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비가 내리더니 공기가 아직 쌀쌀하긴 하지만 꽤 맑아졌다. 그런데 봄을 만끽하기는커녕 요즘 유행하는 감기에 걸려 고생하고 있다. 요즘 감기는 열이 많이 오르지 않는 대신 목이 잠기고 콧물이 흐른다. 사람들이 "목소리를 보니 감기가 단단히 걸렸구만"이라고 하면 "이거 요즘 최신 트렌드에요. 얼른 동참하세요"라고 농을 치긴 하는데 흐르는 콧물과 재채기는 성가신 게 사실이다.
'관훈저널' 2015년 봄호가 '여기자 25% 시대'를 특집 주제 가운데 하나로 다뤘다. 이 특집에 에 내가 보낸 글이 한꼭지 실렸다. 갈무리 해둔다.
남성 기자가 본 여성 기자
'남자 기자들이 느낀 여자 상사와 후배들과 일하기'에 관해 쓰려면 욕먹을 각오를 먼저 해야 한다. 여성 기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겪은 일화나 느낀 점들을 아무리 '긍정적'으로 그린다 한들 여성 기자들로부터 '의식 수준이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느냐'는 핀잔을 들을 공산이 크고, 혹여 '부정적' 경험을 부각시키기라도 하면 핀잔이 아닌 비난이 쏟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남성 기자들로부터는 반대의 평을 받을 것이다. 잘 해봐야 핀잔, 잘못하면 비난을 덤터기로 쓸게 뻔한데도 이 글을 쓰기로 한 것은 그간 내가 알게 모르게 여성 기자 선후배에 대해 가졌던 편견, 그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저질렀던 실수와 잘못 등을 돌아보고 바로잡는 계기로 삼을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 언론에서 여성 기자의 비율이 25%를 넘었다는데도 여성 기자에 대해 말하는 게 '여전히' 논쟁적인 상황이라면 평범한 남성 기자의 의식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 상황을 개선시키는 자그마한 실마리라도 제공할지 모른다는 기대도 해보았다.
1.
여성 기자들과 함께 일한 경험을 떠올려보기 전 한국 언론에서 여성 기자는 어떤 존재인지 잠시 생각해본다. 현재 직업세계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가시적인 벽은 거의 사라진 상태다. 여성에게 가장 비우호적인 조직이었던 군조차 병종과 병과를 불문하고 여성이 진출하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다. 그럼에도 '여'검사, '여'선생, '여'군 등 직업 앞에 여성임을 명시하는 직업명이 통용되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그리고 언론계에서도 '여'기자는 그 기자의 성이 여성이라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의 상품으로서 판매되곤 한다.
5초만 타도 기절…전투기 훈련 '여기자의 도전'. 최근 어느 방송사가 내보낸 뉴스의 제목이다. 제목만 봐도 이 리프트의 내용이 무엇인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어떤 계기가 있어서 이 리포트가 준비됐는지는 모르겠으나 전투기 조종사 군복을 입은 여성 기자가 등장하고 중력 저항 운련 기계가 나온다. 남성이건 여성이건 일반인이 전투기 조종사들이 받는 본격적인 훈련을 체험하면 힘들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이 뉴스의 편집자는 '여기자의 도전'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만약 이 체험을 해본 기자가 남성 기자였을 경우에도 같은 제목을 달았을까? 남성 기자가 전투기 조종사 훈련 체험을 한 뉴스에 편집자가 '남성 기자의 도전'이라고 제목을 달았다면 당연히 데스크로부터 깨졌을 것이다.
올초 어린이집 보육교사가 어린아이를 심하게 때리는 장면이 담긴 폐쇄회로(CC)TV 녹화영상이 공개되면서 큰 파장이 일었다. 어린이집 보육교사나 원장의 아동학대 사례들이 추가로 폭로됐다. 영상의 힘은 강력해서 학대 장면이 담긴 화면을 본 사람들은 너나 없이 분노했고, 정부는 부랴부랴 대책을 내놓았다. 상당기간 지속된 이 파동에 대한 속보가 이어지면서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길 수 밖에 없는 일하는 엄마로서 느낀 분노'에 관해 여성 기자들이 쓴 칼럼성 기사들도 여럿 보도됐다. 남성 기자들이 쓴 기사는 자신을 주어로 등장시키지 않았고, 어린이집의 어린이 학대 문제를 사회 구조적인 관점에서 분석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유독 여성 기자들은 '엄마'로서 기사를 쓸 것을 요구받았던 것이다.
2015년의 한국 언론치고 '육아는 여성의 몫'이라고 드러내놓고 쓰는 언론은 없다. 반대로 '육아와 가사는 부부 공동의 몫'이라는 캠페인성 기획을 수차례 해온 게 한국의 언론들이다. 그런데 막상 어린이집의 어린이 학대 문제가 터지자 '육아는 엄마의 몫'이라는 내심의 시각이 '엄마 기자의 분노'라는 기사들로 표출됐다.
두개의 삽화는 여성 기자 비율 25% 시대 한국 언론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채용·인사 등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대놓고 불이익을 주지는 않지만-명시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은연중에 불이익을 주거나 배제하는 곳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여성에 대한 전근대적인 성역할을 여성 기자들에게 대입시키는 '정치적 올바르지 못함'(political incorrectness)이 여전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함께 일했던 여성 기자들은 남성 기자들이 그다지 자각하지 못하는 이런 정치적 올바르지 못함에 대해 때로는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때로는 우회적으로 개선을 촉구하거나, 때로는 좌절하면서 맡은바 임무를 해내고 있었다.
2.
"국장이 지시한 건데 이걸 어떻게 쓰냐하면 말이야…." 2년 가까이 시경을 출입하면서 많은 후배 기자들과 함께 일했다. 정확히 세보지는 않았지만 함께 일한 후배들 가운데 절반 가량이 여성 기자들이었던 것 같다. 시경 캡의 주요 역할은 사건기자들의 발제를 함께 고민하고 다듬어 데스크에 보고하고, 데스크가 채택한 기사 꼭지와 그것들의 '주제'를 사건기자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사람의 개성은 제각각이어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범주로 나누는 건 부질없지만 이런 후배, 저런 후배를 겪으면서 느낀 점을 굳이 정리하자면 여성 후배들은 남성 후배들에 비해 자신이 써야 할 기사에 대한 납득과 확신을 더 많이 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애초 본인이 발제한 주제대로 기사가 채택됐을 때는 설명하는데 별다른 무리가 없다. 하지만 당초 발제한 주제를 틀어서 쓰라고 한다거나, 그가 발제하지 않은 이른바 '데스크 발제' 기사를 쓰라고 요구할 경우 자세히 설명해줘야 한다. 그런데 상대가 여성 기자일 경우 남성 기자에 비해 설명에 들어가는 시간과 어휘가 30% 가량은 더 많았던 것 같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모두 그랬다는 것은 아니고 대체로 추세가 그랬다는 것이다. 여성 후배들은 본인이 납득하지 못할 경우 남성 후배들에 비해 되묻는 빈도가 더 높았다. 끝내 납득하지 못할 경우 '어필'을 하는 빈도도 더 높았다. 그래서 기사를 지시할 때 상대가 여성 후배일 경우 전화를 걸기 전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설명할 논리를 한번 더 정리하는 습관이 생겼다. 지시를 행동으로 옮기기 전 그 지시의 취지와 의미를 완전히 납득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순응도가 낮다는 뜻이다. 이는 조직 차원에서 보자면 상명하복의 일방적 의사소통이 아니라 쌍방향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높인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다. 지시에 맹목적으로 따르기 보다는 지시의 의도와 취지를 되묻고 거기에 더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기자에게 요구되는 바람직한 자세이기도 하다.
3.
한 여성 후배가 유명 고위 공직자의 부인을 둘러싼 한 사립대학의 특혜 의혹에 대해 기사를 쓴 적이 있었다. 대선후보로까지 거론되던 유명 공직자의 부인이 한 사립대학의 주요 보직에 임용됐는데 자격과 임용과정이 불투명해 특혜를 준 것 아니냐는 지적이 대학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해당 공직자 측의 해명까지 반영해 토요일자로 지면에 게재했다. 그런데 쉬는 날인 토요일 오후 해당 기사가 온라인에서 사라졌다. 문제는 해당 기사를 출고한 기자는 이같은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것이었다. 온라인에서 관심을 받던 기사가 갑자가 삭제되니 네티즌들은 고위 공직자의 외압을 받아서, 혹은 눈치를 보느라 삭제한 것 아니냐고 말들이 오가기 시작했고 출고 기자는 그제서야 이 사실을 알게됐다.
불쾌감과 당혹감을 느낀 이 후배는 진상을 밝힐 것을 '윗선'에 요구했다. 결국 고위 공직자가 몸담은 조직의 공보팀과 사립대학 측에서 편집국장 등에게 전화를 걸어 특혜설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하며 항의했고, 해당 기사의 전말에 대해 자세하게 알지 못한 편집국장이 온라인 운영자와 사회부 데스크 등에게 해결을 지시해 일단 기사를 내리기로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후배는 상대적으로 주의와 긴장이 느슨한 토요일에 벌어진 일이긴 했으나 기사를 철회할만한 명백한 반증이 제시되지 않은 상황에서 출고기자에게 아무런 설명 없이 지면에 실린 기사가 온라인에서 삭제된 것은 문제라며 문제제기를 이어갔다. 당시 사건팀의 다른 동료들도 이 문제제기에 동참했다. 노조가 개입해 노조위원장이 편집국장을 만나 해명과 유감표명, 재발방지책 마련 약속 등을 받아냄으로써 이 일은 일단락 됐다. 입사 몇년차 되지 않은 후배로선 아무리 불쾌하고 화가 난다 하더라도 위계가 강한 신문사에서 자신이 속한 사회부의 부장, 그리고 편집국장을 상대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매우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후배는 자신의 문제의식을 명확히 전달했고, 흥분하지 않고 상당히 세련된 방식으로 의제를 밀고 나갔다. 이 후배가 정확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문제제기를 한 덕에 경향신문은 온라인 기사 운용에 관한 새로운 가이드라인을 갖게 됐다.
4.
역시 시경캡을 맡고 있던 시절의 일이다. 선배 한분이 후배들에게 저녁을 사주고 싶다고 했다. 저녁 회식을 하고 2차 술자리를 가졌다. 2차 자리는 큰 빌딩 지하 아케이드의 카페였다. 젊은 여성 종업원 한명이 테이블을 옮겨 다니며 술을 따라주기도 하고 오징어를 찢어주는 카페 형식의 술집이었다. 권커니 잣커니 하면서 나름 즐거운 술자리를 가졌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뒤 한 여성 후배로부터 메일이 왔다. 그날의 술자리가 불편하고 불쾌했다는 내용이었다. 왜 여성 종업원이 손님에게 술을 따라주어야 하는지 납득하기도 어렵고, 선배로서 일그러지고 편향된 성 역할을 후배들에서 강요한 것에 다름없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그날 술자리에서 어떤 실수를 한 것은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다른 여성 후배에게 전화를 걸어 그 술자리에서 내가 혹시 나도 모르게 어떤 실수를 하지는 않았는지 물었더니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한편으로 마음이 놓였지만 그 술자리를 불편하게 느낀 후배의 심정을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그 후배의 말마따나 부지불식간에 내가 '술 따르는 여성'이라는 관행을 후배들에게 강요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후배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면서 고맙다고 했다. 내가 떳떳하고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말이나 행동이 다른 처지에서 본다면 전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되새기게 해줬기 때문이다.
5.
후배 여성 기자들에게서 관찰됐던 강한 자의식, 그리고 관행에 대해 비타협적이며 쌍방향적 의사소통을 요구하는 모습들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먼저 군대라는 강압적 조직 문화의 경험 유무를 생각해볼 수 있다. 언론사에 입사하기 전 이미 상명하복의 대명사인 군대 생활을 경험한 남성 기자들은 조직에 대한 순응도가 강압적 조직문화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은 여성 기자들에 비해 높을 개연성이 크다. 조직에 대한 순응은 조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자세이긴 하지만 맹목적인 순응은 위험하고 조직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성들이 남성에 비해 기자라는 직업적 타이틀을 갖기까지 뚫어야 할 경쟁이 더 치열한 것도 여성 기자들의 높은 자기확신을 낳는 것으로 보인다. 사법연수원 교수로 있었던 분으로부터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법시험을 통과해 연수원에 들어오는 예비 법조인을 성별로 구분해보자면 여성들이 남성에 비해 직업적 지향과 목표가 뚜렷하다고 했다. '왜 법조인이 되고자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남성들은 일반론적으로 두리뭉실하게 얘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성들은 자신의 포부를 6하원칙에 가깝게 또렷하게 그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많이 개선됐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우세한 사회구조 속에서 경쟁을 헤쳐나가면서 자기확신을 위한 단련이 많이 됐기 때문으로 보인다는게 그 분의 해석이었다.
이밖에도 여러 요인이 여성 기자들의 '성향'을 형성하는데 복합적으로 기여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들이 보여준 모습을 부정적이기 보다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경우가 더 많았다. 물론 어떤 고참 선배들, 남성 기자들은 술자리 뒷담화 자리에서 여성 기자들이 고집이 세다거나 까탈스럽다고 투덜댄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남성 기자들의 비율이 훨씬 높은 언론사 조직에서 일하는 여성 기자들이 미꾸라지 무리 속의 메기와 비슷화다는 생각을 해본다. 메기가 함께 생활하면서 적절한 위협과 자극을 제공하는 미꾸라지 무리는 그렇지 않은 무리보다 건강하다고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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