확상되는 불안과 공포를 보면서 지난해 세월호 사건 당시에도 이랬겠구나 싶다. 많은 공무원들이 애쓰고 있겠지만 정부가 메르스 확산에 관해 '믿으라. 너무 불안해 할 필요 없다'고 하고 나면 곧이어 이 공언을 허무는 일이 벌어지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그 사이 정부는 양치기 소년이 돼 버렸다. 답답한 노릇이다.
아직 깔끔하게 정리되 않은 막연한 아이디어 수준이긴 하지만 한국 정부, 더 넓게는 국가는 21세기형 가버넌스를 여전히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 갈수록 빈도가 높아지는 크고 작은 재난에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일차적으로는 대통령에서부터 정부 각료, 정치인들에게 각각의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겠지만 거시적인 차원에서의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세월호 참사 뒤 박근혜 대통령이 '국가대개조' 운운하며-어쩜 그리 단어 선택도 자신의 아버지스러운지-난리법석을 떨었지만 이번 사태로 국가대개조는 커녕 행정부조차도 한치의 개조도 이뤄지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역시 답답한 노릇이다.
[로그인]황교안의 애국가와 찬송가
임기 절반 전환점을 조금 앞둔 박근혜 대통령이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한 사람은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다. 황 장관이 총리 후보군에 포함돼 있다는 얘긴 진작 있었지만 막상 그가 차기 총리 후보로 지명됐다는 소식을 접한 순간 뭔가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찾아보니 43대였던 이완구 전 총리를 비롯해 그간 총리로 재직한 사람들 가운데 법조인 출신은 많았지만 법무부 장관을 지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현직 장관이 곧바로 자리 이동을 하는 것도 흔치 않았다. 청와대가 인선배경의 하나로 “대통령의 국정철학에 대한 이해가 깊다”고 들었거니와 황 장관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뢰가 깊다는 방증일 것이다.
황 장관의 정체성은 애국가와 찬송가로 대표된다. 황 장관의 애국가 사랑은 유별나다. 그는 지난해 11월25일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통합진보당 정당해산심판 마지막 공개변론에 출석해 1989년 1월 폐지된 국기강하식에 대한 어릴 적 추억을 간곡하게 풀어놓으며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느끼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얘기했다. 그가 취임한 이후 법무부는 대부분의 공식 행사에서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른다.
황 장관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사법연수생이던 1983년 신학교를 졸업한 현직 전도사인 그에게 찬송가는 애국가 못지않게 소중하다. 애국가와 찬송가는 각각 나라와 신을 찬미하고 은총을 기리는 노래다. 안익태 선생이 지금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를 작곡하기 전인 1900년대에 등장한 다양한 애국가들이 대체로 교회를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유포됐다는 사실을 새삼 환기하지 않더라도 애국가와 찬송가의 정조와 논리는 많이 닮아 있다.
황 장관이 공직자로서 애국가를, 기독교인으로서 찬송가를 아끼고 사랑한다고 누가 뭐라 하겠는가. 공직자의 국가에 대한 충성은 필수 덕목이며, 종교의 자유는 헌법으로 보장 받는다. 그러나 황 장관에게 애국가와 찬송가가 공직자로서 국가에 대한 충성과 개인으로서 신앙의 차원을 넘어선다. ‘하느님이 보우’(애국가 1절)해주길 기원하는 애국가와 ‘만복의 근원 하나님 온 백성 찬송 드리’(찬송가 1장)는 찬송가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엿보인다.
황 장관은 적 또는 남과 나를 구분하는 도구로 애국가와 찬송가를 즐겨 사용해 왔다. 그는 헌법재판소에서 국기강하식과 애국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은 뒤 “어느 순간부터 태극기가 우리 국기가 아니고, 애국가가 우리 국가가 아니라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역 국회의원 5명이 속한 통합진보당이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다면서 ‘암적 존재’라고 했다. 지난 4월 신임 검사 임관식에서는 “헌법 가치 수호는 나라 사랑에서 출발하고 나라 사랑의 출발은 애국가”라면서 애국가를 4절까지 큰소리로 부르지 못한 검사들을 나무랐다고 한다. 애국가로 ‘국민’과 ‘비국민’을 가른 셈이다. 그가 저서 <교회가 알아야 할 법 이야기>에 적은 내용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책에 쓴 “우리 기독교인들로서는 세상법보다 교회법이 우선 적용돼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은 교회 안에선 ‘신앙고백’이겠지만, 교회 밖으로 나오는 순간 ‘교인’과 ‘비교인’을 가르는 칼이 된다.
황 장관에겐 ‘다양성’보다는 ‘구분’이 어울린다. 그에게 구분은 나와 다른 상대방을 인정하기 위한 전제가 아니다. 강요와 배제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에 더 가깝다. 그가 총리가 되면 한국 사회에서 관용과 다양성이 설 자리가 더욱 좁아지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황 장관을 선택했다. 집권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레임덕이 신경쓰이는 박 대통령으로선 구분과 강요와 배제에 능한 황 장관이 뒷문 단속을 맡기기에 안성맞춤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황 장관의 국무총리 지명을 국민을 위한 인선이라기보다 박 대통령을 위한 인선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2015년6월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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